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완도] 이즈음이면 생각나는 꽃이 있다. 뚝뚝. 봉오리째 스러지는 동백꽃이다. 부용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동백꽃 지는 모습을 보았다. 고산이 머문 안택이 있는 곳, 그래서 더 아름다웠는지 모르겠다. 고산은 51세에 부용동과 인연을 맺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등지고 제주로 가던 중이었다. 잠시 황원포에서 순풍을 기다렸다. 개울을 따라 오르다 부용동을 발견했을 것이다.
뾰족한 섬, 보길도
보길도는 격자봉(425m)을 중심으로 좌측에 망월봉(366m), 우측에 광대봉(310.5m)으로 둘러싸여 있는 뾰족한 섬이다. 섬 이름이 바로 ‘뾰죽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청해진 완도군 향토사>에 따르면 ‘뾰족한’의 ‘ㅃ’ 받침은 한자로 ‘질(叱)’ 자로 표현되어 ‘보질(甫叱)’로 적게 된다는 것이다. 이후 ‘보질’이 발음 편의상 ‘보길’이 되었다. 보길도 남서쪽 보옥리 앞에 실제로 보죽산이 있다. 아주 뾰족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보길도를 “둘레가 63리이고 목장이 있다”고 적고 있다. 조선 후기 <호구총서>(1789)에서 대여길항, 소여길항, 부용동, 월송정, 득문리, 중리, 정자리, 황원동, 통리, 선창구미 등 마을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보길도 동북쪽에 위치해 노화도와 해남으로 연결되는 마을이다. 남쪽 해안은 망월봉, 격자봉, 광대봉 등이 급경사를 이루고 계절풍이 심해 사람들이 정착하기 어렵다. 이곳에 마을을 이룬 예송리도 파도와 바람을 막기 위해 울창한 상록수 방풍림을 조성해야 했다.
부용동에 들다
노화도 산양선착장에 배가 닿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차에 올라탔다. 보길도로 가는 사람들이다. 노화읍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 곧바로 청별항이다. 예송리로 갈까, 부용동으로 갈까 잠시 망설였다. 부용동은 보길도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않은 마을이며 고산이 눈을 감은 곳이다. 그곳으로 향했다. 고산의 후손 윤위가 본 부용동의 모습은 이랬다.
“이곳에는 사는 사람들이 적어서 벼랑 위나 암석에 의지하여 수십 호에 지나지 않으나 산새와 들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들리고, 나무 그늘이나 풀 아래 자고 쉬며, 고사리도 따고 상수리와 밤을 줍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돼지나 사슴들과 벗한다.”
낙서재에 서면 아늑하고 포근하며 좌우에 높은 산과 낮은 봉우리들이 부용동을 내려 뻗어 있다. 윤위가 기록한 <보길도지>(1748년)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는 마치 반쯤 핀 연꽃과 같다”고 했다. 부용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산처럼 황원포에서 잠시 멈췄다. 지금은 부황리라 부르지만 옛날에는 ‘환동이’라 불렀다. 한때 ‘황원동’이라고도 했다. <보길도지>에도 “배를 정자 머리 황원포에 댔다. 정자에서 황원포까지는 10리이며, 황원포에서 격자봉 아래까지는 5리 남짓하다”라고 했다.
고산이 세 차례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예순을 넘길 정도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금쇄동이나 부용동처럼 은둔 생활을 할 수 있는 힐링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오우가’,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어부사시사’, ‘몽천요’ 등 훌륭한 문학 작품을 남긴 것도 마찬가지다.
해남 윤씨가는 조선시대 해남 일원의 갯벌을 입안받아 간척하였다. 해남 외에도 진도 굴포, 노화도, 고금도등 도서 지역 간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보길도는 간척 농지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이다. 해남의 본가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육로보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물산을 이동하는 데 편리했다. 도서 지역을 오가며 농지를 관리할 거점으로 보길도는 최적지가 아니었을까. 부용동에도 계곡물에 의존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100여 마지기의 농지가 있었다. 당시 보길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유일한 땅이었다. 양식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보길도에서 육지로 유학을 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갖춘 사람들도 부용동 사람들이었다.
자연과 과학의 만남, 세연정
고산은 부용동에 세연정을 증축하고 석실, 회수당, 무민거, 정성당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보길도에서 유일하게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세연정 주변에 큰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 제법 너른 논과 밭을 일궈 농촌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하염없이 내리던 눈이 잠시 멈춘 듯싶더니 다시 내린다. 붉은 동백꽃 위로 흰 눈이 소담스럽게 쌓였다. 고산도 이곳에서 내리는 눈을 보았겠지.
절해고도 깊은 산속에 신선처럼 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길도는 물론 인근 노화도 주민들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진도 굴포와 고금도에서 소작을 하던 작인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이다. 당쟁과 당파로 현실 정치의 한계를 절감한 고산이 해남에 종택을 두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산이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구전설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해남을 출발하여 제주로 향하던 중 도선은 풍랑이 심해 보길도에 정박했다. 그런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제주로 갈 것 없다, 보길도가 제주에 지지 않은 낙지(樂地)이니 이곳에서 지내라’고 현몽을 하였단다. 이튿날 뱃머리를 돌려 등문(登門)에 배를 대고 10리쯤 골짜기를 올라갔다. 산으로 에워싸인 모습이 부용화가 피어오르는 듯하였을 것이다.
남인 고산과 치열한 예송 논쟁을 했던 서인 대표 송시열과의 인연이 보길도에도 있다. 송시열은 숙종이 장희빈을 통해 얻은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하자 정통성을 문제 삼아 반대하다 제주도로 유배당했다. 험한 뱃길에 보길도 백도리에 머물던 우암은 바위에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글을 썼다. 그 글이 글쓴바위로 전한다.
당시 중앙에서 벌어졌던 정쟁의 흔적은 세연정의 판석보를 둘러싼 설화에도 남아 있다. 판석보는 판자 모양의 돌을 굴뚝처럼 만들어놓은 다리다. 서인들을 피해 부용동에서 지낼 때 밥 짓는 연기를 없애기 위해 판석보로 보내 흩어지게 해 은거지를 위장했다고 전한다.
판석보 건너는 소리를 5리나 떨어진 낙서재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판석보의 본래 기능은 계곡물을 막아 물을 가두어, 논에 물을 대는 인공 못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원리를 이용한 건축과 조경 방식이다.
지난해 볼라벤이 지나가고 한참 후 예송리 상록수림이 불에 탔다는 아픈 소식을 들었다. 마을 숲의 안위가 걱정되어 태풍이 지난 후 섬에 들렀다가 갯돌밭에 밀려온 엄청난 양식 시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간의 욕심에 자연은 이렇게 답을 하는구나 싶었다.
바다는 한층 파랗고 생기발랄하였으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고요했다. 인간의 삶과 자연의 충돌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불은 밀려온 양식 시설에서 시작되었다. 화재의 원인이야 전문가들이 판단할 일이지만 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 ‘인간적’임에 놀랐다. 고산의 지혜가 그리웠다.
INFO.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 동천항에 내려 보길도로 들어가는 셔틀버스(1일 10회 운행, 보길도 청별리까지 요금 1000원)를 이용할 수도 있다.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엔 보길대교가 놓여 있어 건너갈 수 있다. 화흥포항에서 동천항으로 가는 배편(청해진카페리호)은 1일 11회(첫배 7:00, 막배 17:30) 왕복 운항. 약 40분 소요.
운임 어른 6500원, 어린이 33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