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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 48] 등대 앞에 펼쳐진 푸른 섬 전북 군산시 어청도
[김준의 섬 여행 48] 등대 앞에 펼쳐진 푸른 섬 전북 군산시 어청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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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군산] “우리도 4개월 만에 처음 캐는 거유, 이것 보고 사는데. 선유도에서는 캐지 않으면서 왜 어청도에서는 캔대유” 칠순의 어머니는 바지락을 캐다 말고 충청도 사투리에 가까운 말투로 외지인을 나무랐다. 바지락 밭에서 뒷걸음질로 나오는 부부의 손에 호미와 바구니가 들려있다. 상습범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여행객이다. 슬금슬금 농배바위 쪽으로 물러나 고둥을 줍더니 주민이 시선에서 벗어나자 다시 바지락을 캐기 시작했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갯벌은 먼바다에 기대어 사는 어민이나 연안의 주민 모두에게 소중한 보물 창고다. 더구나 좋은 바지락밭이라면 금싸라기 문전옥답이나 다름없다. 간혹 여행객이 놀이 삼아 일삼아 드나드는 것을 보면 불편하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뱃길을 이어라

어청도는 일제강점기에 효자도, 원산도, 장고도, 삽시도, 외연도, 녹도 등과 함께 충남 오천면에 속했다. 오천면 외연도와 거리는 14km지만 전북 연도와는 40km나 된다. 나이가 드신 어머니들 중에는 충청도가 고향인 분들이 꽤 있다. 예전에는 생활권이 보령이었다. 전북 군산시로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보령항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호도, 녹도, 외연도 등을 경유해 지척에 어청도를 두고 되돌아간다. 마찬가지로 군산항에서 출발한 배는 연도와 어청도를 경유해 코앞에 외연도를 두고 되돌아간다. 보령항에서 외연열도를 거쳐 어청도와 연도를 경유해 군산항으로 연결하는 뱃길이 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뜩이나 이용객이 적어 평일에는 한 번, 주말에는 두 번 운항하는 명령항로가 아니던가.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어청도에서 고래가 잡히고 조기가 지천일 때가 있었다. 섬의 미래는 장밋빛처럼 보였다. 그 무렵 골목에 숙녀복과 액세서리, 란제리를 파는 양품점도 들어섰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목넘 산 능선에 핀 섬잔대와 오이풀이 섬에 가을을 재촉한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배 안에는 늦은 여름휴가를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휴가철이 아니라도 낚시꾼이 즐겨 찾기 때문에 겨울을 제외하고 주말에 섬 여행을 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삼치가 걸리기 시작하면 이제 가을 문턱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마리 회로 썰어 먹고 해풍에 말린다. 자식들에게 줄 선물이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섬에 300여 가구에 1200여 명의 주민이 살 때는 산 능선까지 집이 있었고, 초등학생만 300명이었다. 지금은 전체 주민이라 해봐야 겨우 100여 명을 유지하고 있고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각각 4명이다. 학생보다 선생님이 더 많다. 다행스럽게 명품섬으로 지정되어 탐방로, 목교, 철새 관련 탐조시설 등이 만들어졌지만 주민이나 관광객에게 호평을 받지 못했다. 어청도는 가운데 위치한 안동네를 기준으로 선창 끝머리에 해망동과 교회가 있는 백사장동네로 나누어져 있다. 해망동은 군산 선창의 끝동네의 이름을 빌러 온 것 같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밥맛도 없고 국을 끓이기도 귀찮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안살림하는 어머니들은 머리가 아프다. 이럴 때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미역냉국이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미역냉국에 반하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잠깐 산책을 하겠다고 출발한 걸음이 돗대봉에 이르고 말았다. 10여 년 전에는 없던 산책길이었다. 백사장동네에서 해안을 따라 갯벌 위에 나무다리를 놓았고, 곰산, 목넘, 안산, 검산봉, 돗대봉 등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 사이 해는 머리 위까지 올라왔고, 낚싯배들도 점심시간에 맞춰 하나 둘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등산에 가까운 산책을 한 탓에 허기가 졌고, 물도 챙기지 않아 갈증도 심했다. 날씨마저 바람이 없는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벌써 셔츠는 축축해져 땀은 그대로 등골을 따라 흘러내려 팬티까지 점령을 했다. 바다 건너편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2km남짓 되는 4개의 고개를 넘어 가려하니 아득하고 현기증도 생겼다. 결국 되돌아오다 목넘에 이르러 드러눕고 말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섬잔대와 오이풀이 야속해 보였다.

갈증과 주린 배를 붙잡고 슈퍼로 향했다. 눈앞에 보이는 가게가 천리는 되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생막걸리를 한 병 빼들고 안주도 없이 거푸 마셨다. 막걸리는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뭄으로 쩍쩍 벌어진 논바닥에 물을 대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민박집 주인이 알려준 군산식당을 찾아갔다. 백반으로 나온 반찬이 간재미짐, 조개젓, 미역냉국이었다. 물론 모두 어청도산이다. 식당주인이 직접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기 때문에 가능한 상차림이다. 갯바위에서 직접 뜯은 돌미역 냉국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 맛있는 미역냉국을 언제 맛본 적이 있던가. 기억에 없다.

어청도는 예로부터 돌미역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주민들이 채취하는 해조류다. 서른 가닥을 묶어서 한 꼭지라 하고, 10개의 꼭지를 묶어 한단이라 불렀다. 한 꼭지는 3만5000에 거래되고 있다. 늦봄에 시작해 여름까지 하는데 많이 할 때는 200~300단에 이른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어청도 등대에서 보는 가을 노을은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나 홀로 여행은 피하는 게 좋다. 아니면 항로표지원(등대지기)과 말벗이라도 하시라.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 어둡고 길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어청도 등대

더위를 피해 숙소에서 낮잠을 잔 후 해질 무렵 등대로 향했다. 등대로 가는 길에 안동네 가운데 전횡장군을 모신 ‘치동묘’에 들렸다. 전횡을 담양 전씨의 조상으로 모시는 곳도 있지만 어청도에서는 주민들이 안위와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신이다. 등대로 가는 길은 늘 그렇듯 전봇대를 따라가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등학교 입구에서부터 작은 직박구리의 안내를 받았다. 어청도는 팔색조, 물레새, 노랑지빠귀, 후투티, 흰눈썹황금새, 힝등새 등 희귀조류들을 볼 수 있어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탐조객이 즐겨 찾는다. 신기하게도 직박구리는 꼭 필요한 만큼만 앞서 나갔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앉아 기다리더니 시간이 갈수록 나와 새의 거리가 짧아졌다. 그렇게 30여 분을 동행했다. 그리고는 이제 등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지 인사를 꾸벅하고 날아갔다. 학교 앞에서 만난 젊은 연인 한 쌍을 제외하고는 등대로 가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어청도 등대를 만나는 것은 두 번째다. 그때도 해가 질 무렵 도착했다. 서해바다로 지는 해를 한없이 바라보다 등대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었다. 이번에도 등대에 도착하니 해는 바다와 한 뼘을 남겨두고 있었다.

어청도 등대가 불을 밝힌 것은 1912년이다. 군산과 서해해역을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된 중요한 등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 대련을 접수하고 오사카의 항로를 개통하였다. 그 사이에 중간기착지로 어청도를 선택했던 것이다. 덕분에 어청도 등대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해질 무렵이면 등대만 바쁜 것이 아니다. 손맛을 즐기려는 낚시꾼들도 분주해진다. 특히 등대 주변 ‘물선금’이나 섬의 동쪽 ‘가진여’ 주변은 돌돔과 감성돔의 포인트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종천(71) 씨는 젊은 시절 외줄낚시로 등대 밖 ‘두멍’이라는 곳에서 하루에 200~300마리를 잡았단다. 두멍은 깊이가 70m로 어청도에서 조기가 가장 잘 잡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어청도 주변으로 조기를 잡기 위해 오는 배들은 경상도, 삼천포, 하동 배들이 많았다고 덧붙인다. 40여 년 전 이야기다. 지금도 섬 여행객보다는 낚시꾼이 더 많이 찾는 섬이다. 조기어장인 두멍은 지금도 낚시꾼들이 꼽은 포인트로 돌돔과 감성돔의 손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물때가 좋다면 나오는 길에 삼치바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인심 좋은 선장을 만날 수 있다. 얼음을 채워서 가지고 나오면 횟감으로 손색이 없다. 2014년 10월 사진 / 김준 작가

고래의 흔적을 찾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아직도 배가 올 때까지 3시간이 남았다. 하얀 등대로 향하다 ‘고래등’이라는 민박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꿈꿨던 것일까.

“왜 고래등인 줄 아세요?” 아침에 바다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한 주민이 사진을 찍던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고래를 잡아서 여기서 해체했어유’라며 포근한 충정도 억양으로 유래를 알려줬다. 예전에는 어청도 주변 바다에서 ‘나가스(ながすくじら, 참고래)’와 ‘밍크고래’를 잡았다. 얼마나 바다가 풍성했던지 바다에 나가면 밍크고래는 너덧 마리, 참고래도 1년에 너덧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특히 선창에 잡혀 올라온 참고래는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컸고 옛기억을 되살린다.

어제까지 화창하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선창에는 낚시꾼과 섬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이 모습만 본다면 어청도가 서해의 난바다에 외딴 섬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없을 정도다. 어제 바지락 밭에서 보았던 부부도 보이는데, 각자 불룩한 배낭을 메고 배를 기다리고 있어 기분이 참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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