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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보이니까, 가는 섬 신안 흑산면 가거도
[김준의 섬 여행] 보이니까, 가는 섬 신안 흑산면 가거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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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신안] 가거도 가는 길은 늘 걱정이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물론 나오고 싶다고 마음대로 나올 수 있는 길도 아니다. 하늘이 열어주어야 가는 길이다. “바람에 올라타면 편하게 나가지만 바람이 돌면 고생 좀 할 것이요.” 새벽같이 일어나 하늘을 쳐다보는 나를 보고 민박집 주인이 일러준 말이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가거도 사람들은 바닷새처럼 벼랑 위에 집을 짓고, 바다에서 미역을 뜯고, 멸치를 잡고, 독실산의 후박나무 껍질에 기대어 살았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누가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일까

가거도는 먼 섬이다. 아주 먼 섬이다. 우리나라 서남쪽 국토 가장자리에 있는 ‘갓섬’이다. 그래서 가거도라 했을까. 그 옛날 ‘아름다운 섬’ 가가도(佳嘉島, 可佳島)로 불리다 ‘가히 살 만한 섬’ 가거도(可居島)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흑산도라 불렸다. 일제가 어업 수탈을 목적으로 대흑산도와 소흑산도를 어업 전진기지로 관리하기 위해 구분한 이름을 지명사전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시인 조태일은 가거도를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는 섬”이라 했다. 그렇지만 “무지렁이들은/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마침내 살 만한 곳”이라고 했다. 가는 길이 힘들어도 섬에 들면 그 괴로움은 까맣게 잊는다. 

조상 대대로 큰 공덕을 베푼 사람이 배에 탔던 모양이다. 목포에서 가거도까지 들어가는 4시간이 넘는 뱃길이 호수처럼 평온했다. 이내 용왕의 아들이 수도 중 선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돌이 되었다는 회룡산(282m)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가거도항과 대리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룡산 정상 선녀대에서 바라본 마을과 포구와 망망대해의 풍광을 가거도 제일경으로 꼽는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가거도의 등대엔 ‘소흑산도 등대’라고 적혀 있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짐을 풀어놓자마자 낚싯배에 올랐다. 가거도 등대, 정확한 명칭으로는 ‘소흑산도 등대’로 가는 길이다. 건물은 1905년에 지었고 1907년 점등을 했다. 처음에는 무인 등대로 시작했지만 통행 선박이 많아지자 1935년 유인 등대로 바뀌었다. 지금은 목포지방해양항만청에서 관리하는 ‘소흑산도 항로표지관리소’이다. 배를 정박하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등탑이 보일 무렵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동백나무와 보리수나무 아래 흙더미에 섞인 작은 조개껍데기에 눈을 맞추었다. 조개무지였다. 가거도에선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다양한 종류의 토기와 뼈로 만든 도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장보고 선단이 한·중·일 중개무역을 하면서 쉬어가던 곳이라는 소문도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세대로는 1800년경 나주임씨가 처음 입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지도서>나 <호구총서>에 30여 호가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등대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야 먼 바다까지 불을 밝힐 수 있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지만 전망이 아주 좋다. 소흑산도 등대에서 바라보면 바다제비와 슴새들의 천국인 국흘도와 개린도 등 무인도와 서해의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해가 늦게 지는 곳이다. 일몰이 장관이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대풍리는 가거도에서도 가장 교통이 불편한 마을이다. 이 마을 이장 고승호 씨는 자나 깨나 대리와 길을 연결하는 일에 고심하고 있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절벽 위에 집을 짓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제법 거세졌다. 배 안이 술렁거렸다. 선장도 그만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대풍리 고승호(1951년생) 이장은 기어코 일행을 마을까지 데려 가고 싶어했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소흑산도 등대에서 대풍리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등대에서 마을까지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어져 있다. 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바닷새들이 절벽에 둥우리를 틀고 알을 낳는다고 했던가. 가거도는 대리마을을 제외하고 대풍리와 항리 모두 절벽 위에 마을이 있다. 항리는 대리와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있어 그래도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대풍리는 사람이 걸어 들어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가거도항에서 내려 다시 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또 선창에서 마을까지는 경사가 급해 ‘미니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한다. “목포에서 5000원에 쾌속선을 5시간 타고 왔는데, 같은 섬에 있는 마을을 잠깐 이동하는데 10여만원을 주고 다녀야 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이장의 넋두리다. 날이 좋지 않은 날엔 그나마 배도 이용할 수 없다. 얼마 전에도 아픈 노인을 제때 병원으로 옮기지 못해 기어이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고 이장이 자나 깨나 대풍리와 대리를 잇는 도로에 빠져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70년대 중반 군에서 제대한 후 취직 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에서 발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대리마을에서 회의를 마친 선친과 마을 임원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다 마을 앞 ‘빈주앞절벽’에서 높은 파도에 휩쓸렸다. 선친을 비롯해 7명의 주민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이런 아픔 때문에 고향이 싫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그 아픔도 그리웠다.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고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세 번이나 짐을 쌌다. 고 이장은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소흑산도 등대로 가는 선창 앞에는 바다제비와 슴새들의 천국인 무인도가 있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산이 있어 머물렀다
오후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다음 날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다. 비옷을 챙겨 입고 항리로 향했다. 산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가거도의 최고봉은 독실산(639m)이다. 전라도에서는 돌을 ‘독’이라 한다. 독이 실하지 않고 어떻게 수천  년을 망망대해 거친 파도에 섬으로 남아 있겠는가. 신안군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연중 안개에 싸여 있는 날이 대부분이다. 후박나무가 잘 자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원시림 그대로다. 대리에서 삿갓재까지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삿갓재에 오르면 독실산 7부 능선은 오른 셈이다. 이름만큼이나 급경사라 길에 익숙한 민박집 주인 트럭도 구불구불한 길을 힘들게 올랐다. 길 좌우로 밑동이 잘려 있는 후박나무 끌텅 옆으로 가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항리까지 걷는 길은 힘들었다. 서쪽으로 펼쳐지는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길이 시멘트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멀리 ‘갓여’가 모습을 보였다. 갓여는 우리나라 주권이 미치는 바다의 범위인 영해의 기준선이다. 저 너머가 중국이다.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할 정도로 지척이다. 

외딴 섬마을에 높은 양반들이 찾아들었다. 객선도 닿지 않고 섬사람들도 들고 나는 일이 거의 없는 겨울 초입에 무슨 선물을 들고 왔을까.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바다가 있어 먹고살았다
독실산과 바다가 만나는 갯가에는 미역, 톳, 김, 가사리 등 온갖 해초와 소라, 전복이 자란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해 영양염류와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게다가 산호초와 감태도 바다 숲을 이루고 있다. 산이 높고 바다가 깊어 바닷물이 용솟음치니 이곳이 바로 고기들의 천국이다. 멸치가 많으니 조기, 갈치, 다랑어, 돔 등 온갖 고기들이 모여든다.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240km 떨어진 절해고도라지만 섬에는 사람이 살 만하고 바다에는 고기가 살 만하다. 그래서 가거도라 했나 싶다. 특히 가거도는 멸치잡이로 유명했다. 이곳 멸치잡이 어법을 주민들은 ‘챗배’라고 하며 수산업법에서는 ‘분기초망’이라 한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가거도 해역은 조기들이 월동하는 해역이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횃불을 들고 멸치를 옴팡진 ‘갯창’으로 유인한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뱃전을 두들기며 멸치를 갯창으로 몰아넣어 그물로 떠 올리는 어법이다. 챗배 한 척에 10여 가구가 먹고살았다. 섬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잡는 멸치잡이는 ‘가거도 멸치잡이 놀이’라는 어업요로 남아 있다. 이 놀이는 멸치어장으로 가면서 부르는 놋소리, 멸치를 모는 소리, 그물에 넣는 소리, 잡은 멸치를 퍼 올리는 술비소리, 그물 올리는 소리, 귀향하면서 부르는 배 젓는 소리, 만선 귀향을 알리는 풍장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잡은 멸치로 젓을 담고 액젓을 만들어 목포 상회에 팔았다. 멸치가 식량이 되고 돈이 되었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가거도 최고의 절경은 테왁과 망사리를 들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잠녀들의 모습이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내가 꼽는 가거도의 절경은 미역을 뜯기 위해 테왁과 망사리를 들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해녀의 모습이다. 후박나무가 아이들 학교 밑천이었다면 미역은 목숨 줄이었다. 거친 파도를 견디며 자란 미역은 꼭 가거도 사람들을 닮았다. 갯바위에는 미역 외에도 톳, 김, 우뭇가사리, 풀가사리가 자란다. 일제강점기에도 주민들이 우뭇가사리나 풀가사리를 채취해놓으면 일본에서 공업용이나 건축용 원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상인들이 높은 값에 사갔다. 해초를 뜯는 갯바위를 ‘똠’이라 한다. 대리는 2개 똠, 항리와 대풍리는 각각 1개의 똠을 운영했다. 각 똠별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미역과 톳 등 해초를 채취하고 똑같이 나누었다. 지금은 공동 채취 관행이 사라졌다.

2013년 2월 사진 / 김준 작가
가랑비 속에서도 날이 새도록 그물에서 조기를 뜯는 일이 계속되었다. 2013년 1월 사진 / 김준 작가

목포로 나오는 쾌속선을 기다리다 조기를 따던 한 주민의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우리가 중국의 13억 인구를 코앞에서 상대한 애국자가 아니오.”

INFO. 가는 길 
목포연안여객터미널과 가거도를 오가는 배편이 하루 1회 왕복 운항된다. 목포항 8:10발, 가거도항 13:00발. 편도 약 4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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