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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47] 물질하는 재미에 시름도 잊었다 제주시 추자면 횡간도
[김준의 섬 여행 47] 물질하는 재미에 시름도 잊었다 제주시 추자면 횡간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08.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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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여행스케치=제주] 하루에 한 번도 아니다. 일주일에 딱 네 번 뱃길이 열린다. 행정선이면 어떤가. 택시처럼 배를 부르려면 꽤 부담스런 뱃삯을 지불해야 한다. 하추자도 예초리항에서 낚싯배에 올라탔다. 가는 길에 좀처럼 방문하기 어려운 추포도에도 들렸다. 횡간도에는 해녀 두 분이 선창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어제 갯가에서 뜯어온 미역이 햇볕에 잘 말랐다. 어디 미역뿐인가.할머니 분홍색 내복과 옷가지 몇 벌도 아침나절에 모두 말랐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태풍과 외적이 비껴간 ‘빗겐이’

횡간도는 추자도에서도 7km 남짓 들어가야 닿는다. 추자도는 상추자도, 하추자도, 추포도,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군도다. 이중 횡간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에 딸린 작은 섬이다. 한 때 3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모두 7명이 섬을 지키고 있다. 300여 년 전 강 씨가 처음 들어왔다 하며 달성서 씨, 김해김 씨, 전주이 씨가 자리를 잡았다.

과거에는 횡간도를 ‘빗겐이(빗게니, 빗겡이)’라 불렀다. ‘대동여지도’ 등 옛 지도에는 ‘횡간도(橫看島)’라 표기되었고, 1872년 지방지도 ‘영암추자도’ 등에는 ‘황간도(橫干島)’라고 적혀 있다. ‘빗겐이섬’의 한자 차용 표기이다. 18세기 중반의 ‘제주삼읍도총지도’에는 ‘빗거리(非叱巨里, 비질거리)’라 표기하기도 했다. 촌로들은 지금도 횡간도보다는 ‘빗겡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다. 

같은 이름의 섬이 완도, 여수, 영광 등에 있다. 모두 ‘빗깐이’, ‘빗겡이’, ‘빗게니’ 등으로 불렸던 섬이다. 섬이 비스듬하게 누워 있고, 경사가 심하며, 태풍이나 외적이 비껴간 섬이라는 스토리가 덧붙여지기도 했다. 뱃길이 험하고 섬도 자그마하니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 곧잘 간첩이 출몰하기도 했다. 행정선이 가져오는 생수와 생필품에 의지해 살고 있는데, 다행이 선창에서 마을까지 이어지는 벼랑길에 모노레일이 놓여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짐을 들고 오르내리는 고충은 덜게 되었다. 

섬의 동쪽에 두 개의 ‘미역섬’이 있고, 서쪽에는 ‘문녀’가 있다. 미역섬은 작은미역섬과 큰 미역섬,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곽도’나 ‘미역서’라고도 했다. 미역 등 해초가 많이 나는 섬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영흥리에 속한다. 문녀는 대서리에 속하는 무인도로 ‘문섬’이라고도 하는데 바위로만 이루어진 뭉뚝한 섬이다. ‘문’은 ‘믠 > 민’으로 추정한다. 횡간도에 딸린 작은 섬들이지만 주인은 큰 마을인 대서리와 영흥리가 가지고 있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횡간도는 바위섬이다. 지금도 씨를 뿌리지 않아도 해녀들이 손바닥만 한 자연산 전복을 따는 곳이며, 갯바위에는 돌미역과 가사리가 자란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자연산 전복을 사다
추포도에서 출발한 배는 횡간도 발전소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창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배안이 소란해지더니 너도나도 뱃머리에서 사진을 찍느라 야단이었다. 두 명의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살갑게 포즈를 취하더니 이내 자연산 전복을 보여주며 구입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고 밉지 않는 상술이었다. 얼핏 보아 젊은 해녀는 60대 초반으로 보이고 나이가 지긋한 잠수는 훨씬 많아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횡간도 해녀는  두 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이든 잠수는 80대 후반이라 했다. 배가 접안을 하자 그들은 망사리를 들고 뭍으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흥정을 시작했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횡간도에는 물질하는 해녀가 두 명이다. 한 명은 60대, 다른 한 명은 80대. 얼마 전까지 네 명이 물질을 했지만 두 명은 은퇴 했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살라면 전부 사고 아니면 그만두라.” 단호했다. 보기에도 전복이 실하고 큰데다 자연산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들 입맛을 다셨다. 결국 두 해녀의 전복을 모두 구입했다. 그 사이에 해안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길가에 산딸기, 인동초, 엉겅퀴, 개망초 등이 길을 안내했다.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심어진 고구마 순이 햇볕에 힘겨워 했지만 바다 위에 살포시 떠 있는 추포도와 크고 작은 무인도들은 평화로웠다. 그 사이로 통발을 놓는 배와 낚싯배가 오갔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섬을 찾은 날 운 좋게 선착장에 내려 두 명의 해녀를 만났다.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없는 선착장이기에 뱃길이 끊기는 일이 잦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귀신에게 젓갈을 팔아먹은 부자
횡간도에는 귀신에게 젓갈을 팔아먹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횡간도에서 일등 부자 소리를 들었던 이봉춘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한 해에 보리를 40여 가마를 들이고 멸치를 많이 잡아 젓갈을 만들어 돈을 벌었다. 특히 멸치젓은 해남 어란과 관두까지 가지고 가서 팔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사서 군산과 인천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추자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부자였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어느 해 안개가 많이 낀 날이었다. 그날도 이 씨는 어김없이 뭍에서 장사를 하고 섬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에 지나는 배가 거의 없는 바다에서 낯선 배가 다가오더니 다음해 멸치젓을 담가달라며 많은 돈을 주고 가버렸다. 선불을 받은 터라 이 씨는 다음해 잡은 멸치로 젓갈을 담가 놓고 그 사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가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사내는 오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도깨비가 이 씨를 부자로 만들어 주려고 돈을 주고 간 것이라고 소문이 났다. 

추포도 인근에 고기가 많아 낚시꾼의 발길이 이어지지만 정작 섬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다. 겨우 작은 배 두 척이 있다지만 제대로 어장을 할 수 있는 배도 아니다. 겨우 갯가에서 미역, 톳, 가사리를 뜯고, 해녀들이 물질을 해서 전복과 소라를 잡는 것이 전부였다. 몇 년 전까지 네 명의 해녀가 물질을 했다. 그 사이 두 명은 그만 두었다. 마을에서 만난 최 할머니도 그 중에 한 분이다. 할머니는 아흔에서 세 살 모자라는 작년에 물질을 그만두었다. 스무 살부터 물질을 했으니 7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바다와 함께 살아 왔다. 영흥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뭍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결혼하면 섬을 떠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선택을 했다. 그런 첫해부터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혼자 섬에 살고 있었고, 소도 세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 당시 횡간도는 약 3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보리와 고구마로 식량을 하고, 톳밥으로 연명을 했다. 집집마다 소를 몇 마리씩 키우고 있어 모두 100여 마리로 주민보다 소가 더 많았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외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주민들도 찾는 일이 별로 없는 최 씨 할머니 집. 문설주에는 지난해까지 소라와 전복의 무게를 달던 작은 저울이 보물처럼 걸려 있었다. 2014년 9월 사진 / 김준

바다 속에서는 걱정이 없어
최 할머니는 시집을 와서 눈이 한 개인 큰 수경 ‘큰 눈’과 눈 두 개짜리 수경 ‘작은 눈’을 가지고 물질을 배웠다. 미역을 뜯어서 잘 말려 목포나 해남을 가지고 나가 쌀과 바꿔왔다. 두 가닥씩 열 개를 한 뭇이라 하고 열 뭇을 한 동이라 했다. 많이 할 때는 한 동을 하기도 했다. 부족한 식량은 보리와 고구마로 끼니를 이었다. 그래도 부족할 때는 어김없이 톳밥이 올라왔다. 물질로 두 아들과 두 딸을 키웠다. 교육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배를 곯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 간간이 목이 잠기셨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셨다. “바다 속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잊혀져. 소라, 전복 살아 있는 것 잡는 게 재밌어.” 아마 바다가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적인 것만 해결해 준 것이 아니었다. 외로움과 슬픔 모두 바다에만 나가면 잊을 수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위로 오르자 학교터가 나왔다. 횡간분교라는 간판은 차마 뜯지 못했던지 20여 년째 그대로 세워져 있다. 손바닥만 한 운동장에 들어서자 섬 노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듯 요란한 모터소리가 들렸다. 물탱크에 물을 끌어 올리는 소리였다. 지금은 제주시에서 생수를 공급해주기 때문에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있다. 횡간분교장은 1951년 설립되어 26회에 걸쳐 16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로 가득했을 교실은 물탱크로 채워져 있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선창으로 향하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오는 잠녀들을 만났다. 할머니가 한사코 보찰이라도 싸주겠다는 것을 겨우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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