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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추억은 방울방울]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애잔한 기억 속의 서울역이여
[추억은 방울방울]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애잔한 기억 속의 서울역이여
  • 정리 서태경 기자 
  • 승인 2008.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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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1995년경 서울역사 전경. 윤상철 씨의 출품작.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오는 2010년 구 서울역사의 서울역복합문화공간 재탄생을 앞두고 서울역과 관련된 이야기 공모전이 열렸다. 만남과 이별, 잊지 못할 에피소드, 울고 웃었던 우리 서민들의 다양한 사연이 접수되었다. 눈 뜨고도 코 베어 간다는 서울. 그 서울의 관문이었던 옛 서울역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4년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구 서울역사. 구 서울역사가 올 4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0년 서울역복합문화공간(가칭)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개관에 앞서 지난해 9월부터 11월 15일까지 문화체육관광부는 ‘당신의 서울역 추억을 들려주세요’라는 주제로 이야기 공모전을 개최, 총 289편의 작품이 접수되어 최우수작 1편, 우수작 2편, 가작 5편을 선정했다.

지금이야 덩그러니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지만 오랜 세월 서민들과 함께한 구 서울역사에는 고단했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지금도 정문을 지나 2층 대합실로 올라가면 퀴퀴한 냄새와 함께 그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날 것만 같다. 

1925년 9월 30일 경성역으로 준공해 1946년 11월 1일 광복 1주년을 기념해 서울역으로 불리기 시작한 구 서울역사는 2004년 경부선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이웃한 신역사로 바통을 넘겨주었다. 1925년에 문을 열었으니 거의 80년 세월이다. 그 긴긴 세월 동안 서울역에선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까.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서울역 풍경.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고향에 못 가게 된 친구의 기차표를 팔다 암표장사꾼으로 오인 받아 남대문경찰서에서 추석을 보냈다”는 최병용 씨는 지금도 명절이면 서울역에서의 곤혹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린다는 사연을 접수했다. 

또 일제시대 경성지방철도국 직원으로 1945년 1월 서울역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는 이용구(82세) 씨는 “3등 대합실 긴 의자에 잠시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빈대가 덤벼들어 따끔따끔 물어뜯었고, 남루한 옷차림에 보따리 끼고 앉은 나그네, 오도 가도 못 하는 거렁뱅이와 중국인 유랑극단원 등이 심각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혹은 슬픈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또한 걸핏하면 사람을 연행했고 양곡 반입을 막기 위해 부녀자들의 몸까지 수색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역 2층 구내식당에서는 늘 맛있는 양요리 냄새를 아래층에까지 풍겨 돈 없고 배고픈 나그네의 식욕을 더욱 자극하였다”며 서울역을 회상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서울역은 단순히 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어주어 그 존재의 중요성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서울역. 역으로서의 기능은 멈춘 지 오래지만 우리들과 함께한 추억 속의 서울역은 영원할 것이다. 

최우수작   안숙희 님의 목마와 시계탑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그 시절 나는 아이들을 친정에 두고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마산역까지만 데려다주고 엄마가 서울역에 나와 있으면 되잖아.” 농번기 때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시골집 사정을 걱정하며 말하는 딸아이를 보며,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아이가 대견해 쉽게 허락했던 것이 결국엔 화근이 되었다. 

아이들끼리만 서울역으로 올라오던 게 두어 번째쯤 되던 토요일이었다. 잔업을 해야 할 정도로 많았던 일감 탓에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 없어 30여 분이나 늦게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발을 동동 굴러보았지만 그날따라 차도 막혔다. 

서울역에 도착해 아이들과 내가 늘 만나던 플랫폼 쪽으로 부랴부랴 뛰어가 보았지만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들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도착 시간에서 한 시간 정도 흘러 있었고, 주변을 다 뒤져봐도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이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서울역 광장을 이리저리 돌고, 다시 서울역 내부에 들어가 대합실이며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아이들은 없었다. 

시골 이장님 댁까지 전화를 걸어 엄마와 통화를 연결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지만, 엄마 역시 손녀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끼실 뿐이었다. 

때마침 추석 즈음이라 무척 붐볐던 서울역에서 나는 그렇게 입술을 꼭 깨물며 봇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가며 아이들을 찾았다. 아, 그런데 순간 무언가 스쳐 지나가듯 큰아이의 애교 섞인 말투가 떠올랐다. 

“엄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랑 길이 엇갈리거나 우릴 잃어버리면 서울역 시계탑으로 와요. 내가 윤미 꼭 붙잡고 시계탑 앞에서 엄마 올 때까지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시계탑 앞으로 오면 돼.” 뛰었다. 나는 시계탑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시계탑이 가까워져도 아이들의 모습은커녕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지금과 비교해도 많이 변화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이런 인파 속에 고만고만한 계집아이들이 보일 리가 없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가며 시계탑을 응시하는데 아침의 붉은 햇살처럼 내 아이가 시계탑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부비고, 시계탑을 다시 쳐다보았다. 분명 나의 작은딸이었다. 시계탑으로 뛰고 또 뛰었고 가까이에 가서야 둘째 아이의 키가 어른보다 훌쩍 커져버린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이름도, 고향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어깨 위에서 태연히 목마를 타고 있었다. 우느라  얼굴이며 머리가 다 망가진 나와는 달리 두 아이의 얼굴은 엄마를 만난 반가움에 생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 아이들을 찾았다는 안도감은 이내 사라졌고, 나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눔의 가시나들! 엄마랑 늘 만나던데 있어야지, 조금 늦었다고 어딜 싸돌아 다녀! 서울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큰아이가 말했다. “우리 잃어버리면 시계탑 밑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그리고 돌아다닌 건 윤미가 목마르다고 해서 우유 사러 가게 간 게 다라구. 시계탑에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못 찾아? 엄마가 더 바보 같아.”

시계탑 아래에 있으면 엄마가 꼭 올 것이라고 믿었던 아이들이었기에 아이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계탑 밑에서 기다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안위를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앞에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허리까지 숙여가며 고맙다, 감사하다 인사를 전하자 남자는 웃으며 “제가 한 게 뭐라고요. 저도 기차 시간이 한참 남고 해서 심심하던 차에 아이들과 좋은 말동무가 되었는걸요”라고 말하였다. 남자가 추석을 쇠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열차를 기다리던 중에 웬 아이가 나타나 엄마가 자신들을 잘 찾을 수 있게 목마를 태워달라 했고, 남자는 그런 아이들이 귀여워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었노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준 그분에게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 이후로도 아이들과 나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역에서 만났다. 혹시라도 아이들과 길이 엇갈릴 때도 서울역의 시계탑이 제자리에 있기에, 나와 아이들은 더 이상 서로를 잃을까 가슴을 두근 반 세근 반 졸이지 않게 되었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좌 박정자 씨가 출품한 1963년 서울역 전경의 모습.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가작  최영두 님의 ‘산’을 옮기던 사람들
서울역 하면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각양각색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서울역 광장의 환한 조명탑 아래 ‘산’을 옮기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지 못하던 시절, 나는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오랜 기다림 끝에 서울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역이라고는 했지만 서울역 철도공무원이 아니라 우편물을 취급하는 철도우편운송국 소속이었다. 

철도를 통해 서울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우편물을 취급하였는데, 서울역사 바로 옆 작은 문이 있는 곳에 붙어 있었다.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안은 여느 우체국의 모습과는 달랐다. 우선 출근 시간부터가 달랐다. 오후 4시 정도에 출근을 하면 그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밤새 우편 행낭(물건을 넣어 옮기는 큰 주머니)과 싸움을 해야 했다. 

때는 1989년 겨울, 매서운 바람이 서울역사 주변에 불었다. 우리는 살을 에는 찬 바람을 몰고 플랫폼에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차를 몰고 달려갔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야간열차에서 내린 수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을 빠져나가면, 우리는 열차 안에서 잠시 몸을 녹였다가 다시 행낭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각 행선지에서 올라온 우편물 행낭들이 쌓여 있었고 우리는 그 행낭을 차에 실었다.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호남선, 장항선 등 기차마다 행낭들이 가득했다. 밤은 깊어가고 몸이 피곤해지는 시각, 행낭들이 집채만큼 쌓이면 달빛이 내리쬐는 서울역 플랫폼을 따라 트럭을 몰고 나왔다. 그렇게 가지고 나온 행낭들이 서울역사 바로 왼편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이걸 다 옮긴단 말이에요?” “그럼.” 선임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나는 트럭들이 들어오면서 부려놓은 그 행낭의 높이에 압도되고 말았다. 전국에서 연말에 올라오는 우편물들의 양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야말로 산을 옮기는 일이었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김기원 씨가 출품한 1956년의 서울역 모습. 해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를 찍어드린 사진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오후 4시에 출근을 해, 밤이 되면서 서서히 도착하는 서울역의 열차에서 실어내린 우편물들을 그렇게 산더미처럼 광장에 쌓았고, 사람들이 그 행낭들을 마치 개미처럼 끌고 각 지역을 알리는 팻말 부근으로 옮기면 행낭은 도봉, 강서, 중앙, 영동 등 우체국 이름별로 나누어지기 시작한다. 

밤 8시부터 시작된 일은 새벽으로 가는 시각에도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계속되었다. 그 사이 잠시 짬이 나 사무실에서 잠깐 졸다 눈을 뜨면 창밖으로 낯선 서울의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역을 밝히는 광장의 조명탑 불빛이 서서히 꺼질 무렵, 우리는 일을 끝내고 퇴근 준비를 했다.

다시 일터로 돌아오면, 가끔 결혼식에 다녀온 사람이 가져온 떡이며 머릿고기로 작은 파티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대머리 헤드라이트 아저씨를 비롯해 생활력 강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던 피난민 출신의 나이 드신 분 등 전국 곳곳의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이 시작되기 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앉아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학생, 수녀님, 짐 보퉁이를 들고 아들 집을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해 온갖 사람들로 활기 넘치는 곳이 서울역이었다. 어느 날 밤엔 휴가 나온 군인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애인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는 두피가 마비되는 증상이 생겼다. 병원에선 신경성이라며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때 배려심 많았던 선임이 자신이 처음 겪었던 직장생활의 힘겨움을 들려주었고 그의 말은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 선배 덕분에 나는 무사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의 첫 발령지였던 서울역을 지날 때면 감회에 젖는다. 밤을 하얗게 새우며 ‘산’을 옮기던 날의 힘겨웠던 기억이 내게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날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삶의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찬 바람을 몰고 달려오던 철마와 서울역 플랫폼의 모습과 함께 서울역 광장을 비추던 환한 조명탑의 불빛이 선하다. 밤새 ‘산’을 옮기던 따뜻하고 고마웠던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말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중국 교포라고 자신을 밝힌 허금산 씨가 보내온 사진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가작 한미나 님의 기차는 추억을 담고 희망역으로 돌아온다
올 4월 말, 어머님 생신이 일주일 남았을 때였던가. 남편이 불쑥 카드 형태의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살펴보니 시골로 가는 기차표였다. 둘째 아이 출산 전후로 근 5년간 기차와 담을 쌓고 지낸 터라 지갑에 쏙 들어가는 빳빳한 신형 기차표가 새롭게 느껴졌다. 시침 뚝 떼고 “이게 뭐야?” 하고 물어보니 올해부턴 시골에 기차를 타고 가고 선물 같은 큰 짐은 모두 미리 택배로 보내어 짐을 줄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국 택배로 큰 짐은 부쳤지만 한 팔에 각자 한 아이씩을 끼고 나머지 한 손엔 자질구레한 보퉁이를, 또 등에는 옷가지가 든 배낭을 메고 플랫폼에 들어섰다. 전면이 유리로 된 역사, 디지털로 알려주는 열차 정보, 세련된 승무원들. 세월을 따라 변한 풍경은 내가 기대했던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알려주는 듯했다. 새로운 여행이라. 아니 나에게는 이미 18년 전 시작되어 2년 동안 이어진 기차와의 인연이 있다. 

서울역과 무궁화호의 주황색. 연착만 하면 우르르 내려 달리던 인파들, 푸른색 지붕의 플랫폼, 지하도의 커다란 거울, 노란 종이 승차권, 대학생 할인표, 홍익회, 입석의 비릿한 신문냄새 등 아련한 옛 추억과 함께했던 여행…. 마음속에 꼭꼭 접어놓았던 부끄럽지만 아련했던 기억이 서울역의 냄새를 맡는 순간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왔냐?” “네, 오늘은 12장 주세요. 다음 주랑 그 다음 주 것 모두 예약하려고요.”
충남 조치원이 고향인 나는 서울역 인근 여대에 입학했지만 기숙사 추첨에서 떨어져 하숙집을 구해보려 했다. 하지만 서울의 높은 물가와 생활비 때문에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구하는 자에게 길이 있는 법. 선배의 조언에 따라 머리를 굴리고 굴린 결과 시간표를 조정하면 일주일에 나흘만 학교에 와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나흘만 서울에 있으면 되니 기차 통학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서울역까지 걸어보니 25분 정도로 버스비도 절약할 수 있었고, 매일 서서 다녀야 하지만 서울역에 오전 8시 25분 도착하는 통근열차를 활용하면 돈을 좀 더 아낄 수 있다는 사실도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드디어 개학날, 우르르 서울역을 나서는 인파 속에 시골에서 갓 상경한 내가 서 있었다. 서부역 쪽에서 걸어 청파동까지 두꺼운 책 8권을 들고 입학식으로 가면서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권영태 님이 초등학교 4학년, 누나가 6학년이었던 40년 전 여름방학. 충북 증평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찍어준 사진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1990년 당시 대학생 열차 할인은 반드시 1인당 1매의 할인 쿠폰이 필요했다. 새벽 정기권은 저렴했지만 매일 아침에 1시간 반을 서서 오다보니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20% 할인을 해주는 대학생 기차 할인권을 학교 총무과에서 발급 받아 귀가 때는 앉아 가는 사치도 부려보게 되었다. 

근 1년 반을 기차로 통학하다 보니 서울역의 경부선 발권 담당자의 얼굴을 거의 익히게 되어 친절한 분을 골라 표를 끊는 노하우도 생겼다. 기차 타는 데도 요령이 생겨 일부러 값싼 입석표를 끊어 1, 2호 차의 진행 방향 맨 뒷좌석 뒤에 신문을 깔고 앉으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1시간 반 동안 책 한 권 너끈히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1학년 초, 미리 끊어놓은 기차표만 믿고 친구랑 놀다 헐레벌떡 서부역에 들어서니 이미 기차는 떠나고 없었다. 치마를 입었지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옆 개찰구를 뛰어넘어 서울역 지하통로를 단숨에 달려갔건만 허사였다. 대합실에 들어와 정신을 차려보니 수중의 몇 백 원과 기차 환불금액을 합쳐도 막차인 무궁화호 기차표를 사기에 몇 백 원이 모자랐다. 너무 황당하고 속상해 눈물이 앞을 가려 대합실 의자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친구 집에 가서 잘 수도 있고 혹은 근처 자취나 하숙하는 친구에게 연락을 할 수도 있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런데 갑자기, 좀 전에 기차표 환불을 해준 역무원이 슬그머니 내 손에 다음 기차표를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고마워 더 크게 울어버렸다. 그 다음날이라도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창피했던 나머지 한동안은 그분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기차 놓치고 환불해달라고, 집에 못 가면 어떻게 하냐고 떼쓰다가 목 놓아 우는 철부지 대학생이 얼마나 가엾게 보였으면 돈 더 내라는 말도 못하고 표를 끊어주셨을까. 온정이 있었던 그때 그 서울역 직원분의 호의가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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