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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상재 박사의 차 여행⑥] 할매들이 약처럼 마신 차, 하동의 잭살을 만나다
[이상재 박사의 차 여행⑥] 할매들이 약처럼 마신 차, 하동의 잭살을 만나다
  • 이상재 박사
  • 승인 2014.03.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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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여행스케치=하동] 경남 하동군 화개에는 할매차가 있다. 할매가 차를 만들고 할매가 끓여 주는 차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특별한 차의 다른 이름은 ‘잭살’이다. 원래는 작설(雀舌)인데 이곳에서는 ‘잭살’이라고 부른다. 작설의 사투리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차를 흔히 작설차라고 불렀다. 

‘잭살’은 작설에서 비롯된 이름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다관에 넣고 물의 온도와 시간을 맞춰 정성껏 우려마시는 작설차와는 확연히 다르다. 먼저 옛 사람들의 글이나 노래를 통해 이차를 만나보자. 초의선사(1758-1866)는 <동다송>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화개동에는 옥부대가 있고, 옥부대 아래에는 칠불선원이 있는데 그곳에 좌선하는 스님들은 항상 늦게 쇤 잎을 따다가 햇빛에 말려서 땔나무로 솥에 차를 끓이는데 시래깃국처럼 끓여버리니 차는 진하고 탁해 붉은색이며 맛은 아주 쓰고 떫다. 이것을 두고 말하기를 “천하의 좋은 차를 저급한 솜씨로 망쳐 놓았다”고 하는 바이다.

한영정호(1870-1948)스님의 <옥부대 아래 다풍이 무너지다>라는 제목의 다론(茶論)에서 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지리산은 차의 산지인데 오직 화개동만 산의 서남쪽으로 수백의 땅에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하동의 악양면, 화개면, 와룡면 등이 비록 거친 농촌이지만 차를 끓여 아침저녁으로 식사 후에 늘 마시지 않는 집이 없다. 이곳 사람들은 차를 탕약으로 알고 겨울에 감기 걸렸을 때 땀을 내는 약으로 사용한다. 다풍이 크게 무너진 것이다. 어찌 다법을 논하리오.
(박희준의 <작설고(雀舌考)>에서 재인용)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화개장터에서 칠불사로 오르는 길에 만난 넓은 차밭.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천하의 좋은 차를 버려놓고 있다고 혹평하고, 식후 소화제나 감기약으로 전락해버려 차로서의 가치를 잃었다고 한탄한 바로 그 차가 잭살이다. 잭살은 차 자체로는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약으로서의 차’ 문화의 측면에서는 귀중한 의미를 지닌 차다. 조선 후기 중국의학의 조선화와 함께 만들어진 한국의 약차문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몸에 좋은’ 이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발전해 온 독창적인 한국차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차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전해내려 오고 있는 이 잭살을 만나기 위해 화개장터로 유명한 하동의 화개면을 찾은 것은 우수(2월 19일)가 며칠 지난 후였다. 보통 녹차 잎은 곡우(4월 20일)를 전후해서 따기 시작하므로 아직 새잎이 나기 한참 전이다.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길가에서 할매들이 팔고 있는 차와 약재들.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지나 칠불사로 올라 보기로 했다. 초의선사도 그 길을 따라 칠불선원에 올랐을 것이다. 차를 타고 오르면서도 그 운치를 느끼고 싶어 중간 중간 내렸다. 사실 이곳은 벚꽃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유명한 쌍계사 십리벚꽃길이다. 나도 예전에 벚꽃 구경하러 온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벚꽃의 화려함에 감춰져 있던 차밭이 눈에 들어 왔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에 걸쳐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 생산지로는 이보다 더 넓은 곳이 없다’ 라고 한 초의선사의 말이 맞았다. 곳곳이 차밭이었다. 잘 가꿔진 차밭 뿐 아니라 산기슭에는 야생차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다 보니 컴컴해져서야 칠불선원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칠불사에서는 잭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보잘 것 없는 차 이야기가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칠불사의 후한 인심 덕에 맛있는 절밥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쌍계사 근처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은 본격적으로 잭살을 찾아 나섰다. 기대를 걸었던 하동 차문화전시관에는 잭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다만 차 민요 가사 중에 잭살 이야기가 있었다.  

잘못 먹어 보챈 애기 / 작살 먹여 잠을 재고 / 큰 아기가 몸살 나면 / 작설 먹여 놀게 하고 / 엄살 많은 시애비는 / 작설 올려 효도하고 / 시샘 많은 시어머니 / 꿀을 드려 달래 놓고 / 혼자 사는 청산이는 / 밤늦도록 작설 먹고 / 근심 없이 잠을 잔다 / 바람 바람 봄바람아 /  작설 낳게 불지 마라 / 이슬 먹은 작설 낳게

이 가사에서도 잭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소화불량이나 몸살, 근심으로 잠을 못 이룰 때 약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이 특별한 차를 차약(茶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특별한 잭살 이야기를 잘 살리지 못한 하동 차문화전시관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쌍계사로 향했다.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돌무더기 사이사이의 야생 녹차.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쌍계사로 오르는 길에 여러 가지 산나물이며 지리산 약재들, 직접 잘라 만든 감 말랭이, 고구마, 토란 등을 파는 할매들을 만났다. 그곳에 잭살이 있었다. 큰 비닐에 차가 담겨져 있고 빨간 플라스틱 그릇에 소복히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이 장면이 나는 참 감격스러웠다. 차를 조금씩 덜어 파는 걸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차 가게에 가면 차를 원하는 만큼 덜어서 파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차 가게에서 파는 차는 언제나 지관이라 불리는 원통이나 고급스런 나무상자나 박스에 담겨져 있다. 자기가 먹을 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위해 차를 사는 사람이 많아서 차포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 받은 차를 꾸준히 마시는 경우는 드물다. 한두 번 우려 마시다가 어딘가에 구겨 넣어 두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어느 날 발견하곤 너무 오래되었는데 먹어도 될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 한국 녹차의 현실이다.

할매는 이 차 앞에 잭살 대신 ‘바로차’라고 쓰셨다. 발효차라고 쓰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요즘 발효차의 인기를 할매도 알고 계시는 듯 이 차의 장점을 계속 말씀하셨다. 자신의 예전 경험보다는 요새 주워들은 이야기들이다. 내가 잭살이 어떻고 하면서 이런저런 아는 체를 하니 그제야 옛날이야기를 해 주셨다.

“옛날에는 방 한 구석의 화롯불이 다 있었어. 그 화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 두는데 보통 잭살을 끓였지. 잭살 한줌 넣고 똘배나 모과 같은 것도 썰어 넣지. 밥을 먹고 나면 숭늉 마시듯이 마셨어. 이걸 마셔야 소화가 잘 돼. 그냥은 쓰서 먹기가 힘들어 그래서 사카린을 넣었지. 그럼 달달하니 맛이 괜찮아. 감기 걸렸을 때는 잭살에다가  인동덩쿨을 더 넣어서 끓이는데 그 놈을 먹고 땀을 빼면 감기가 뚝 떨어졌어”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유자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차를 채워 말리는 모습. 2014년 4월 사진 / 이상재

그리고 만드는 방법도 설명해 주셨다. 이 동네에는 논밭 가장자리의 자갈밭이나 산에 차나무가 많아서 그걸 따다가 만들었다고 했다. 봄에 한창 바쁠 때는 찻잎 딸 시간도 없고 모내기를 다 해놓고 좀 한가해지면 그제야 차나무가 눈에 들어왔단다. 그때는 이미 찻잎이 커져서 쇠고 난 후라 손으로 대충 훑어서 딴단다. 집에 가져와 절구에 넣고 찧어서 방에 널어 며칠을 말린다고 했다. 할매의 차 만드는 이야기는 차를 만든다기 보다는 가정상비약을 준비해 둔다는 인상을 주었다. 

요즘 하동에서 이 잭살을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접했다. 유자잭살, 홍잭살과 같은 차 제품도 나오고 있었다. 경쟁력을 잃은 한국 차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많다.  18세기 이후 의약 지식이 민간으로 퍼져나가면서 형성된 우리나라의 독특한 약차문화가 한국차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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