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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 49] 그 섬에는 해녀가 있다 충남 보령시 호도
[김준의 섬 여행 49] 그 섬에는 해녀가 있다 충남 보령시 호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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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보령] 배가 도착하자 손수레가 줄지어 선창으로 들어섰다. 마중을 나온 민박집 주인이 끄는 손수레였다. 단골들은 민박집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는 손수레에 직접 짐을 옮겨 싣고 마을로 향했다. 자동차 문화에 익숙한 여행객에게 이것도 구경거리인지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느라 요란하다. 몇 년 사이에 호도를 찾는 여행객이 부쩍 늘었다. 마을 입구에는 안내문과 경고문이 있다. 관광객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금지 행위를 위반하면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다. 금지 행위는 해삼, 전복, 더덕 채취 금지와 쓰레기 투기였다. 해삼과 전복은 호도 주민의 텃밭인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호도의 가을은 꽃게와 함께 찾아온다. 꽃게가 살찌는 계절이다. 멍멍대해에서 깃발 하나 꽂아 두고 그를 기다린다. 출어를 앞둔 배는 파도에 출렁이고 통발의 위치를 표시할 깃발은 바람에 안달이다. 풍어를 꿈꾸는 어민의 마음에도 가을바람에 설렌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여우를 닮은 섬 

모양이 여우를 닮은 섬이라 ‘호도(狐島)’라고 한다. 1759년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23호에 남자 57명과 여자 58명이 거주한다고 했다. 1910년에 발간된 ‘한국수산지’에는 32호에 90여 명이 살았다고 전한다. 주막도 세 개나 있었다. 당시 섬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20여 개의 주벅 그물이 있었다. 작은 배로 주낙을 이용해 고기를 잡을 때는 외연도 인근까지, 좀 멀리가면 어청도까지 나가 고기를 잡았다. 4~5월 봄철이면 일본의 배 40여 척이 호도 인근의 길산도 어장에서 고기를 잡았다. 파시의 주막도 이 시기에 열렸다. 통발 어업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주목망 어업은 1960년대 추도 동쪽의 질명주목에서 시작했지만 신통치 않아 중단되었다. 이후 자망을 이용한 꽃게잡이, 통발을 이용해 꽃게, 낙지 등을 잡고 주낙을 이용해 광어, 주꾸미 등을 잡았다. 해녀들은 물질을 해서 해삼과 전복을 잡는다. 갯바위에는 돌김, 미역, 우뭇가사리가 있지만 어민은 큰 관심이 없다. 그만큼 다른 돈이 되는 해산물이 많다는 반증이다. 

점심을 먹는데 민박집 주인이 해녀들을 태운 배가 들어왔다고 일러줬다. 오전 물때라 일을 마치고 해녀들이 들어오는 참이었다. 점심을 먹다 말고 선창으로 달렸다. 그렇게 호도의 해녀들과 첫 대면을 했다. 족히 스무 명은 될 것 같았다. 등에 망사리와 테왁을 짊어지고 당당하게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당당함은 호도 여인들의 생활력에서 나오는 힘이었고, 풍요로운 바다가 주는 선물이었다. 저 잠수들 중에 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그물을 손질하는 부부의 손발은 척척 맞는다. 당기고 밀고. 아내의 그물 손질에 힘디 들어가는 날은 화가 잔뜩 난 날이다. 남편이 담배를 물고 그룸을 당기는 날은 술 생각이 나는 날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해녀, 섬마을을 살린다.
호도의 여인들이 처음부터 물질을 했던 것은 아니다. 호도에 제주의 여인들이 도착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당시 호도 바다에는 문어, 소라, 전복, 해삼, 천초, 미역, 청각, 홍합, 멍게 등이 많았다. 이 중 문어, 소라, 멍게는 해녀의 용돈벌이다. 나머지는 해녀와 선주가 6:4로 나누었다. 호도에 잠수들이 많을 때는 1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지금은 23명이 물질을 하는데, 40대는 2명, 50대는 15명, 60대는 6명이다. 67세의 잠수가 제일 고령이다. 다른 마을에 비해서 잠수들의 나이가 젊은 편이다. 이들 가운데 5명은 제주의 여인이 아니다. 제주 잠수는 동복, 화복, 신천, 사천, 소성 등지에서 왔다. 100여 명의 제주출신 잠수 중에서 16명이 호도의 총각과 결혼했다. 박동림 잠수는 첫해 남해에서 물질을 하고 50만 원을 벌었다. 1960년대 초반의 벌이였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제주 서귀포가 고향인 고 씨도 처마 밑에 매달아 둔 씨마늘을 내려서 자전거에 싣고 학교 밑에 있는 밭으로 향했다. 호도의 밭은 국유지가 많다. 부지런한 해녀들이 일궈 마늘과 배추를 심어 양념과 채소를 해결한다. 고 씨만 아니라 물질을 마친 여인들은 점심을 먹고 대부분 밭으로 나왔다. 오늘은 호도의 마늘 심는 날이다. 내일 해녀를 태우는 배의 선장이 대천에 나가기 때문에 스무 명의 해녀는 휴가다. 이런 날은 으레 미뤄두었던 밭일을 한다. 해녀들에게 농사는 여벌이다. 농사철을 모르기 때문에 남이 하는 것을 보고 하는 경우도 많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해수욕장에 용케 솟ㅅ아오른 갯바위에서 할머니가 굴을 까다 말고 튼실한 알을 건냈다. 10년전 일이니 할머니가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호도는 자동차가 없다. 모든짐은 손수레가 책임진다. 배가 선창에 닿으면 주인은 없어도 손수레는 자리를 지킨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민박집에서 만난 할머니는 “제주 해녀는 어디서나 먹고 산다. 물질해 자기 논은 다 마련하고 추하게 살지 않는다”며 강한 생활력을 강조했다. 제주에서는 ‘소로 태어나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해녀들은 많은 일을 짊어지고 생활해왔다. 호도로 출가한 제주 여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해녀들은 물질이 없는 날이며 걷기운동을 한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운동을 한다. 몸으로 벌어서 먹고 사는 잠수들에게 건강이 유일한 밑천이기 때문이다. 왜 같이 와서 하지 않고 혼자서 마늘을 심느냐는 말에 고 씨는 “아까워서 어떻게 일을 시켜? 두고두고 써먹어야 하는데”라며 크게 웃었다. 제주의 여인들은 물질과 밭일과 집안일을 자신이 직접 하더라도 남편을 시키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드물다.


지난해 마을 주민들은 어촌계 사업으로 가구마다 약 700만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해삼과 전복 등 마을 어장에서 채취한 수산물을 팔아서 마련한 공동기금 중 마을에서 써야 할 돈을 제외하고 남은 돈을 배당한 것이다. 이 돈은 사실 해녀들이 물질을 해서 번 돈이나 다름없다. 마을 어장에서 물질을 해서 해녀와 마을이 반씩 나누고, 마을에서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매년 연말에 정산해 마을 운영을 위한 공동 비용을 제외하고 나눈다. 해녀들이 작업하는 것은 해삼과 전복이다. 여름철에 날씨가 더워져 해삼이 낮잠을 자면 작업을 멈추고, 대신 전복을 따기 시작한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해녀의 공휴일은 선장이 쉬는 날이다. 이런 날 해녀들은 모두 밭으로 나온다. 오늘은 마늘을 심는 날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호도 바다는 깨끗하다
점심을 먹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8년 전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설 때 보았던 마을과 달랐다. 그 사이에 민박집이 많이 늘었고, 마을도 깨끗해졌다. 호도해수욕장은 삽시도와 함께 충청도를 대표하는 섬 해수욕장이다. 대천이나 무창포 등 연안에 해수욕장이 있지만 섬에 있는 해수욕장을 찾는 것은 조용함과 깨끗함 때문이다. 내가 머물던 민박집 주인도 낚시로 세월을 보내다 호도에 정착한 이유로 깨끗한 바다를 꼽았다. 연안의 들물과 날물이 호도로 드는 물과 교차되지 않고 다른 물길을 타고 흐르기 때문이라 했다. 연안의 오염원들이 호도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물고기를 쫓는 부자의 모습은 아이돌의 춤보다 아름답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수명을 다한 홍합의 껍데기. 진주담치에 자리를 내주고 물속에 자리를 잡았지만 해녀들에게 발견되어 뭍으로 올라온 모양이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포장마차에서 먹던 홍합탕이 그리워진다.  2014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올해는 세월호와 성수기 태풍의 여파로 해수욕객을 바라보던 섬사람들이 울상을 짓고 말았다. 호도도 마찬가지였다. 피서객이 떠난 백사장은 오롯이 갈매기들의 차지다. 마침 날물이라 드는 고기들도 없어서인지 백사장에 앉은 갈매기들은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물때를 모르는 설익은 태공들만 갯바위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닐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뒤늦은 물놀이를 나온 아이가 이를 발견하고 첨벙첨벙 요리조리 물고기를 구석으로 몰아 잡으려고 야단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아들과 아버지가 춤을 추는 모습이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와 주인이 모든 것을 잃고 바닷가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아쉽게 이를 지켜보는 이는 갈매기와 콩게의 무리뿐이다. 외연도에서 오는 쾌속선이 하얀 선을 바다에 그으며 섬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너울이 해안에 닿을 즈음 아들과 아버지는 춤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는다. 작은 물고기를 구석에 몰아넣은 부자는 손을 맞잡고 물고기를 잡았다.

해수욕장이 아름답다. 모래밭, 사구식물들이 많다. 그런데 모래밭이 준 선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식수보관창고다. 여름철 관광객의 놀이터가 모래밭, 해수욕장이지만 그 모래가 있어 큰 산이 없는 작은 섬 호도에서 주민이 식수를 해결할 수 있다. 

피서객이 떠난 호도의 해수욕장에서는 바람보다 빠른 달랑게가 산다. 달랑달랑 옆으로 잘 긴다고 ‘달랑게’라고 불린다. 주로 밤에 활동을 해 ‘유령게’ 라고도 부른다. 녀석들이 만들어낸 작은 모래구슬이나 비단고둥이 만들어낸 흔적은 예술이다. 사구에는 순비기나무가 예쁜 꽃을 피웠고, 달맞이꽃도 수줍게 노란 꽃을 숙였다. 섬 주민이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며 지내야 할 것이 무척 많다는 생각에 모래밭을 거닐던 내 발걸음이 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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