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그 길을 걷다] 청풍호 에두르는 532번 지방도 흙길 호수 속 고향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들의 애달픈 길
[그 길을 걷다] 청풍호 에두르는 532번 지방도 흙길 호수 속 고향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들의 애달픈 길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01.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532번 지방도 흙길.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충주] 청풍호.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육지 위의 바다’라고 불리며 청풍명월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유유히 유람선이 떠다니고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 이 거대한 인공호수는 그러나, 수몰민의 애환이 잠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풍호를 내려다보며 달리는 좁은 흙길인 532번 지방도 또한 아름다운 풍광과 애절함의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이웃 동네로 넘어가는 길은 꼬부랑 흙길이었다. 하루에 네댓 대 다니던 완행버스를 타고 그 흙길을 달려보는 것은 그 시절 동네 조무래기들의 꿈이었다. 그 당시 버스요금은 15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그 완행버스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조금 더 커서 요금이 250원으로 오르고 그만한 돈은 나도 가질 수 있었을 때 즈음엔 그 길에 시커먼 아스팔트가 깔려 더 이상 ‘꿈’을 이룰 수 없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망망한 청풍호를 마주하며 걷는 흙길.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수몰로 인해 많은 유물들도 제자리를 잃었다. 뭍으로 자리를 옮긴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청풍호를 가로지르는 충주에 그때를 추억케 하는 이런 흙길이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충주댐 드라이브 코스’를 달려보긴 했지만 이 길과는 전혀 다른 아스팔트 도로였다. 경치가 아름답긴 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532번 지방도를 우연찮게 찾고 나서 무지하게 가슴이 설레었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에서 532번 지방도를 탄다. 이 도로 중에서도 흙길 구간을 만나려면 한참을 달려야 한다. 충주호리조트를 지나고 나면 차량의 통행이 거의 끊어진다. 이 길은 원래 충주와 제천을 잇는 길이지만 이 위로는 충북선 열차가 다니고, 또 그 위로는 38번 국도가 고속국도 못지않게 잘 정비되어 있어 굳이 둘러둘러 가는 이곳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 

충주호리조트를 지나 조금 달리면 국보 제102호인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과 보물 제17호인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가 보인다. 이름도 긴 이 두 유적 또한 댐건설로 가라앉아버린 정토사지 내에 있던 것들이다. 흐르는 물길을 막은 호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곳의 유적들에게도 수몰의 아픔을 주었다. 그 유적들은 지금은 청풍면 물태리 산 위로 옮겨져 청풍문화재단지로 조성되어 관광자원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고향을 떠나지 못해 다시 돌아온 장병기 할아버지.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드디어 아스팔트길이 흙 속에 묻힌다. 길이 좁고 험하니 대형 차량은 들어가지 말란다. 자동차 미터계의 숫자를 ‘0’으로 맞춘다. 조심스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순간, 어린 시절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역시 ‘꿈은 이루어진다’인가? 마음이 더욱 설렌다. 

툴툴거리며 흔들리는 느낌이 좋다. 풀풀 날리는 흙먼지도 나쁘지 않다.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청풍호의 그림 같은 풍광은 몇 번이나 차를 세우게 만든다. 바다처럼 망망한 인공호수는 나 같은 객지 사람에게는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저 호수는 저곳에 고향을 묻어놓고 떠난 사람들의 눈물로 만든 것이다. 

1985년, 대청댐에 이어 충북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충주댐이 들어섰다. 남한강을 막은 이 다목적댐은 저 멀리 수도권의 홍수 피해는 물론이고, 먹는 물 걱정에서 해방시켜주었다. 분명 충주댐은 수도권에 커다란 혜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희비는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라, 댐이 생기면서 남한강 상류의 단양읍이 80% 침수되었고, 전국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이었던 청풍면과 한수면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수몰민만 5만여 명, 나라의 발전이란 명목하에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고향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수몰민들은 보상금을 받고 고향을 떠났다. 어떤 이는 제천으로, 또 어떤 이는 서울로, 또 어떤 이들은 충주로 터전을 옮겼다. 하지만 기어코 고향을 떠나 살 수 없었던 이들은 호수 바로 위에 집을 지어 지금도 가라앉은 고향을 내려다보며 살고 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황석리의 은행나무 옆에 지어놓은 원두막.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장 할아버지네 누렁이가 낯선 이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532번 지방도는 바로 이 수몰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길 중간에 부산리가 있어 이곳 사람들은 ‘부산 가는 길’로 부른다.  

“처음엔 청풍호 관광도로라고 해서 길을 만들었지. 대단할 줄 알았어. 다 잘살게 될 거라고 들썩들썩했었는데…. 지금 보니 이도저도 아니야. 포장도 안 된 이 길을 누가 들락거리겠어? 옛날 어르신들이 잘 몰랐던 거지 뭐. 마을 잘살게 해준다는 말에 너무 빨리 도장을 찍어버린 거야….”

부산리에서 30년을 살고 있는 장병기 할아버지는 지나온 세월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냥 사는 게 다 그렇다’며 하늘만 바라본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제는 그냥 길에 시멘트나 좀 부어줬음 좋겠어. 먼지가 하도 날려서 빨래를 널 수가 있나, 문을 열어놓을 수가 있나…. 민원이 들어가면 자꾸 자갈만 냅다 부어놓는데 그것 가지곤 택도 없지. 저기 구룡에서부터 포장한다고 하는데 부산리까지는 언제 올라나 몰라.”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황강나루에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흙길 덕분에 낭만을 즐기러 일부러 찾는 외지인들과, 흙길 때문에 생활이 불편한 토박이들. 이것이 이 길의 엇갈린 운명이다. 그나마 이 오지에도 버스가 들어온다. 

“아침 9시, 오후 3시, 저녁 7시, 이렇게 하루 세 번 버스가 와. 그나마 다행이지. 댐 생기기 전엔 저 남한강에 배가 댕겼다고. 서울에서 영월까지 소금 배가 뜨는데, 그 장돌뱅이들이 청풍 방흥나루에 배를 대고 하루 쉬어 가곤 했지. 그래서 주막도 많고 사람도 많았어. 청풍에서 제천으로 가는 버스도 배에 싣고 다녔지. 광의에서 황석나루터까지…. 강을 끼고 사니 나룻배가 발이었지. 참 살기 좋았어.”

장 할아버지도 마을이 수몰되고 나서는 인근 동량에서도 살고, 다른 곳에서도 살아봤단다. 하지만 늘 보일 듯 말 듯한 고향이 눈에 밟혀 결국 부산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흙길을 걸어가는 할머니.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그래도 적적하진 않아. 조금만 가면 노인정이 있는데 아직 고향 친구들이 좀 있거든. 거기서 시간도 보내고 하니깐 괜찮아.”  

부산리를 나와 계속 길은 이어진다. 그런데 뜬금없이 아스팔트길이 나와버린다. 이 무슨 ‘퐝당한 시츄에이션?’ 평소 때라면 반가워할 상황이지만 이때만큼은 흙길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덜컥 주저앉는다. 

하지만 우회도로 표지판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사오리, 후산 방향 비포장 구간, 금성 방향으로 우회하시오.’ 새로 난 길을 따라 금성 방향으로 가면 12분이면 갈 곳을 532번 비포장 구간으로 가면 1시간이란다. 부산리부터 후석리를 거쳐 황석리까지 지방도의 일부 구간은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포장길을 조금 달리자 후산리가 나온다. 길 앞도 포장길이고 양옥집도 꽤 많다. 물속에 잠긴 후산리 주민들이 이곳으로 올라와 지은 집들이다. 사정은 바로 옆 동네인 황석리도 마찬가지다. 수몰된 옛 황석리는 130가구나 살던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물밑에 잠긴 마을의 주민 일부가 이사해 새 마을을 이루고 산다. 그들은 항상 고향에서 살고 있지만 그 고향은 마음속에 담아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도로 포장공사가 한창인 현장.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번지도 없이 달려 있는 빨간 우체통. 2008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황석리를 벗어나면 다시 흙길이 이어지는데, 마치 해안 길을 달리듯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청풍호의 풍광에 넋을 잃을 정도다. 들쭉날쭉 변화무쌍한 해안선은 마치 남해의 다도해를 보는 듯하다. 길도 조금 넓어지고 구불거림도 덜하다. 방해하는 것들이 없으니 이제 길이 끝나는 곳까지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금성읍이 가까워지면서 공사가 한창이다. 말로만 듣던 포장공사 구간이 이곳인가보다. 길을 넓히느라 절벽을 깎아내고 흙을 다진다. 이제까지 지나온 길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직접 보게 되니 섭섭해진다. 

언젠가는 이 길을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본 길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정든 고향이 호수에 잠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수몰민들의 느낌도 이랬으리라.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더했을 것이다.

37km의 기나긴 흙길여행의 여정이 끝나는 곳, 나는 어린 시절 흙길을 달리는 꿈을 이루었다. 나에게 이 길은 이제 추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아직도 저 길 안에서 하염없이 보이지 않는 고향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저들의 꿈은 언제 이루어진단 말인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