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4월호
[임요희의 소설 속 여행지] 삶의 막다른 끝에서 맛본 커피 한잔의 안식,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
[임요희의 소설 속 여행지] 삶의 막다른 끝에서 맛본 커피 한잔의 안식,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
  • 임요희 여행작가
  • 승인 2020.06.11 02: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55년 발표된 김동리 소설 '밀다원 시대'
소설가가 누볐던 광복동과 보수동
밀다원 시절을 증언하는 백화점과 시장을 엿보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구름이 쉬어가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일대 풍경. 사진 / 조아영 기자

[여행스케치=부산]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한 부산은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은 유일한 대도시였다. 많은 사람이 난리를 피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소설가 김동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김동리가 <밀다원 시대>를 발표한 것은 1955년의 일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직접 헤쳐 온 부산 피난 시절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이중구라는 인물은 작가의 페르소나인 셈이다.

‘이중구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6시 20분. 어저께 3시 15분 전에 탔으니까 꼭 27시간하고 35분이 걸린 셈이다. 27시간하고 35분. 그렇다. 그동안 중구의 머릿속은 줄곧 어떤 ‘땅끝’이라는 상념으로만 차 있는 듯했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것….’ - 소설 <밀다원 시대> 中 

소설 <밀다원 시대>는 6.25전쟁을 피해 부산의 다방 ‘밀다원’에 모여든 예술가들의 이야기이다. 대부분 가족을 버려둔 채 급하게 몸을 피한 사람들로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중공군이 밀어닥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에 더해 문인들의 안식처였던 밀다원마저 문을 닫고 이들은 세상의 끝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이런 와중에도 예술혼만큼은 놓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 책 표지. 사진 / 문이당
서울이 남산을 끼고 자리 잡았다면 부산 광복동에는 용두산 공원이 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소설가가 누볐던 광복동과 보수동
‘밀다원 시대’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밀다원이 자리했던 중구 광복동은 여전히 부산 상업의 구심점으로 여겨진다. 밀다원 시대를 찾아가는 중구여행은 과거 부산의 영화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활기찬 현 부산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중구는 2000명이나 되는 승객 틈에 끼어 무사히 부산에 당도했지만 낯선 도시에서 오갈 바를 모른다. ‘본디 주변머리도 없었지만 부산에 또한 아무런 연고도, 연락도 없었던 것이다.’ 중구는 기차에서 만난 윤을 따라 K 통신사 지국으로 발길을 돌린다. 당시 K 통신사 지국이 있는 곳은 중구 보수동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머물렀던 보수동.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부산은 한국 영화의 메카로도 꼽힌다. 사진은 영화 <국제시장> 촬영지인 ‘꽃분이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이중구는 보수동 차가운 골방에 누워 타지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한다. ‘서울 원서동 막바지 조그만 고가(古家) 속의 냉돌방에 홀로 버려두고 온, 천만(喘滿)으로 지금도 기침을 쿨룩거리고 있을 늙은 어머니와, (…) 어린것까지 이끌고 찾아 내려간 아내의 얼굴이 한꺼번에 확 불 켜지는 듯’하는 것이 그가 부산을 끝의 끝, 막다른 끝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다.

보수동은 헌책방거리로 유명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6.25전쟁 후 주한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를 팔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50여 곳이 넘는 헌책방이 성업했지만, 중고 도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대형 서점들이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면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지금은 참고서를 사기 위한 학생들이 주로 찾고 있으며,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INFO 보수동 책방골목
구간
대청사거리~보수사거리(0.3km)
주소 부산 중구 대청로 67-1

부산으로 피란 온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다방 밀다원을 재현한 공간. 사진 / 조아영 기자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에 재현된 밀다원 내부. 사진 / 조아영 기자

그 시절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밀다원 다방
밀다원은 서울에서 온 문인들의 아지트로, 주인공 역시 밀다원을 염두에 두고 부산행을 결심했다. 소설 속 밀다원 내부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다방 안은 밝았다. 동남쪽이 모두 유리창이요, 거기다 햇빛을 가리게 할 고층건물이 그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가운데는 커다란 드럼통 스토브가 열기를 뿜고 있는 카운터 앞과 동북 구석에는 상록수가 한 그루씩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얼른 보아 한 스무 개나 됨직한 테이블을 에워싸고 왕왕거리는 꿀벌 떼는 거의 모두가 알 만한 얼굴들이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동료들을 만난 반가움 때문이었을까. 밀다원 커피는 이중구에게 하나의 안식으로 다가온다.

‘중구는 여러 친구들의 ‘식기 전에’라는 권고에 의하여 아직도 김이 모룽모룽 오르는 노리끼리한 커피를 들어 입술에 대었다. 닷새만이다. 한 10년 동안 시베리아 같은 데 유형살이를 하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커피를 입에 대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도 커피의 한 모금은 그의 가슴속에 쌓이고 맺혀 있던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훅 쓸어내려 주는 듯했다.’

전쟁은 삶을 180도 변화 시켜 놓는다. 보수동으로 흘러들었던 영문 잡지가 그러했고. 각 다방에서 내놓은 인스턴트 커피가 그러했다. 주한미군을 통해 흘러나왔을 인스턴트 커피는 커피 두 수푼, 설탕 두 수푼, 프림 세 수푼이라는 공식 아래 달콤 쌉싸래한 미감으로 한국인의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아버렸다.

밀다원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2001년까지 운영된 미화당백화점의 터가 옛 시절을 증언한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밀다원 시절을 증언하는 백화점과 시장
그 시절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밀다원의 ‘김이 모룽모룽 오르는 노리끼리한 커피’는 아쉽게도 현재는 맛볼 수 없다. 밀다원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대신 1949년에 건립되어 2001년까지 운영되었던 ‘미화당백화점’의 터가 밀다원 시절을 증언한다.

미화당백화점은 서울의 화신백화점과 더불어 우리나라 백화점 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곳이다. 전쟁 직전인 1949년 12월, 4층의 목조 건물로 출발한 미화당백화점은 용두산 공원, 남포동, 국제시장, 자갈치시장을 잇는 광복동 중심가에 위치해, 부산의 쇼핑 메카로 오랫동안 번성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유통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2001년 문을 닫고 만다. 미화당백화점은 부산 시민의 만남의 장소로 백화점 이상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도시의 상징을 하나씩 앗아가 버렸다.

한편, 밀다원에서 조우한 문우들로 인해 이중구는 잠잘 곳을 얻게 된다. 그가 두 번째 밤을 의탁한 곳은 서울서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조현식의 집이었다.

‘조현식의 집은 남포동에 있었다. ‘항도의원’이라는 병원 간판이 붙어 있는 일본식 건물이었다. 경남여중 교원에 현식의 친구가 있어, 그 친구의 소개로 이 병원의 이층 입원실 한 칸을 얻어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 북쪽 오시레에는 침구와 옷보퉁이와 크렁크와 책 상자와 그밖에 너저분한 피난살이 짐짝들이 들어 있고, 동쪽 오시레는 친척들의 침실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갈치시장 인근 풍경.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6.25전쟁 당시 국제시장은 미군 군용물자가 유통되는 경로였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오시레’란 일본어로 벽장을 뜻한다. 다다미, 오시레 같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1945년 광복 시점으로부터 6년이 채 되지 않은 탓에 당시 가옥에는 일제의 잔재가 여전했다. 일본식 가옥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상태지만 광복과 동시에 형성된 자갈치시장은 여전히 강건하다. 남포동 남항에 자리 잡은 자갈치시장은 일대가 자갈밭이었다는 속설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현재 건물 안팎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생선구이 골목 등의 명소가 있다. 회를 맛보려면 건물 2층 회 센터를 방문하는 것이 좋다.

피난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감천동ㆍ아미동
조금 더 피난 시절의 흔적을 살펴보고 싶다면 남포동 바로 서쪽에 자리 잡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과 감천문화마을을 방문해보자. 부산 사하구 감천동은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산 중턱을 헐어 정착한 곳이다.

당시 관념으로 산비탈은 사람들의 거주지가 아니었지만 평지에는 집을 지을 땅이 없었다. 감천동은 오랫동안 부산을 대표하는 낙후지역이었으나 보존형 도시재생사업인 ‘감천문화마을 프로젝트’를 통해 연간 300만 명이 방문하는 인기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무덤 위까지 보금자리를 일구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 어린 누나가 동생을 업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 사진 / 조아영 기자
마을 곳곳에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인근 서구 아미동도 비슷한 사례에 속한다. 산복도로변 아미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의 공동묘지였으나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무덤 위까지 보금자리를 일구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방문하면 당시 비석으로 사용됐던 돌들이 여전히 계단, 담장의 일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INFO 감천문화마을
주소
부산 사하구 감내2로 203 감천문화마을안내센터

INFO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주소
부산 서구 아미로 49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