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군산] “우리도 4개월 만에 처음 캐는 거유, 이것 보고 사는데. 선유도에서는 캐지 않으면서 왜 어청도에서는 캔대유” 칠순의 어머니는 바지락을 캐다 말고 충청도 사투리에 가까운 말투로 외지인을 나무랐다. 바지락 밭에서 뒷걸음질로 나오는 부부의 손에 호미와 바구니가 들려있다. 상습범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여행객이다. 슬금슬금 농배바위 쪽으로 물러나 고둥을 줍더니 주민이 시선에서 벗어나자 다시 바지락을 캐기 시작했다.
뱃길을 이어라
배 안에는 늦은 여름휴가를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휴가철이 아니라도 낚시꾼이 즐겨 찾기 때문에 겨울을 제외하고 주말에 섬 여행을 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섬에 300여 가구에 1200여 명의 주민이 살 때는 산 능선까지 집이 있었고, 초등학생만 300명이었다. 지금은 전체 주민이라 해봐야 겨우 100여 명을 유지하고 있고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각각 4명이다. 학생보다 선생님이 더 많다. 다행스럽게 명품섬으로 지정되어 탐방로, 목교, 철새 관련 탐조시설 등이 만들어졌지만 주민이나 관광객에게 호평을 받지 못했다. 어청도는 가운데 위치한 안동네를 기준으로 선창 끝머리에 해망동과 교회가 있는 백사장동네로 나누어져 있다. 해망동은 군산 선창의 끝동네의 이름을 빌러 온 것 같다.
미역냉국에 반하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잠깐 산책을 하겠다고 출발한 걸음이 돗대봉에 이르고 말았다. 10여 년 전에는 없던 산책길이었다. 백사장동네에서 해안을 따라 갯벌 위에 나무다리를 놓았고, 곰산, 목넘, 안산, 검산봉, 돗대봉 등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 사이 해는 머리 위까지 올라왔고, 낚싯배들도 점심시간에 맞춰 하나 둘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등산에 가까운 산책을 한 탓에 허기가 졌고, 물도 챙기지 않아 갈증도 심했다. 날씨마저 바람이 없는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벌써 셔츠는 축축해져 땀은 그대로 등골을 따라 흘러내려 팬티까지 점령을 했다. 바다 건너편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2km남짓 되는 4개의 고개를 넘어 가려하니 아득하고 현기증도 생겼다. 결국 되돌아오다 목넘에 이르러 드러눕고 말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섬잔대와 오이풀이 야속해 보였다.
갈증과 주린 배를 붙잡고 슈퍼로 향했다. 눈앞에 보이는 가게가 천리는 되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생막걸리를 한 병 빼들고 안주도 없이 거푸 마셨다. 막걸리는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뭄으로 쩍쩍 벌어진 논바닥에 물을 대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민박집 주인이 알려준 군산식당을 찾아갔다. 백반으로 나온 반찬이 간재미짐, 조개젓, 미역냉국이었다. 물론 모두 어청도산이다. 식당주인이 직접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기 때문에 가능한 상차림이다. 갯바위에서 직접 뜯은 돌미역 냉국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 맛있는 미역냉국을 언제 맛본 적이 있던가. 기억에 없다.
어청도는 예로부터 돌미역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주민들이 채취하는 해조류다. 서른 가닥을 묶어서 한 꼭지라 하고, 10개의 꼭지를 묶어 한단이라 불렀다. 한 꼭지는 3만5000에 거래되고 있다. 늦봄에 시작해 여름까지 하는데 많이 할 때는 200~300단에 이른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어청도 등대
어청도 등대를 만나는 것은 두 번째다. 그때도 해가 질 무렵 도착했다. 서해바다로 지는 해를 한없이 바라보다 등대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었다. 이번에도 등대에 도착하니 해는 바다와 한 뼘을 남겨두고 있었다.
어청도 등대가 불을 밝힌 것은 1912년이다. 군산과 서해해역을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된 중요한 등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 대련을 접수하고 오사카의 항로를 개통하였다. 그 사이에 중간기착지로 어청도를 선택했던 것이다. 덕분에 어청도 등대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해질 무렵이면 등대만 바쁜 것이 아니다. 손맛을 즐기려는 낚시꾼들도 분주해진다. 특히 등대 주변 ‘물선금’이나 섬의 동쪽 ‘가진여’ 주변은 돌돔과 감성돔의 포인트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종천(71) 씨는 젊은 시절 외줄낚시로 등대 밖 ‘두멍’이라는 곳에서 하루에 200~300마리를 잡았단다. 두멍은 깊이가 70m로 어청도에서 조기가 가장 잘 잡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어청도 주변으로 조기를 잡기 위해 오는 배들은 경상도, 삼천포, 하동 배들이 많았다고 덧붙인다. 40여 년 전 이야기다. 지금도 섬 여행객보다는 낚시꾼이 더 많이 찾는 섬이다. 조기어장인 두멍은 지금도 낚시꾼들이 꼽은 포인트로 돌돔과 감성돔의 손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래의 흔적을 찾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아직도 배가 올 때까지 3시간이 남았다. 하얀 등대로 향하다 ‘고래등’이라는 민박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꿈꿨던 것일까.
“왜 고래등인 줄 아세요?” 아침에 바다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한 주민이 사진을 찍던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고래를 잡아서 여기서 해체했어유’라며 포근한 충정도 억양으로 유래를 알려줬다. 예전에는 어청도 주변 바다에서 ‘나가스(ながすくじら, 참고래)’와 ‘밍크고래’를 잡았다. 얼마나 바다가 풍성했던지 바다에 나가면 밍크고래는 너덧 마리, 참고래도 1년에 너덧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특히 선창에 잡혀 올라온 참고래는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컸고 옛기억을 되살린다.
어제까지 화창하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선창에는 낚시꾼과 섬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이 모습만 본다면 어청도가 서해의 난바다에 외딴 섬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없을 정도다. 어제 바지락 밭에서 보았던 부부도 보이는데, 각자 불룩한 배낭을 메고 배를 기다리고 있어 기분이 참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