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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치유여행] 용인 세중돌박물관 수 천 년 풍파로 빚어진 크고 온화한 미소들
[치유여행] 용인 세중돌박물관 수 천 년 풍파로 빚어진 크고 온화한 미소들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04.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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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돌의 묵묵한 표정이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용인] 5년 전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사회초년생이 고뇌를 잊고자, 돌의 묵묵함을 보고 용기를 얹고자 이곳에 들렀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돌에게 마음을 어루만져 달라는 어리광을 부리러 용인으로 향한다.

한적한 산마루에 위치한 세중돌박물관으로 향한다. 조그만 읍내에서 박물관까지는 약 1.7km, 아스팔트길이 잘 뚫려 있지만 일부러 차를 두고 걸어가기로 한다. 예전에도 그랬다. 아담한 가로수가 몇몇 지나는 차들의 소음을 막아주어 더없이 한적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길게 느껴지지 않는 길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으면 저 멀리로 두 마리의 사자상이 박물관의 시작을 알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행여나 몇천, 몇백 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내온 돌들이 5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바뀌지 않았을까 내심 초조한 마음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잔잔한 국악 연주가 마음을 안정시킨다. 혹시라도 요즘 사람들 취향에 맞게 클래식 음악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기우였다. 입구의 작은 계곡에서는 겨울잠을 끝낸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단지 1.7km의 길을 걸어왔을 뿐인데 이미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느낌마저 든다.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돌 사이에 낀 묵은 이끼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오른쪽으로는 마을의 수호와 안녕을 지키던 장승과 솟대가 박물관을 수호하듯 우뚝 서 있다. 고개를 들어 언뜻 바라본 박물관 전경은 5년이란 시간 동안 새로운 식구들이 들어섰지만 그야말로 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돌마을, 그 자체이다.

밤이면 달과 별, 낮이면 햇볕, 바람, 비 부딪히고, 흰 눈 펄펄 내려 철 따라 이는 것에 피가 잠기고 스며드는 빛깔들 아롱지는 빛깔들에 혼이 곱는다. 

박두진 시인은 그의 시 ‘돌의 노래’에서 모진 세월의 단련 속에서 돌에 피가 감기며 하나의 생명체가 되고 세상의 갖가지 빛깔들을 담은 표정으로 세월을 살아간다고 했다. 돌은 하찮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산보다 더 높은 성도 쌓고 탑이 되기도 한다.

돌에서 석물이 되어 수천년 세월을 이겨내면 사람과 같은 혼이 깃든다.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만나는 석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우리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이다.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제주도의 옛 화장실인 ‘통시’.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을 쓰다듬듯 석상에 손을 갖다대어본다. 나를 향해 빙긋이 웃어주는 듯 따뜻한 느낌이 여전히 참 푸근하다. 몸집이 커진 만큼 마음의 그릇도 커졌지만 그곳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방황하는 나와는 달리, 석물들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큼’을 보여준다. 비록 말은 없지만 ‘괜찮다, 괜찮아’라는 듯 넉넉한 미소만으로 모든 상처를 위로받는다. 

석물들은 시간에 따라 각각 표정이 달라진다. 오전에 올 때만 해도 아침 안개에 수줍은 미소를 짓던 석물들이 오후가 되자 정점에 오른 햇살을 받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풍광에 닳아온 시간만큼 시시각각 제 모습을 숨김없이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살아 있는 것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돌의 순박함이 고맙게 느껴진다. 

여러 석물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곳은 벅수관이다. 벅수는 장승의 다른 말로, 잡귀를 막아 마을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맑게 웃는 모습에서부터 잔뜩 찌푸린 모습 등의 다양한 얼굴 모양이 마치 인간사의 모든 감정을 농축시켜놓은 것 같다 해서 ‘희로애락의 언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늘을 찌를 듯 서 있는 거대한 미륵불. 2009년 4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줄을 지어 선 석상들은 때론 음산한 분위기를 내기도 하지만 때론 박장대소를 자아낼 만큼 익살스런 표정을 짓기도 한다. 특히 동자석이나 석수를 볼 때면 그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웃음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조금 더 길을 올라 제주도관에 들러서는 추억에 발길이 머물기도 한다. 작년 제주도에 들렀을 때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와의 거나한 술자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싱싱한 회와 제주의 미지근한 소주도 좋았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의 조우가 더욱 좋았던 기억. 

경상도관의 석상에서는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았던 불알친구들의 코 묻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른한 발 한걸음에 이런저런 추억의 발자국이 세 발짝씩 과거로 나아간다. 더불어 마음의 즐거움도 한 아름씩 커진다.    

그렇게 전시관의 끄트머리인 불교관까지 둘러보는 동안에도 석물들은 꿈쩍도 않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유를 준다.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그들의 넓은 마음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이윽고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유유한 삶을 깨달으며 오늘을 사는 지혜가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어느 땐들 맑은 날만 있었으랴만, 오 여기 절정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하늘 먹고 햇볕 먹고 먼 그 언제 푸른 새로 날고 지고 기다려진다. 
-박두진 ‘돌의 노래’ 중

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유유히 받아들이다 보면 저런 온화한 미소를 지닌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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