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장인을 찾아] 벌꿀처럼 달콤한 밀랍초 공예가 빈도림 씨 귀화, 귀농한 파란 눈의 한국인 
[장인을 찾아] 벌꿀처럼 달콤한 밀랍초 공예가 빈도림 씨 귀화, 귀농한 파란 눈의 한국인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8.02.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밀랍초를 만드는 빈도림 씨.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파란 눈의 빈도림 씨가 귀농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조선왕조실록>이 어떻네, 옛날 왕이 사용하던 밀랍초가 어떻네 하며 역사 이야기까지 엮어낸다. 밀랍초 하나로 우리가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다양한 세상을 열어준 빈도림 씨와의 유쾌한 만남.

74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푸른 눈의 독일인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서구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땅이었을 터. 그런데도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생소한 한국어를 배웠다. 서울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딸 때만 해도 대한민국에 아예 눌러 살게 될 줄은 몰랐으리라. 그것도 번화한 서울도 아닌 담양에서도 뚝 떨어진 외딴 마을에 둥지를 틀게 될 줄은 더더욱. 

그러나 어쨌든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사이, 그는 한국인 아내를 얻어 딸 둘, 아들 하나의 단란한 가족을 이루었고, 베를린이 아닌 서울의 독일대사관에 근무하다 지금은 담양 땅에 정착하였으며, 무엇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서울에서야 벽안의 사람을 보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지방이고 보니 구한말에 외국인을 본 듯 신기하기 짝이 없다.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작업실 한 귀퉁이 풍경.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기 오지(奧地) 아니에요. 자동차도 다 들어오고 차로 광주까지 15분이면 가잖아요. 택배도 오고, 정말 혁명적으로 인터넷이 어디든 되고. 불편한 거 아무것도 없어요.”

웬만한 한국인보다 더 또렷한 발음에 굵고도 낮게 퍼지는 목소리. 아마 얼굴을 보지 않고 문밖에서 말소리를 들었다면 푸른 눈의 외모를 절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말을 텄는데도 아직은 뭔가 낯설다. 혹시 뒤에서 성우가 더빙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이 빈도림 씨, 정말 말이 청산유수다. 슬쩍슬쩍 위트도 있고, 날카로운 지적도 제법이다.

“한국 사람들 의외로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어요. 이렇게 시골에 내려와서 살면 다들 ‘귀농’이라고 하잖아요. 나 같은 사람은 ‘귀화’했다고 하고. 그런데 ‘귀(歸)’자가 무슨 뜻입니까? 돌아온다는 거잖아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농촌이 중심이고, 한국이 중심인 거죠. 그렇죠?”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둥글둥글한 달걍 모양의 밀랍초가 앙증맞다.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정말이지 이런 시시콜콜한 문제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의표를 찔린 듯 멈칫하고 말았다. ‘귀농’에 ‘귀화’까지 하였으니 그는 남들보다 두 번이나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이런 특별한 이력을 인정받아(!) 그는 꽤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덩치 큰 서양인이 서울도 아니고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초 만든다고 하니까 신문이랑 방송에서 좋다구나 하고 많이들 취재해 갔어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처럼 ‘테레비(텔레비전이 아니라 테레비다)’많이 보는 사람들은 없을 거야. 몇 년 전에 가족들이 보길도를 놀러 갔거든요. 도착해서 여관을 찾으러 돌아다니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더라고요. 테레비에 나왔어도 기껏 2분 40초나 길어야 5분인데 세상에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아줌마들이 꼬치꼬치 ‘테레비 나왔죠?’‘초 만들죠?’하더라니깐. 참 신기해요.”

너른 흰 창 너머로 겨울 햇살이 한가득 들어온다. 그가 입고 있는 포근한 스웨터, 노란 초들과 어울려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원래 이곳 담양 땅엔 그림을 그리던 친구가 살았단다. 그 친구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 땅을 팔 임자로 자신을 지목했더란다. 그라면 이 땅을 사랑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친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주말에만 잠시 내려오는 별장으로 이용하던 것을 결국엔 이 땅의 매력에 흠뻑 빠져 6년 전 아예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진짜‘귀농’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 처음엔 작고 소박하게 집을 지었는데 살림을 차리려니 이층을 올리고, 또 귀퉁이에 작게 집을 붙이고 하면서 덩치가 커졌다. 여기에 집 앞으로 공방도 짓고, 텃밭도 만들고, 탱자 울타리도 쳤으니 이제는 제법 훌륭한 터전이 되었다.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밀랍초는 탈 때 향긋한 벌꿀향이 난다.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기 오면 사람들 반응이 딱 갈라져요. 한쪽은 너무 좋다고, 자신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해요. 특히 한국인들은 시골을 떠난 지 한 세대밖에 되지 않으니까 이런 곳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진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거죠.”

그는 자신의 밀랍초보다 이 땅에 대해, 그리고 귀농에 대해, 도시 생활의 따분함에 대해 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래요. ‘아니, 아무것도 없잖아?’이런 사람은 서울을 떠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아요. 우리가 보기엔 서울에 더 아무것도 없는데. 자동차 빼고 뭐가 있어요, 거기에?”

가벼운 호기심에 매스컴들이 앞 다퉈 얼굴을 알렸지만, 그는 소위‘흥행’을 위해 매스컴을 이용하는 그런 얄팍한 사람은 아니다. 

“야생 벌집을 채취해서 만들어야 하니 옛날에도 밀랍초는 귀한 물건이었어요. 그래서 왕실에서만 쓰고 일반인의 사용을 금했던 사치품이었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어떤 사람이 공을 세우면 임금이 치하를 하잖아요. 그 리스트에 비단도 있고…, 그런데 그 속에 밀랍초 다섯 개를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것만 봐도 얼마나 귀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겠죠?” 한국의 밀랍초를 더 알겠다고 <조선왕조실록>까지 찾아본 모양이다. “민속박물관에 가면 옛날 밀랍초가 몇 개 있어요. 굉장히 화려해요. 금을 입히고 용 조각을 하고 염색도 하고….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자세히 적힌 문헌이 있는데 거기 보면 1m 높이에 20cm 직경의 어마한 밀랍초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거든요. 그 이전까지는 ‘왕’이었지만 이제 ‘황제’의 신분으로 올라가니 이때 처음으로 초에 용의 발톱을 여섯 개 그렸죠. 그 이전까지는 중국 용만 발톱이 여섯 개이고, 한국은 다섯 개였거든요.”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함께 초 만들기 체험을 하는 김현덕 씨 예비부부. 2008년 2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역사적 사실까지 그가 신나게 이야기에 몰입한다. 좋아하는 한 가지 일 때문에 공부를 하다보면 새로운 세계를 더욱 많이 알게 되어 즐겁다는 빈도림 씨.   

밀랍초가 자취를 감춘 건 일제시대에 석유를 정제한 값싼 파라핀이 들어온 뒤부터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재료로 만들었다 하여 이름을 양초라 하였다. 그 귀한 초를 일반에서도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대낮같이 불을 밝히는 전기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최근엔 초를 인테리어나 아로마 용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아지고, 파라핀 초가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방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양초가 아닌 밀랍초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공방을 방문하던 날 우연히 곧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수자원공사에 근무하는 김현덕 씨가 그 주인공으로 ‘좋은 추억거리도 되고, 결혼 후 뜻 깊은 날에 이 초를 쓰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비신부와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초를 만드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다. 

밀랍 1kg을 생산하려면 벌이 6kg의 꿀을 먹어야 한단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밀랍을 채취하여 녹여 심지에 추를 달아 담갔다 식히기를 수십 차례. 밀랍을 녹이는 과정도 그렇고 성급히 하면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으니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뭔가를 하나 이루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벌과 꽃 등 작은 것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아마도 김현덕 씨가 밀랍초 체험을 통해 신부와 함께 나눠 가지고 싶었던 것은 이런 작은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