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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낭만 여행] 여백이 그리울 땐 간이역으로…
[낭만 여행] 여백이 그리울 땐 간이역으로…
  • 최혜진 기자
  • 승인 2010.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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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가은선의 종착역인 문경 가은역. 지붕 모양이 주변의 산세와 닮아서 더욱 포근한 느낌이 든다. 사진 / 

[여행스케치 = 간이역] 이제는 기차조차 서지 않는 쓸쓸한 간이역에는 아련한 추억과 삶의 풍경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고즈넉한 시골마을의 간이역을 찾아가는 여정은 숨가쁘게 질주하던 삶을 돌아보는 ‘쉼표’와도 같다. 

쓸쓸한 간이역, 그리운 간이역 
역장이 없는 역, 간이역.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시큰해진다. 자갈 사이로 외롭게 뻗은 철로, 플랫폼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나무 의자, 시계 소리만 울려 퍼지는 인적 없는 대합실, 고즈넉한 시골마을과 어우러진 소박한 역사…. 이렇게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간이역은 한때 설렌 가슴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시작점이기도 했고, 객지와 고향을 이어주는 연결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속도가 경쟁력인 시대, 더 이상 열차의 속도를 늦추는 간이역은 반가운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2000년 이후에 무려 50여 개의 간이역이 문을 닫았고, 300여 개의 역이 계속된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열차가 빨라진 속도와 비례해서 간이역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S라인 철길이 인상적인 울산 서생역. 사진 / 최혜진 기자

서울에 마지막 남은 간이역인 화랑대역도 경춘선 폐선과 함께 1년 후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청량리에서 남양주로 넘어가는 지점의 화랑대역은 1939년 문을 연 뒤에 70년이나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내년 이맘때 쯤에는 그나마 하루 20여 명 남짓한 승객들의 발길마저 끊기고 더 이상 역에서 내리는 이도, 기차를 타는 이도 없을 것이다. 

화랑대역에 추억 한두 개쯤 묻어둔 지역 주민과 철도동호회원들은 지난 12월 역사 마당 한편에서 조촐한 문화행사를 열었다. 화롯불을 피우고 시를 읊으며 그 시절 간이역을 추억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들은 쇠락한 역 앞에서 간이역이 실로 아름답다고 이야기했다. 간이역사가 특별히 예술성이나 심미성면에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선로 주변을 따라 이어진 3km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과 눈 쌓인 소박한 풍경에는 서울에서 찾기 힘든 ‘여백의 미’가 있다. 

작은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원주 반곡역. 사진 / 최혜진 기자

<간이역 여행>의 저자 임병국 씨는 “간이역에 가면 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고독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한가로움, 여유로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며 “간이역은 지금 당장 원하는 무언가가 없을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크게 기억되고 언젠가 그리워질 마음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낯선 정거장에서 기다리네>를 쓴 소설가 박원식 씨는 “시골 간이역에 서면 굼벵이들이 탐닉할 갖가지 성찬이 차려져 있다. 태연한 퇴락, 무참한 적막감, 태평한 방심, 쓸쓸한 독거, 은은한 서정, 바로 이런 것들이 간이역의 식탁을 이룬다”며 정겨운 간이역 여행으로 안내한다. 산골짜기에 수줍은 듯 서있는 간이역에서 기차처럼 숨가쁘게 질주하던 삶의 여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정겨운 풍경을 찾아가는 간이역 여행
간이역은 고즈넉한 시골마을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특히 치악산의 고도 300~400m 위에 자리한 ‘깊은 산 속’ 반곡역은 어수룩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역이다. <한국의 간이역>의 저자 임석재 씨는 “반곡역은 건물 밑동이나 기둥, 지붕에서 단순하면서도 건강한 한국다움이 느껴진다. 마치 화장기 없는 부스스한 시골처녀를 보는 듯하다”고 말한다. 

선장역은 노쇠한 선로를 따라 이어진 가로수 길의 풍경이 일품이다. 사진 / 최혜진 기자

반곡역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중앙선 복선화로 인해 곧 문을 닫게 된 역사를 방치하지 않고 작은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대기실을 작은 갤러리로 만들고, 역사 옆의 소공원에 철도 조각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로써 역 안에는 일제 강점기의 중앙선 철도 건설 사진 자료 120점을 비롯해 지역 작가들이 작업한 한국화, 조각, 유화, 설치미술 등이 전시되었다. 기능을 잃게 된 간이역이 지역 주민의 노력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사진작가들의 단골 촬영지로 꼽히는 간이역도 있다. 철도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른바 ‘간이역의 3대 비경’으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옛 장항선 선장역, 동해 남부선 서생역, 옛 군산선 임피역이 그곳이다. 

서울에 마지막 남은 간이역인 화랑대역. 사진 / 최혜진 기자

도고온천, 홍성 광천토굴 등 충청도의 관광지와 가까운 선장역은 노쇠한 선로를 따라 이어진 가로수 길이 인상적이다. 가로수 밖으로 아득하게 펼쳐진 들판의 고즈넉함도 일품이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S라인’ 철길로 유명한 서생역은 사진 공모전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역이다. 더불어 버스정류장을 닮은 아기자기한 대합실도 눈길을 끈다. 임피역 주변에는 농협창고, 불조심 표어, 신생이용소 등 정겨운 풍경이 남아 있어 마치 30년 전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하다. 역 그대로의 풍경을 드라마 세트장으로 써도 될 정도다. 

일제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 임피역.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모두 털어낸 듯 정겨운 풍경이다. 사진 / 최혜진 기자

이 밖에도 중앙선의 승문역은 한때 외양간으로 바뀌어 사용된 특이한 전력을 갖고 있다. 지금은 역 주변에 마련된 ‘철도별장’이 볼거리다. 철도를 사랑하는 권재익 할아버지가 가파른 산과 철길 사이에 별장을 지었는데, 별장 앞 돌계단 아래로 흐르는 서천의 경치가 압권이다. 

또한 매년 간이역 예술제를 여는 평촌역과 철도박물관으로 변신한 주평역도 간이역의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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