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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권다현의 아날로그 기차 여행] 근대로의 시간여행, 군산 임피역
[권다현의 아날로그 기차 여행] 근대로의 시간여행, 군산 임피역
  • 권다현 여행작가
  • 승인 2020.05.12 2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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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미곡 수탈의 주요 교통로였던 임피역
오포 사이렌 등 근대 주변 시설 고스란히 남아
근대문화유산마을서 헤아려보는 비극적 역사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군산 임피역.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스케치=군산] 기차역은 마을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문이다. 문을 연다는 것은 더 큰 세상과 만나는 기회이자 때론 비극의 씨앗이 된다. 군산의 임피역이 그렇다. 신문물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기차역이 잔혹한 수탈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선 자리에 따스한 햇살과 바람이 쉬어간다. 

애초 일제강점기 기차역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었다. 인근 토지에서 수탈한 농산물을 반출하는 통로일 뿐이다. 임피역도 일제 미곡 수탈의 주요 교통로였다. 입구에 자리한 ‘옥구농민항일항쟁비’가 그 비극을 대변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임피역 주변엔 80년이 넘은 재래식 화장실과 오포 사이렌도 남아 있다.

수탈을 위해 지은 기차역
임피역은 1912년 세워졌다. 임피면의 이름을 땄으니 면 소재지인 읍내리에 자리한 줄 알았으나 4~5km 정도 떨어진 술산리에 역사가 들어섰다. 지금도 임피역으로 향하는 길엔 드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식민지 농민들은 이 비옥한 땅에서 생산된 쌀 한 톨 맛볼 수 없었다니 씁쓸한 마음이 달래지지 않는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임피역 입구에 자리한 옥구농민항일항쟁비.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임피역사 주변을 걷는 여행자의 모습.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미곡 수탈의 주요 교통로였던 임피역의 비극은 입구에 자리한 ‘옥구농민항일항쟁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옥구는 과거 군산의 임피와 익산의 함열 등을 통합해 부르던 지명으로, 비옥한 도랑(沃溝)을 뜻하는 이름처럼 일본인들이 들어와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곳이다. 일본인 지주의 횡포야 말로 다 할 수 없겠지만, 옥구에 자리한 이엽사 농장은 농민들에게 부과했던 소작료만 75%에 달했다. 여기에 비료대와 수세, 운반비까지 덧붙이니 농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농민조합에서 여러 차례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927년 11월 15일, 농장에서 시위가 벌어진다. 일본경찰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농민들도 임피 경찰관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주체적인 항일운동으로까지 번진다. 기념비에는 당시 옥고를 치른 34명의 항일투사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18인의 애국지사 이름을 적어 기억하고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임피역에서 만나는 채만식의 흔적.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임피역에서 만나는 채만식 
군산을 대표하는 작가 채만식은 이곳 임피에서 태어났다. 읍내리엔 그의 생가 터도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쓴 <탁류>는 지금도 근대 군산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단서가 된다. 임피역 주변엔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재현한 조형물도 세워졌다.

채만식의 단편소설 <논 이야기> 속 한생원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술책으로 논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해방이 되면서 논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엉뚱한 무리들이 일본인의 재산을 부당 처분하면서 결국 남의 땅이 되고 만다. <레디메이드 인생>의 P는 대학교까지 졸업한 지식인이지만 현실은 빈곤한 실업자다. 책을 저당 잡혀 선술집과 색주가를 돌아다니며 울분을 터트리던 그는 학교에 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아들을 인쇄소 견습공으로 맡겨 버린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식민지 조선인의 좌절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던 채만식이지만, 그 역시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며 자신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했다지만 임피역이 지닌 아픈 역사를 떠올리면 이 기묘한 공존이 달갑지 않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운이 좋으면 임피역을 지나는 열차도 만날 수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시간이 멈춘 폐역, 시간을 달리는 기차
지금의 임피역은 193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 농촌 지역에 들어섰던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인 건축양식과 기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형도 잘 보존되어 있다. 덕분에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 및 관리되고 있다. 

무엇보다 근대의 주변 시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임피역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재래식 화장실은 그 역사만 8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도 관람이 가능해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앞에는 지금도 사용 가능한 옛 우물과 펌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씩 울리던 오포 사이렌도 남아 있다. 지금도 정오마다 10초간 사이렌을 울려 시간을 맞춰 가면 색다른 정취를 느껴볼 수 있겠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씩 울리던 오포 사이렌.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옛 우물과 펌프는 현재도 사용할 수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임피역의 재래식 화장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운이 좋으면 임피역을 지나는 열차도 만날 수 있다. 2008년 폐역이 되면서 플랫폼 출입은 금지됐지만 기찻길은 여전히 사용 중이다. 마침 멀리서 열차 엔진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임피란 역명이 적힌 낡은 안내판 너머로 마침내 기차가 들어서자 짜릿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누군가 흉터는 상처를 극복했다는 의미라 했다. 이제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선 낡은 기차역엔 따스한 햇살과 바람이 쉬어간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등록문화재 208호로 지정된 임피역.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INFO 임피역
주소
전북 군산시 임피면 서원석곡로 37 

<탁류> 속으로, 군산 근대문화유산마을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하바꾼(미두장에서 쌀의 시세를 알아맞히는 도박을 하며 생활하는 미두꾼에서 전락한 사람) 신세가 된 정주사가 미두장에서 멱살을 잡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름 선비 가문에서 글 좀 읽었다는 그는 번듯한 직업을 구하려 군산으로 왔다가 미두장에서 전 재산을 날리고 만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내에 미두장이 재현되어 있어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박물관에는 임피역사도 조성되어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미두장은 쌀과 콩을 사고팔던 곳으로, 지금의 증권거래소처럼 시세 차익을 통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와 자본에서 일본인들을 이길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정주사처럼 재산을 몽땅 잃고 미두장 밖에서 내기만 겨우 하는 하바꾼으로 떠돌게 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는 이 비극적 공간인 미두장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박물관 일대를 근대문화유산마을이라 부르는데, 이곳을 함께 둘러보면 근대 군산의 비극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나오면 왼쪽으로 옛 일본18은행과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이어진다. 지금은 근대미술관과 근대건축관으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 <탁류>에도 이들을 상징하는 ‘XX은행’이 등장한다. 은행은 일본인들에게 싼 이자로 대출을 해주고, 다시 이들은 조선인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통해 막대한 농토를 갈취한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곁에 자리한 옛 군산세관 건물.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우리나라 유일의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의 촬영지로 유명한 히로쓰가옥도 이렇게 부를 축적한 군산 5대 부호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전해진다.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다 보니 자연스레 종교도 유입됐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엔 교토에서 제작했다는 일본식 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엔 평화소녀상과 일제의 만행에 대한 사과와 참회가 담긴 비석이 세워져 작으나마 인간과 양심에 대한 희망을 엿보게 한다.     

INFO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9시(첫째ㆍ셋째 월요일 휴관) 
관람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주소 전북 군산시 해망로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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