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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2]“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경상남도 통영 한산도
[김준의 섬 여행 2]“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경상남도 통영 한산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3.0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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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2월 사진 /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통영] 남해 바다 그 어디 이순신 장군의 족적이 없는 곳이 있으랴만 특별히 한산도는 수군진 본영이 있던 자리이자, 한산대첩으로 역사적 전환점을 이룬 현장인지라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당시를 증언하는 듯 섬엔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차 위에 눈이 쌓였다. 새벽부터 내렸는지 차창에 쌓인 눈은 얼지 않고 미끄러졌다. 고속도로도 평소 속도로 달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눈보라가 앞을 가렸다. 호남고속도로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접어들자 거짓말인 양 눈이 딱 그쳤다. 남해  금산 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도 쌓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참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영은 일찍이 남해안의 작은 포구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의 두룡포에 설치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한때 충무라고 불리기도 했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호를 따왔다. 통영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그러니 통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사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통영에 통제영이 있기 전에 한산도에 진영이 있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충무공의 <한산도가>이다. 물밀듯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을 물러서게 한 섬이 한산도다. 그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해상에서의 패배는 육상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병력과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아야 하는데 통로가 막혔으니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되돌아와야 할 상황이다. 

한산대첩은 전쟁의 향배를 가르는 싸움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모든 전력을 총동원했다. 일본은 육지에서 승승장구한 반면 해전에서 연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을 총동원하여 진격하였다. 조선도 이순신을 필두로 원균 등이 합세하였다.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 

충무김밥과 어묵을 사들고 배에 올랐다. 한산도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곳에는 충무공이 있다. 물이 들고 있었다. 카페리호가 드는 물을 거슬러 섬으로 향하자 주춤주춤 너울이 밀려났다. 

카페리호가 화도를 스치며 죽도로 접어들었다. 죽도는 상죽도와 하죽도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산도 북쪽 염호마을과 북서쪽 문어포마을 사이 포구의 입구에 위치한다. 죽도 북쪽에는 화도와 방화도와 해간도 등 작은 섬들이 통영과 거제 사이의 좁은 해협 견내량에 위치해 있다. 부산에서 집결해 서남해로 진격해오는 왜군과,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조선 수군이 맞닥뜨린 곳이 이곳이다. 충무공의 전술이었다. 

판옥선 몇 척을 파견하여 해간도를 지나 물길이 좁은 견내량에서 배를 돌려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한산도 서남쪽 통영만에 55척의 조선 수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선 73척이 화도 인근까지 추격해왔다. 남서풍이 불고 있었다. 학익진(鶴翼陳)을 펴고 거북선과 총통으로 47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12척을 포획했다. 왜장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70척 중 14척만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또 전투 중 왜병 400여 명이 한산도로 도주했다. 

2013년 2월 사진 /
구불구불한 바닷길과 크고 작은 섬들,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면 뱃길에서 미로에 빠지기 십상이다. 한산대첩의 승리는 충무공의 학익진법과 한산만의 지형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망산에 오르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내륙 쪽 바다를 말한다.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다. 남서쪽에 제승당이 위치한 두억포가 있고 남동쪽에는 고포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 두억포에 삼도수군 본영을 설치했다. 판옥선과 척후선 100여 척과 조선 수군 740여 명이 주둔했다. 주변에 크고 작은 만과 섬들이 곳곳에 있어 지형에 익숙하지 못하면 미로에 빠질 수 있는 지형이다. 한산대첩의 대승은 충무공의 전술과 한산만의 지형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입구는 좁지만 수심이 깊어 지금도 여객선과 멸치잡이 선단을 비롯한 어선들이 많이 오가는 중심 수로다. 

2013년 2월 사진 /
왜적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길을 물었다는 문어개마을. 지금은 문어포마을로 불리며 문어가 많이 잡힌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한산도는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섬이다. 덕분에 주변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 유래가 많다. 화살을 만들었던 대섬, 갑옷을 벗었던 해갑도, 왜적이 길을 물었다는 문어개, 일본 패잔병들이 개미처럼 올랐던 개미목, 왜적의 시체를 묻었던 매외치, 전투 훈련을 하던 진터골, 소금을 굽던 염개, 군수품 창고가 있었던 창동, 진영이 있던 진두, 무기를 만들던 야소, 왜적의 동정을 살피던 망산 등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배에서 내리는데 승무원이 내 자동차 바퀴를 자꾸만 살펴본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아뿔싸, 펑크가 났는지 바람이 빠지고 있었다. 뭍에서야 보험회사에 연락하면 되지만 섬은 서비스가 되지 않는다. 소재지 버스 종점으로 가보면 수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승무원의 말만 믿고 제승당을 뒤로하고 부랴부랴 진두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펑크 수리’라는 간판이 있었다. 그런데 수리할 기사가 버스를 운전하고 있기 때문에 두어 시간 후에 오라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그래서 망산을 오르기로 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문어포마을에 한산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한산도는 등산길이 제승당 부근에서 시작하여 망산을 거쳐 진두마을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나절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할 수 없이 야소마을 뒷길로 시작해서 망산을 거쳐 진두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주민의 이야기로는 두어 시간 걸릴 것이란다. 그럼 넉넉잡고 3시간이면 될 성싶었다. 망산까지는 오르막길이다. 국립공원이라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안내판도 없고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해송 숲이 이어지는 호젓한 산길이다. 수령을 가늠해보니 대부분 임진란 이후에 자란 나무로 보였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무기를 만들었다는 지명 유래가 있는 야소(冶所)마을이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수군진 본영을 한산도로 이전했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4년 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무고로 파직되어 하옥되었고, 백의종군이 시작되었다. 충무공에 이어 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칠천량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원균은 한산도를 불태웠다. 왜군이 식량을 비롯해 근거지로 삼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청야작전(淸野作戰)이라 부른다. 중국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대군에 대항해 고구려가 펼친 방어 전술이다. 이때 한산도의 제승당은 물론 주변 나무들도 모두 불탔을 것이다.

망산에 오르니 남쪽으로 가깝게는 학림도, 용초도, 연대도, 비진도, 멀리 연화도와 욕지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쪽으로는 송도, 좌도, 비산도, 화도 사이로 굽이굽이 윤슬이 반짝였다. 그래, 왜군이 저렇게 복잡한 갯골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망산에 오르니 충무공의 학익진 전술을 제대로 이해할 듯싶었다. 섬과 섬 사이 미로에 빠지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망산에 오르면 한산만과 비진도, 용초도, 매물도, 소매물도, 국도 등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한산도, 호남을 지키다
망산에서 내려와 차부에 들렀다. 그사이 펑크난  타이어가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뭍에서 수리하는 값의 두 배를 치렀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주인이 일러준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까지 먹고 한산도에서 가장 큰 들이 있는 대촌으로 향했다. 그 많은 병력들이 섬에 머무르면 자급할 만한 식량을 만들어낼 땅이 있었을 것이다. 직접 보고 싶었다. 망산에서 남쪽으로 신거, 대촌, 의항리에 이르는 산골이다. 골이 깊어 물도 좋고 두억리와 창좌리 사이 두억천을 사이에 두고 제법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름도 대촌이다. 큰 벌판이라는 의미다. 주민들은 이곳을 누렁이들이라 했다. 한산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개미목마을인 의항리가 위치해 있다. 그 맞은편은 문어포마을이다. 한산대첩비가 있는 곳이다. 한산대첩비에서 내려다보면 제승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망산은 부산과 진해에서 들어오는 왜군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요충지로, 봉화대가 있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충무공은 여수에서 한산도로 수영을 옮기면서 먼 인척인 현덕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竊想湖南國家之保障)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若無湖南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서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하였습니다(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以爲遮海路之計).”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한산대첩비. 적선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섬멸한 대승첩을 기념하여 1979년 문어포 산정에 거북선을 대좌로 건립하였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제승당. 삼도수군통제영 사령부로 한산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제승당에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했던 집무실이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호남은 예나 지금이나 곡창지대다. 조선 수군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요충지였다. 또 왜군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꼭 지켜야 했다. 수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이유였다. 한산대첩비는 우람했다. 막배 시간에 맞춰 제승당으로 옮겼다. 오는 길에 잠깐 염개 갯벌을 훔쳐봤다. 소금을 구웠던 곳이다. 대고포와 소고포 지선이다. 지금은 갯벌 체험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제승당은 한산도 여행의 정점이다. 아마도 내 차가 문제가 생긴 것도 제승당을 마지막으로 보라는 계시였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망산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야소마을과 진두를 그렇게 자세하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수루에 올랐다. 긴 칼은 아니지만 카메라를 들고 견내량을 뚫어져라 살폈다. 적들은 없고 북서풍만 몰아쳤다.

INFO. 가는 길 
통영여객터미널에서 한산도(제승당)로 가는 카페리호가 있다.  
출항 시간 1일 12회 7:00~18:00(1시간 간격 운항),  약 30분 소요
요금 1만50원(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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