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군산] 고군산을 처음 찾았을 때 두근두근 설렌 기억이 생생하다. 자전거를 타고 섬을 둘러보면서 기대가 헛되지 않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섬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고군산군도의 마지막 자존심
이제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낙원이 아니다. 곳곳이 공사장이고, 도심을 옮겨놓은 듯 번듯한 건물과 숙박 시설이 빼곡하여 나를 감동시킨 그 섬이 맞나 싶다. 여기저기 땅을 사고판다는 부동산 광고가 붙어 있었다. 주말이면 울긋불긋 관광객들에게 치여 선유도 선착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고군산. 그곳은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대신 오롯이 섬으로 남아 있는 말도, 명도, 방축도로 발길을 옮겼다.
‘군산(群山)’의 뜻을 풀어보면 ‘산이 무리 지어 있다’는 의미이다. 바다에 떠 있는 섬, 그 봉우리가 군산을 이룬 것이다. 물론 군산에서 섬 무리를 찾을 순 없다. 그 모습은 고군산에 있기 때문이다. 선유도를 중심으로 일대의 섬들을 고려와 조선 전기에 ‘군산도’라 불렀다. 고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군산이란 이름은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21일자 일기에 “아침에 출발하여 고군산도에 도착했다”라고 적었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아산 집이 적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군산’이 ‘고군산’으로 바뀐 것은 수군진의 설치와 관련이 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서남해안에는 왜구들이 자주 출몰했다. 조정에서는 왜구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선유도에 설치한 수군만호를 이후 군산(진포, 옥구군 북면)으로 옮겼다. 역사학자들은 새 군사 지역과 구분하기 위해 고군산이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군산에도 많은 섬이 있었다. 하지만 내초도, 오식도, 노래섬, 멍에섬, 띠섬, 비응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군장산업단지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졌다. 또 야미도와 신시도가 새만금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남아 있는 고군산의 중심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도 신시도와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대죽도와 유부도를 지나 비응도를 굽어 돌자 수평선과 맞닿은 새만금방조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30대 말에서 40대 초반까지 새만금 주변을 맴돌았다. 갯벌에 눈을 맞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제는 뭍이 된 계화도, 심포, 하전 갯벌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 많던 칠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곳을 찾았던 도요새 무리들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고 씨, 김 씨, 그곳에서 만난 어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돌렸다.
뱃길 양쪽으로 하얀 부표들이 줄을 맞춰 바다에 떠 있었다. 김 양식장이다. 물길이 막히기 전에 섬사람들은 김 양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새만금사업으로 더 이상 양식을 할 수 없지만 일부 주민들은 물길이 나은 곳을 찾아 지금도 김 양식을 하고 있다.
그물을 더 많이 넣어보지만…
방축도로 가는 배는 유람선이다. 장자도와 관리도를 거쳐 방축도, 명도, 말도에 이른다. 아침과 오후 딱 2번 운항하는 뱃길이다.
방축도의 선창에서 만난 주민 최 씨는 각망으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그물을 ‘뺑뺑이그물’이라 부른다. 삼각망을 말한다. 옛날에는 그물 10여 틀만 넣어도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30여 틀을 넣고 있다. 새만금방조제가 막힌 시점부터 생긴 변화다. 최 씨만이 아니다. 말도, 명도의 주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보다는 낫다. 낚시꾼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고, 낚싯배와 민박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아직도 바다가 잘 버텨주고 있다. 생태마을로 지정된 방축도는 그물이 섬을 둘러싸고 목을 죄고 있다. 그것이 섬사람들의 목을 죄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결과다.
새만금방조제의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앞두고 위도에서 만난 주민이 떠올랐다. 그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 낚시꾼도 찾지 않는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물고기가 머물러야 할 갯골엔 펄이 쌓였다. 해초가 펄에 묻혔으니 고기들이 떠날 수밖에. 갯벌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이 갯벌이 사라지면서 마을을 떠난 사정과 같다. 비슷한 상황이 고군산군도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말도, 명도, 방축도에서도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등대가 바닷고기를 부른다?
숙소에 짐을 풀고 마을 주민의 배를 타고 말도로 향했다. 고군산군도의 섬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유인도다. 그래서 말도라고 했다. 선창이 잘 만들어져 있어 방축도나 명도의 배들도 태풍이 오면 이곳으로 피항한다. 말도 선창에 바지락 몇 자루가 주인도 없이 덜렁 놓여 있다. 군산으로 나가는 배에 실어 보낼 모양이다. 이곳 섬사람들은 찬 바람이 나면 대부분 섬을 떠나 군산에서 생활한다. 봄철에 왔다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겨울에 나간다. 그래서 ‘반살이’라고도 한다. 김 양식을 하던 시절에는 섬을 지켰다.
말도에는 등대가 있다. 고군산군도의 유일한 등대다. 군산항으로 드나드는 배들은 모두 말도등대의 신호를 받았다. 말도등대는 1909년에 세워졌다.
등대가 우뚝 서 있는 바다는 거침없이 트여 있다. 불빛을 멀리까지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벽에 등대가 많다. 말도등대 밑으로 수시로 낚싯배들이 오간다. 등대 주변에는 물고기도 많다. 인적이 드물고 갯바위와 해초들이 풍성하니 물고기에게는 최고의 안식처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편안치 않다. 주민들이 쳐놓은 뺑뺑이그물이 수없이 많다. 아예 등대 밑에 작은 보트를 띄우고 자리를 잡고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다.
바위에 기록된 오래된 기억
말도에서 등대와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이 돌섬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다. 말도 사람들은 이 해송을 천년송이라 부른다. 주변을 태공이 접수하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등대를 뒤로하고 딴섬과 송널로 향했다. 딴섬에는 억새와 띠가 자라고 송널은 소나무 한 그루와 해국이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를 작은 모가지, 큰 모가지라 불렀다. 이곳을 연결해 방파제를 만들었다. 그곳에도 낚시꾼 몇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억 년 동안 하늬바람과 파도에 맞서온 바위 위 한 그루의 해송이 장엄하다 못해 경이롭다. 카메라를 든 사내가 요리조리 사진을 찍는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나무가 죽으면 마을이 망한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나무가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인간인들 살아남겠는가. 해송은 의지할 곳 없어 북서풍을 이겨내려고 고개를 남쪽으로 돌렸다. 몸도 낮춰 천년을 버텨온 생명력이 경이롭다. 간혹 철없는 관광객 중에 소나무를 사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집 안에 두고 혼자 보려는 것일까.
방축도, 말도, 명도 주변에는 책바위라 부르는 습곡이 발달했다. 특히 말도의 습곡은 선캄브리아기의 지층으로 물결자국 화석과 경사진 층지의 퇴적 구조를 잘 간직하고 있다. 방축도의 독립문바위도 예사롭지 않다. 지질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자연사박물관이다. 관광객도 자연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다. 도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걸작을 빚어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적어도 6억 년 전에 형성된 지층이라고 한다.
뭍으로 나오는 길에 장자도, 대장도, 선유도, 무녀도에 들렀다. 이곳에도 자연이 남긴 수많은 걸작들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 걸작을 가로질러 큰 도로를 만들고 있다. 새만금방조제와 연결하는 도로를 놓기 위함이다.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이 사라지고 있었다. 선경이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고군산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수억 년의 긴 세월에 인간이 남긴 자취는 잠깐일 뿐인데. 방축도, 명도, 말도의 안위도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