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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42] 동백에 취하다 경남 통영시 두미도
[김준의 섬 여행 42] 동백에 취하다 경남 통영시 두미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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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통영] 나이 든 어머니는 화단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젊은 사람에게도 가파른 길. 언덕배기 옹색한 곳에 터전을 잡은 탓에 집들은 골목 보다 낮고, 바다 쪽 돌담은 지붕보다 높다. 마실을 가시는 걸까. 오른손에 쥔 종이를 보니 우편물이다. 고지서를 들고 이장에게 가시는 걸까. 한참을 지켜보다 배에 오르는 일행을 보고 종종걸음으로 동백숲을 빠져나왔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철 지난 물메기가 선창에 걸렸다. 고향 맛을 기억하고 있는 자식들에게는 ‘미기’가 제일이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미륵, 섬에 머물다 

두미도는 통영시 욕지면에 속한 작은 섬이다. 통영보다 삼천포와 가깝다. 그래서 잡은 고기를 팔거나, 시장을 보거나, 학교를 보내거나, 결혼을 시킬 때면 삼천포로 먼저 달려갔다. 지금도 삼천포에 5일장이 서는 날(4일, 9일)이면 통영에서 두미도를 오가는 두 차례 뱃길 중 한 차례는 두미도와 삼천포로 항로를 바꾸고 있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욕지도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자 앞서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두미도는 통영에서 가장 높은 천황봉이 있어 팔방으로 주변 섬을 볼 수 있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거리로만 보면 남해군과는 더욱 가깝다. 100여 년 전 남해 사람이 처음 들어와 섬을 개척했단다. 뱃길로는 통영항에서 우도, 하노대도, 상노대도, 두미도, 욕지도를 거쳐서 도착하는 끝 섬이다. 오가는 사람은 적어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어 겨우 배가 닿는 통영시의 유일한 ‘명령항로’이다. 마을은 구전, 청석, 대판 마을이 속한 남구와 설풍리, 고운리, 사동으로 이루어진 북구가 있다. 몇 고개를 넘어야 오갈 수 있었던 길은 최근 해안도로로 개통되었다. 원래 둔미(屯彌)섬, 디미섬이라 불렸다. ‘미륵이 머물렀던 섬’이라니. 두미도 주변에는 미륵도, 연화도, 욕지도, 세존도 등 불교적인 색깔이 강한 지명이 많다. 해방 직후 130가구에 720여 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구와 북구에 50여 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다. 

다이빙과 미기
남구 선착장에 도착하자 한 주민이 마중을 나와 있다. 대판이 고향인 문재호 씨다. 퇴직하면 귀향할 생각으로 시간이 되는 대로 고향지킴이로 활동 중이다. 문 씨의 안내를 받아 식당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식당 이름이 ‘마린 센터’다. 선창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에 숙박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다. 여기에 스쿠버 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장비를 갖춘 다이빙 숍도 마련돼 있다. 몇 년 전 통영시가 두미도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해양생태자원을 활용해 ‘해저생태체험지구’로 개발하면서 만들어진 곳이란다. 오늘 걷게 될 등산로와 해안산책로도 이 사업을 통해 추진된 것이다. 

두미도 사람들은 겨울에 미기(물메기), 봄에는 도다리와 가오리, 여름에는 서대, 갈치, 갑오징어를 잡는다. 가을에도 여름과 비슷한 물고기로 생계를 잇다 다시 겨울이 돌아오면 물메기를 찾아 바다로 나간다. 미기가 제일 돈이 된다. 깎아지른 가파른 땅을 일궈 보리를 심어 식량하고 마늘을 심어 팔았다. 지금은 모두 묵정밭으로 변했다. 이곳 사람들에게 다이빙 숍과 마린 센터는 너무도 생경하다. 두미도가 생태?사회?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섬이 되려면 ‘미기’와 ‘다이빙’의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선창에서 마을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뱃길보다 저 길이 힘들어 자식들에게 가지 못한다는 말이 허투루 한 소리가 아니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돌담과 동백
이번에는 작정하고 천황봉(467m)을 오를 계획이다. 산의 높이만 생각하고 야트막한 동산으로 생각하지 말라. 문 씨도 정상을 갔다 오는데 족히 세 시간은 잡아야 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남구 선창에서 산책로로 곧장 오르는 길은 코에 닿을 듯 경사가 급하다. 저 길을 노인들이 어떻게 오르고 내렸을까. 붉은 우체통과 담쟁이가 붙든 돌담이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언덕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고개를 내밀며 객을 맞았다. 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돌담은 섬주인 만큼이나 나이가 들었다. 그 앞으로 줄지어 심어 놓은 수 백 년 된 동백나무가 붉은 꽃을 소담스레 매달았다. 저 꽃도 봄이 오면 툭, 고개를 떨구겠지.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동백이 피었다. 산에 오르던 나그네는 길 가는 것을 잊었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동백나무를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언제나 긴 머리를 한 올 한 올 다스려 동백기름을 발라 쪽을 지고 비녀를 꼽았다. 시골마을에서 곱기로 소문난 우리 할머니. 할머니 곁에 가면 늘 고소한 동백기름 냄새가 났다. 박카스 병에 동백기름을 담아 선반에 얹어 두고 애지중지 간직하셨다. 정작 그 기름이 동백꽃이 지고 나서 열린 열매의 속살로 만든다는 것을 안 것은 철이 들고서도 한참 뒤였다. 


동백은 혼례식의 초례상에 꽂을 정도로 상서로운 나무로 여겼다. 나무가 단단하고 치밀해 악기, 가구, 얼레빗, 목탁, 칠기 등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꽃은 선비의 청렴과 절조를 상징하고, 자식을 많이 낳고 아들을 낳게 한다고 믿었다. 일본에서는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진다고 해서 불길하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동백나무를 신목으로 모시는 마을이 있고, 꽃을 보고 그해 농사나 운을 가늠하기도 했다. 물에 빠져 죽은 이의 넋을 건질 때는 동백나무 가지를 사용하기도 했단다. 
동행한 강제윤 시인이 두미도에는 흰 동백이 자생한다고 알려줬다.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한 걸음에 욕심껏 보고 갈 수 없지 않는가. 발길 닿는 대로, 보이는 대로 보고 가는 것으로 족하다. 돌담과 동백 사이로 작은 길이 있다. 골목길이자 북구로 가는 길이요,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두미도 남구 사람들이 태풍보다 강하다는 계절풍 속에서도 함석지붕을 지탱하며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동백 숲과 돌담 때문이리라. 두미도 동백은 특별히 붉다. 향기가 없는 대신 붉은 색으로 동박새를 불러 온다. 동백이라면 선운사, 오동도, 거문도, 마량(서천), 대청도, 지심도 등을 꼽는다. 이제는 두미도 동백도 목록에 올려야겠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섬 노인을 보니 반가워 말을 붙였다. 대답 대신 ‘담뱃불’ 조심하란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담뱃불 조심하이소
청석마을로 가는 길목, ‘동뫼’라 부르는 곶의 끝에 전망대가 있다. 노대도, 욕지도를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벌써 일행은 전망대를 거쳐 등산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꾸 나무, 돌, 풀, 꽃 눈길을 주다보니 꼴찌는 맡아 놓았다. 급히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담뱃불 조심 하이소”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아보니 칠순은 넘었을 사내가 동백을 비롯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가진 잔가지를 한아름 베어 지게에 올리고 있었다. 대판에 산다는 사내는 산에 방목되어 있는 염소 몇 마리를 시나브로 잡아서 줄에 매어 기르고 있다고 했다. 가지치기를 겸해 염소 먹이를 마련하는 중이었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천황봉에 오르는 길, 선창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동백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자라서 숲을 이루지 않았다면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4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산길로 접어들고 얼마 되지 않아 앞서가던 일행을 만났다. 맨 앞에는 김창록 씨가 있었다. 두미도를 찾은 사람들은 그를 ‘두미도 기봉이’로 기억한다. 필자도 섬을 찾기 전부터 김 씨의 소식을 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김 씨의 맑은 웃음과 친절, 두미도 사랑 그리고 검정 고무신을 이야기했다. 그를 만난 곳은 욕지도와 노대도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산허리였다. “저 섬이 매물도네 아니네, 연화도가 맞네 아니네” 일행과 즐거운 입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섬의 위치보다는 김 씨의 신발부터 확인했다. 역시 검정 고무신이다. 등산화를 신어도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불안한데, 검정 고무신의 김 씨는 산양이 벼랑을 지나 듯 사뿐사뿐 걸었다. 신발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발은 섬을 알고 길을 읽었다. 신발에 의지해 걷는 관광객과 달리 김 씨는 마음으로 섬 길을 걷고 있었다. 진정 섬의 주인이다. 바람을 막는 동백과 돌담도, 높은 계단을 오르던 나이 든 어머니도, 동백의 잔가지를 잘라 염소를 먹이는 아버지도 모두 섬의 주인이다. 섬은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길을 만들 때도, 숙박시설이나 체험시설을 만들 때도 그리해야 한다. 주인과 객이 바뀌면 섬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붉은 동백꽃이 지면 진달래가 필 것이다. 천황봉의 진달래를 보겠다고 객들이 들기 시작할 터. 내려오는 길에 또 다른 섬 주인 노루귀꽃에 반해 머뭇거리다 다시 꼴찌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도다리 쑥국은 꼴찌한 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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