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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빼기 여행 ‘고향’의 위로] 넓은 벌 동쪽 끝, 옛이야기 지줄대는 옥천 춘추민속관
[빼기 여행 ‘고향’의 위로] 넓은 벌 동쪽 끝, 옛이야기 지줄대는 옥천 춘추민속관
  • 주성희 기자
  • 승인 2013.11.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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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여행스케치=옥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 매캐한 매연이 사라졌다. 아니, 그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넓은 벌 동쪽 끝,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그곳, 옥천의 250년이 넘은 고택에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 그리고 오직 나뿐이었다.

껌처럼 들러붙은 일상을 떼어낼 방법을 고심하다 충북 옥천행을 택했다. 옥천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다.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거리는 고향. 시인이 꿈에서도 그리워한 그곳에서라면 늪처럼 옭아매는 도시 생활을 말끔히 털어낼 수 있을 터였다. 이동 수단은 기차와 두 다리. 터덩터덩 터덩터덩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리듬을 선곡한 무궁화호는 고향 길에 흥을 더하는 DJ로 더없다. 옥천역에서 읍내는 도보 10분 거리. 짐은 단출하고 속은 출출하니 읍내까지 슬슬 걸어가 올갱이국 한 그릇을 시킨다. 금강 줄기가 휘감아 도는 청정 고을 옥천은 물이 좋아 살이 토실토실 오른 질 좋은 올갱이가 난다.

춘추민속관은 옥천 구읍에 위치하고 있다. 구읍은 1905년 신읍에 옥천역이 생기기 전까지 마을의 중심지였다. 신읍에서 춘추민속관까지는 차로 10분 이내, 걸어서는 20분 정도 걸린다. 늘상 걷던 종종걸음 대신 한껏 여유 부리며 느긋하게 춘추민속관에 다다르니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옥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는데 번듯한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 안으로 들어선다. 마당 한가운데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넉넉한 품을 열어 객을 반긴다. 대체 얼마나 오래됐기에 기와지붕을 훌쩍 넘길 만큼 키가 클꼬?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보온을 위해 유리문을 덧댄 문향헌 안채.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객을 반기고
“300년이 넘은 회화나무랍니다. 회화나무는 예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 정승 집에서나 볼 수 있던 귀한 나무예요. 조선 영조 36년 청풍 김씨 18대손 김치신 선생이 지은 문향헌은 앞마당에 이리 멋진 회화나무를 뒀으니 당시 청풍 김씨의 가세를 짐작할 수 있지요. 나무 앞쪽 괴정헌도 160년 가까이 된 유서 깊은 고택입니다.” 춘추민속관의 주인 정태희 관장이 문향헌 뒤꼍의 돌을 옮기다 말고 나와 객의 호기심을 풀어준다. 작업복에 콧잔등이까지 깨진 모습이다. 옆에서 일러주지 않았다면 1만 평의 땅에 기와집을 두 채나 지닌 부자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행색. 알고 보니 정태희 씨는 선비춤 전수자로 전통 춤과 가락에 조예가 깊은 만큼 한옥과 민속 유산에 진한 애정을 지니고 고택을 돌보고 있었다.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옛 주인의 가세를 짐작케 하는 넓은 행랑채.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문향헌 가풍대로 빚은 가양주.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손때 묻은 물건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객실.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이날도 문향헌 사랑채 기와를 정비하다 돌이 굴러떨어져 코를 다쳤다고. 대수롭지 않게 흘리는 이야길 들어보니 1만 평 땅에 그의 손이 열 번 이상 안 거친 돌이 없단다. 문향헌과 괴정헌 사이 돌담도 손수 허물었다니 고택에 쏟는 정성이 대단하다. 춘추민속관은 문향헌과 괴정헌, 두 채의 고택으로 이뤄졌다. 문향헌은 1760년 김치신이 자신의 호 ‘문향(聞香)’에서 이름을 따 지은 집이고, 1856년 지어진 괴정헌은 구한말의 문신 오상규가 태어난 곳이다. 청풍 김씨 가승에 따르면 문향헌은 당시 와가 85칸, 초가 12칸의 대궐 같은 집이었다. 1872년 이곳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홍 선생이 1910년경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사랑채와 안채까지 팔면서 여러 주인이 거쳐갔고, 2004년부터는 정태희 씨가 살고 있다. 현재 춘추민속관에는 ‘우물 정(井)’ 자 형태의 문향헌과 ‘ㄷ’ 자형의 괴정헌, 행랑채, 뒷간, 우물 등 총 55칸의 전통 한옥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문향헌 사랑채와 안채 등 22칸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우물과 장독대가 남아 있는 문향헌 뒤꼍.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향수 젖은 풍류가 달빛을 삼키네
“청풍 김씨 가승에 보면 뒤로는 높고 낮은 산이, 좌우로는 큰 강과 작은 내가 휘돌아 치는 정점에 집을 짓는다고 문향헌의 유래를 적고 있어요. 큰 강은 금강이고 작은 내는 거꾸로 된 물음표 형상으로 정지용 생가 앞을 지나 마을을 크게 감싸 안아 흐르는데 문향헌에서 그 모양이 정점을 이루지요. 물음표 끝에 정지용 시인이 다닌 죽향초등학교가 있답니다.” 정태희 씨 안내로 동네 구경에 나선 지 100보도 채 안 돼 다리 앞에 멈춰 선다. 작은 내를 발아래 둔 청석교로, 건너편 작은 초가가 정지용 생가다. 춘추민속관에서 정지용 생가는 고작 100m 남짓. 순식간에 시간을 거슬러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시인의 고향 집에 당도하니 그의 명작 ‘향수’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조선 태조 7년에 창건된 옥천향교.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사립문과 돌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시인의 생가 뒤로는 ‘한 일(一)’ 자 형태로 능선이 반듯하게 뻗어나간 깃대봉이, 앞으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한 문필봉이 솟아 있다. 문향헌은 옥천의 걸출한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기운 좋은 두 산봉우리가 모두 바라다보이니 여간 까다롭게 고른 집터가 아닌 듯하다. 정지용 생가는 문학관과 이웃하고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동그란 안경에 입을 굳게 다문 정지용 밀랍 인형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가곡 ‘향수’가 흘러나오는 전시실에는 손을 내밀면 시구가 손바닥 위로 흐르듯이 전달되는 ‘손으로 느끼는 시’ 코너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기를 활용한 문학 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다. 생가와 문학관 모두 무료로 개방돼 시인과 작품에 더욱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정지용 생가에서 10여 분 거리에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김 정승, 송 정승, 민 정승 등 3인의 정승이 차례로 거주한 곳으로 1920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이 민 정승의 자손으로부터 사들였다.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해 최근에는 평일에도 2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옥천의 명소가 됐다.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정지용의 시로 채워진 구읍 거리.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옥천의 관광 명소로 거듭난 육영수 여사 생가. 2013년 12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육 여사 생가에 이르는 길목에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옥주사마소와 조선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옥천향교 등이 자리해 동네 구경에 풍성한 볼거리를 더한다.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면 어린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가 꿈을 키운 죽향초등학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마을 길을 채운 낮은 담벼락과 고만고만한 상점의 간판마다 정지용의 시가 새겨져 있어 머무는 눈길 하나, 옮기는 발길 하나 허투루 돌지 않고 차곡차곡 시로 물든다. 느릿느릿 동네 산책을 마치고 해거름에 춘추민속관으로 되돌아오니 안주인이 고소한 김치전에 문향헌 가풍대로 빚은 가양주를 내온다. 집 이름처럼 맑고 향기로운 탁주 한 사발에 개운한 김치전 한 조각을 곁들이니 할머니 품처럼 속이 푸근하다.

춘추민속관의 특별한 맛은 가양주뿐 아니다. 가마솥에 갓 지은 밥, 젓갈을 넣지 않아 묵을수록 맛이 나는 김치, 옻된장에 박은 콩잎 장아찌, 직접 짠 들기름으로 무친 나물, 고택 한쪽에서 재배한 향 깊은 표고버섯볶음, 민들레 효소와 조청으로 맛을 낸 각종 밑반찬 등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주인 내외가 재료 준비부터 요리 완성까지 길게는 몇 년씩 공을 들인 밥상이 아침저녁으로 차려진다. 정성 가득한 저녁상을 물리고 춘추민속관에서 가장 먼저 해와 달이 비춘다는 길한 방에 오늘 하루를 내려놓는다. 전깃불을 끄면 눈부신 달빛에 오히려 사위는 더 밝고, 맑은 바람 소리에 적막이 걷힌다. 휘영청 떠오른 달 아래 오롯한 나만의 밤이 깊어간다.

INFO.
숙박료
2인 1실 기준 6만원(1인 이용 시 4만원) 조·석식 각 1만원 별도
이용 시간 입실 12:00, 퇴실 11:00
주소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3길 19

Tip. 무료 국악 공연
30명 이상 단체 숙박객일 경우 예약하면 수준 높은 국악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선비춤의 대가인 춘추민속관 정태희 관장과 옥천의 숨은 고수들이 선보이는 전통 춤과 국악 연주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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