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하동] 경남 하동은 우리나라 차 시배지가 있는 천년 차의 고장이다. 맛과 향이 뛰어나 신라시대에는 왕실에 차를 납품했고 조선시대에는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가 이곳 차를 경탄해 마지않았다.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왕의 차를 찾아 명인의 고장 경남 하동으로 떠났다.
경남 하동 화개면으로 가는 길.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온갖 꽃이며 초록이 만발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화개로 주변과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 차밭이다. 공들여 맞춘 퍼즐 같은 차나무가 훈훈한 봄기운에 신록을 뽐내고 있다. 제주도나 보성처럼 입이 떡 벌어지는 광활한 차밭이 아니라 올망졸망 아기자기한 차밭이 산과 들에 야무지게 들어차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차 생산 농가가 있는 하동답다. 하동의 차 농가는 전국의 39%에 달한다. 그런데 차 생산량은 불과 14%로 농가 수에 한참 못 미친다. 이는 하동의 차 농가가 대부분 개인의 이름을 걸고 수제차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화된 농법이 아니라 손이 많이 가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그러니 집집마다 차 맛이 다르고, 자신의 차에 대한 자부심도 드높다. 취재 중 만난 삼태다원의 김신호 명인은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까닭을 이렇게 답하였다. “기계로는 차 맛과 향을 다 살릴 수 없습니다. 전통 솥에 일일이 손으로 덖어 만드는 것이 수지 타산은 맞지 않지만 더 맛있는 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동을 여행할 땐 소박한 차밭의 경치뿐 아니라 그 맛도 꼭 느껴봐야 한다. 더불어 각각의 다원마다 체험 프로그램과 고유의 차 맛을 가지고 있으니, 알고 보면 차 체험 여행지로서 하동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4월 하순부터 여린 잎이 올라오는데 특별히 단맛이 짙고 향이 부드러워서 최고 상질로 친다. 이맘때 차를 좋아하는 이들은 부쩍 마음이 간질거린다.
차밭을 테마로 여행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쌍계사 아래 차 시배지다. 하동의 천년 차 역사가 이곳에서 발원했다. <삼국사기>에는 사신 대렴공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왔고 이것을 신라 흥덕왕이 지리산 일대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흥덕왕 이전에도 차가 존재했지만 널리 즐겨 마시게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대렴공이 가져온 차 종자를 심은 곳이 바로 하동 차 시배지라고 전해진다. 당시 하동 차의 맛이 각별했는지 어차원을 두고 왕실에 차를 납품했다.
시배지 차밭 뒤로는 대나무가 울창하다. 바람이 부는 결에 따라 대나무가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고 차나무는 비탈에 자리 잡고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고산선사의 <음다송> 구절들도 차밭을 따라 안내가 되어 있는데 그중 제15송이 잘 덖인 차처럼 향기롭게 입에 감긴다.
“대화하는 자리에는 마땅히 차가 있어야 하고 벗을 사귀는 자리에도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 차를 마시면서 대담하는 자리에는 평화가 머물고 차가 없는 자리에는 반드시 다툼이 있도다.”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는 차 안에 부처님의 말씀이 녹아 있다고 믿었다. 그런 그가 조선 팔도의 차 중 각별하게 칭송한 것이 바로 하동의 화개 차다. 골짜기와 난석을 두루 갖추었기에 하동의 화개 차 품질이 우수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비단 초의선사뿐 아니다.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하연은 “화개골의 차가 좋다고 익히 들어왔는데, 맑기는 양선산(陽羨山) 차 같고 차 향기 중하기는 금옥 같다”라고 노래했고, 추사 김정희 역시 “중국 최고 차인 승설차보다 낫다”며 화개 차의 품질을 치켜세웠다.
차 시배지에서 난 죽로차를 인근 법향다원에서 맛보았다. 입안에 맑은 향기가 만개하는 것 같았다. 가득 퍼지는 향기 안에서도 차 맛은 단단했다. 차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데도 한 모금에 “좋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법향다원을 운영하는 이쌍용 대표는 차가 매우 섬세한 식품이어서 토양과 수질, 사람의 솜씨에서 조금만 차이가 나도 맛이 변한다고 말한다. 비료를 뿌린 땅에서는 아미노산 성분 때문에 쓴맛이 강해져 차 명인들은 7년 이상 화학 비료를 치지 않는 땅에서만 차밭을 일군단다. 잡초 제거며 거친 찻잎을 제거하는 것도 오직 사람 손을 거쳐 이뤄진다. 그런 고로 차는 자연과 사람의 합작품인 셈이다.
하동의 차를 오감으로 체험하려면 각 다원에서 운영하는 차 체험 프로그램을 찾아보자. 도심다원, 차 공간, 연우제다 등 여러 체험 농원에서 4월 말부터 찻잎 따기와 차 덖기 체험을 운영한다. 그중 매암제다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홍차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주말을 이용해 홍차체험학교를 열어 단체는 물론 개인별로도 홍차 만들기, 혼합차 만들기 체험 등을 해볼 수 있다. 매암제다원은 하동에서 불과 8곳뿐인 ‘하동의 아름다운 다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차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매암차문화박물관과 차를 자율적으로 시음할 수 있는 찻집이 함께 있다. 매암제다원으로 들어서자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는 일본식 가옥이 차밭과 어우러져 일본의 어느 차밭을 누비는 듯하다. 매암 강화수 선생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다는 다구와 유물이 이국적인 박물관 안에 그득했다. 그런데 다구를 자세히 보니 사발처럼 투박한 모양에 크기도 제법 크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의 강동오 관장은 우리 차란 본래 다양하게 활용되어왔으며 격식만 앞세운 다도는 우리 본래 문화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안타까움이 커서 강동오 관장은 <동의보감>에 기록된 우리 혼합차를 복원하는 중이다. 이미 전통차 문화의 맥이 끊겼기에 복원 작업이 쉽지 않지만, 우리 차 문화를 알린다는 자부심에 손을 놓을 수 없단다.
한편 하동군이 설립한 차문화센터에는 전시관과 체험장 그리고 차를 마시고 구입할 수 있는 판매장이 함께 있어 차에 관한 토털 패키지를 즐길 수 있다. 토요일마다 다례 체험과 차 덖음 체험도 운영된다. 차문화센터 일대에는 5월 17~19일 하동 차를 알리는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차를 만들고, 맛보고, 차로 만든 화장품으로 족욕과 마사지도 받을 수 있다. 신라 왕을 매료시키고, 조선의 명사들을 반하게 하고, 차 명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곳, 5월엔 하동 천년 차의 향기를 찾아볼 일이다.
INFO.
차 시배지·차문화센터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664
매암제다원
주소 경남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293
법향다원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