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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마을 기행] 전북 임실 박사골 엿마을 부모는 엿 쭉쭉 늘이고, 자식은 대학에 척척 붙고!
[마을 기행] 전북 임실 박사골 엿마을 부모는 엿 쭉쭉 늘이고, 자식은 대학에 척척 붙고!
  • 최혜진 기자
  • 승인 2010.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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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어 바삭하게 씹히는 박사골 쌀엿. 사진 / 최혜진 기자

[여행스케치 = 임실] 오랜 기간 엿을 만들어온 마을에서 무려 143명의 박사를 배출했다니, 정말 이 마을 사람들은 엿을 많이 먹어 시험에 척척 붙은 것일까? 명실공히 ‘합격의 상징’인 엿과 ‘지성의 정점’인 박사, 그 둘의 내밀한 관계를 캐러 임실 삼계면으로 향했다. 

오수역에서 30분쯤 달렸을까. 택시기사가 “여기가 박사골이에요”하며 손님을 내려준다. 차에서 내려 대면한 마을의 첫인상은 포근했다. 낮은 능선으로 잔물결을 이루는 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고, 마을 구석구석까지 하얀 눈이 쌓인 덕분에 시린 날씨에도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다. 마을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곳에 온 이유를 되새겨본다. 세심리라는 이름보다 ‘박사골 엿마을’로 더 자주 불리는 마을. 이름만 들어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듯 이 마을에는 자랑할 만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한 개 면에서 최다 박사 배출이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전통 엿으로 일군 중소기업 부럽지 않은 매출. 그 둘 사이에 어떤 내밀한 연관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육박사 가옥 이곳저곳에는 이처럼 선조들의 한시가 쓰여 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높이가 고만고만한 산들로 둘러싸인 박사골 마을. ‘악산’이 없어 풍수지리 상으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될 지형이란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의문을 품고 ‘육박사 가옥’으로 향했다. 마을에서도 전설로 불리는, 무려 여섯 명의 박사를 배출한 집이란다. 마을 주민들이 알려준 대로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따라 들어가 소박한 가옥 앞에 섰다.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허름한 오막살이집이 과객을 맞이한다. 이 집에서 배출한 박사들은 객지로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노철환 씨만이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특별한 비법이 어디 있을라고? 그저 울 형제들은 밤이나 낮이나 열심히 공부한 거뿐이 업제.”

마을의 향교 역할을 했던 광제정. 사진 / 최혜진 기자

수능 수석자 인터뷰에서 숱하게 들어왔던 ‘교과서 위주로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하는 너무나 식상한 답이나 다를 게 없다. 그저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한 것이 이유란다.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박사 나는 마을에서 뭐 그리 대수도 아니라는 식이다. 그런데 가옥 안을 찬찬히 훑어보다 보니 그 ‘열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대문은 물론 가옥 여기저기에 한시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조선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정보의 시다. 얇은 붓으로 써내려간 반듯한 글씨는 분명 이 집에 살던 누군가의 것이었다. 허공을 바라볼 때나 혹은 화장실에 갈 때도 멍하니 있는 시간이 아까워 한시를 가슴으로 새겼던 모양이다. 찰나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광제정 가운데에는 온돌방이 있다. 추운 날씨에도 학문의 열정을 불태웠다는 증거. 사진 / 최혜진 기자

“여기 박사골 박사들은 공부해서 저 혼자 잘살려고 했던 게 아녀. 꾸준히 길을 내주고 끌어줘서 후학들 양성하는 데도 보탬이 된 것이지. 뭐든 더불어 살아야 배운 가치가 있는 거 아니겄어?” 
박사가 많이 난 박사골에서 또다시 박사가 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은 이들이 후학들을 위해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란다. 또한 이것은 어느 순간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예부터 내려온 ‘선비정신’에 뿌리를 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마을의 근간을 이룬 그 선비정신을 확인하려면 ‘광제정’으로 가보란다. 

곧바로 광제정으로 향했다. 세심천을 앞에 둔 나지막한 언덕 위를 오르자 한옥 한 채가 홀연히 서 있다. 이곳은 이른바 향교 같은 역할을 하던, 조선시대의 배움과 익힘의 공간이었다. 신기한 것은 한옥 한가운데 온돌방이 내어져 있다는 점이다. 추운 날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선비들의 열정이 엿보인다. 

실제로 이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학문의 열기로 들끓던 곳이었다. 조선 중엽 여러 성씨를 가진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학문에 열중한 것은 물론이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육박사 가옥. 사진 / 최혜진 기자

선비들은 이곳의 풍수지리를 높이 사기도 했다. 소위 ‘악산’이라 불리는 높은 산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좋은 기운이 막힘 없이 흘러들며 학자가 많이 배출되는 지형이라는 것. 이는 현대에 이르러 산골마을임에도 외부와 원활한 소통으로 마을이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비옥한 땅에는 좋은 쌀이 풍족했고, 그 쌀은 맛있는 엿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재료가 되었다. 

이제 말로만 듣던 엿 만드는 곳으로 가볼 참이다. 그런데 엿마을이라고 하여 언제 어느 집에서건 엿을 만들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개인이 하기에 힘에 부치는 작업이다 보니 품앗이를 하듯 장소를 바꿔가면서 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단다. 이 사실을 외지인이 알 리가 없었던 데다 엿 만들기에 참여하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니어서 “오늘 이 집서 하나, 저 집서 하나” 주민마저 오락가락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연방 헤매다가 박사골 권역 위원장 오흥섭 씨에게 도움을 청해 엿 만드는 곳을 알아냈다. 

마을회관 뒤편의 한 집에서 오늘 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10명 남짓한 아낙들이 모여 엿 만들기가 한창이다. 초벌 과정을 거친 엿을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놓아두니 딱딱하던 것이 말랑해졌다.  

완성된 엿을 방에서 넘겨주면 마루에서 구멍을 통해 받는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쭉쭉 늘이고 모으고 “엿은 이렇게 만드는 거랑께!” 사진 / 최혜진 기자

“엿을 늘이는 것도 힘들지만 초벌 과정도 만만치가 않어. 쌀을 4시간 이상 불려 갖고, 시루에 넣고 2~3시간 정도 찌면 고슬고슬한 밥이 뎌. 여기에 엿기름을 넣어서 12시간  삭혀서 식혜를 만들고, 베보자기에 붓고 액만 짜서 다시 솥에 7~8시간 정도 고아불어. 그라면 이렇게 갈색의 끈끈한 액이 된당께. 이때 생강을 넣으면 엿이 더 향긋허고.”
이윽고 아낙들은 마주앉아 엿을 쭉쭉 늘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손놀림은 마치 ‘진기명기 마술쇼’를 보는 듯 현란하다. 수차례 늘이다 보니 갈색 엿은 본래의 쌀처럼 흰색으로 돌아온다. 
 
“자, 지금부터 엿에 바람 좀 넣어보장께!” 
경쾌한 외침과 함께 다시 신들린 엿 늘이기가 시작된다. 다시 쭉쭉 늘이고 모으고, 늘이고 모으기의 반복. 아까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지금 엿 안에 공기가 들고 있는 것이란다. 엿을 납작한 모양으로 늘였다가 다시 둥글게 마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엿 중앙에 공기구멍이 생긴다는 것. 아무리 보고 있어도 나 같은 문외한은 도무지 따라 할 수 없는 경지다. 이것이 다른 마을에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박사골 엿만의 비밀이란다. 

굳어진 엿을 먹기 좋은 크기로 똑똑 끊는다. 사진 / 최혜진 기자

박사골 엿이 맛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엿을 늘일 때에는 습도가 높고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다가, 굳힐 때는 온도가 낮고 건조한 기온을 ‘기가 막히게’ 맞추기 때문이다. 방에서는 보일러 온도를 높여놓고 물을 끓여 그 수증기로 엿을 늘인 후에, 곧바로 기온이 낮은 마루로 옮겨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박사골은 집집마다 방과 마루 사이의 벽에 구멍이 뚫려 있다. 후끈한 방에서 완성된 엿은 이 구멍을 통해 차가운 마루로 나가면서 순식간에 식는다. 이때 바깥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낙들이 엿을 받아서 길게 늘어진 엿을 알맞은 크기로 똑똑 끊는다.

이 과정을 거친 엿은 중간에 뚫린 공기구멍 덕에 맛이 사글사글하다. 입 안에서 ‘바삭’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맛이 좋다. 이 바삭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겨울에만박사골은 엿을 만든다. 더구나 일체의 물엿이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입 안에 기분 나쁜 단맛이 남지 않는다. 씹을수록 향긋한 생강 향이 느껴진다. 

또한 맛도 맛이지만 영양도 좋다. 질 좋은 쌀을 삭히고 고아 만든 엿은 소화를 돕고 천식을 해소하는 작용을 한다. 특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적당한 당분이 필요한데, 잔뜩 설탕이 들어간 사탕이나 과자보다는 전통 쌀엿이 훨씬 이로울 터. 입시철 학생들에게 엿을 선물하는 문화 속엔 엿처럼 철썩 붙으라는 것도 있지만 몸에 이로운 당분을 적절히 공급하라는 뜻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박사와 엿과의 관계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란 생각도 든다. 

콩고물을 듬뿍 묻혀 비닐에 싸놓아야 엿이 녹지 않고 사글사글한 맛이 유지된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이처럼 달콤하고 영양 좋은 엿을 먹기 위해 그 옛날 짤강대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에 아이들은 빈병이나 고철을 찾느라 부산을 떨었나보다. 멀쩡한 고무신을 엿과 바꿔 먹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도 엿 맛은 달디달았다. 

고려 중기 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을 보면 엿은 고려 초기 이전부터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삼계면에서도 집집마다 한과와 엿을 만드는 법이 근근이 이어져 내려져오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새마을운동 이후였다. 당시 부녀회장 윤순호 씨가 엿 만드는 기술을 마을 아낙들에게 알렸고, 그때 ‘엿 기술’을 익힌 이들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엿을 고았다(요즘에도 엿 작업은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엿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번졌다. 또한 일찍부터 마을 정보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인터넷 상거래가 원활해져서 이제는 ‘한 해 마을 매출 40억’이라는 웬만한 중소기업 못지않은 성과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완성된 엿이 정성스레 보자기에 싸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완성된 엿이 정성스레 보자기에 싸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일명 ‘손잡이용’ 엿을 계속 집어 먹었더니 아낙들이 “이 아가씨 여기 있는 엿을 아주 거덜내불어” 하면서도 가는 길에 먹으라며 봉지에 엿을 한 아름 싸주신다. 그것만으로 고마운데 결국 모양 없는 엿을 싸준 게 마음에 걸렸는지 기어코 번듯한 상자에 담긴 엿을 쥐어주신다. 

박사골을 나서는 길, 마을사람들이 정성스레 싸준 엿이 양손에 묵직하다. 100명이 넘는 박사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엿도, 더불어 사는 이치를 알았던 넉넉한 마을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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