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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명승, 그곳에 쉼이 있다 ③] “여기가 세상에서 이르는 청학동인가” 쌍계사에서 불일폭포 가는 길
[명승, 그곳에 쉼이 있다 ③] “여기가 세상에서 이르는 청학동인가” 쌍계사에서 불일폭포 가는 길
  • 신정일 문화사학자ㆍ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 승인 2020.10.16 10: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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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이 말하는 명승, '가보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라'
천년의 세월을 감싸고 있는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60m 아래로 떨어지는 우렁찬 폭포 소리, 불일폭포
불일폭포로 가는 길의 풍경.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여행스케치=하동] ‘등잔 맡이 어둡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곁에 있어도 모르는 보물이 문화재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는 보물·보석보다 빛나는 명승(名勝)을 찾아 길을 나선다.

“여러 유명한 노(老) 선생들은 거의 모두 몸소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이 된다. 그러한 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둑을 벌여 놓은 것처럼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말한 명승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조선 영조ㆍ정조 때의 문신이었던 채제공은 <번암집>에서 명승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명승도 내가 가지 않으면 명승이 아니다. “가보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라”는 풍수지리학의 명제를 되새기며, 첫 번째 떠나는 여정이 민족의 성산 지리산의 품에 안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다.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탑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쌍계사 마애불.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석문.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교류되던 화개장터에서 맑디맑은 화개천 물길을 따라 4km를 거슬러 올라가면 쌍계사에 이른다.

청파 이륙은 <지리산 유산기>에서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이 있고,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쌍계사와 칠불암을 비롯해 몇몇만 남았을 뿐이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10리 벚꽃길이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절 초입에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바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雙磎)’, ‘석문(石門)’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환학대’라는 바위에서 신라 때의 문장가인 최치원 선생이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쌍계사.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쌍계사를 창건했다. 삼법은 당나라에 있을 때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머리)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어 인조 10년(1632) 벽암 스님이 중건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감싸고 있는 진감선사탑비
이 절도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하나씩 다시 세운 것인데,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탑비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에 속하는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당왕 2년(887)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3.63m, 폭이 1m인 검은 대리석 비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 적힌 이 글은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모든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한국 전쟁 당시 총알에 맞은 자국이 여기저기 뚫려 있어 옆구리에 쇠판을 대고 있다. 

하동 국사암 부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국사암 문수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삼거리 이정표.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쌍계사를 지나 조금 올라가 좌측으로 난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면 만나는 절이 국사암이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진감혜소(眞鑑慧沼)가 보월암을 창건(840)하였다. 민애왕이 그의 높은 공덕을 기려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민애왕은 그를 스승으로 봉하여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하였고 그가 머물던 암자를 국사암(國師庵)이라 칭했다. 그가 머무를 당시 땅에 꽂았던 지팡이가 자라서 천년의 세월을 푸르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되었고 다시 쌍계사 쪽으로 가는 길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 펼쳐진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을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람이 걸었다. 김종직의 제자로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인 <무오사화>의 주인공 김일손이 정여창과 함께 지리산 기행에 나섰다. 열엿새 동안의 <두류산기행> 중 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 부근을 지나던 때의 일부분을 보자.

“28일 병진, 쌍계사의 동쪽으로 향하여 다시 지팡이를 짚으며 바위를 더위잡으면서 가파른 바위 증대와 위태로운 잔도로 두어 마장 가니 좀 널찍하고 펀펀한, 농경지로 될 만한 곳이 있었다. 여기가 세상에서 이르는 청학동(靑鶴洞)이라 한다. (중략) 등구사(登龜寺)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전후 16일 동안 구경한 것으로, 수 없는 봉우리들이 저마다 빼어나고, 계곡마다 시내들이 다투어 흘러내려 아름다운 것, 희한한 것을 하나둘로 셀 수 없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불일암’ 하나뿐이었다. 또 학의 이야기를 들이니 혹시 미수가 찾던 청학동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60m 아래로 떨어지는 우렁찬 폭포 소리, 불일폭포
길은 고적하고 아련하다.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조선 중기에 지리산 자락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남명 조식(曹植)이다. 그는 이 길을 걸으며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숲속의 바위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와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 가버린 그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지리산이거나 또 어느 산이거나 명승지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새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고 깨달아야 할 지침이 아닐까? 

남명 조식이 글을 남긴 곳.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불일평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불일 탐방지원 센터.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불일암,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불일평전을 유토피아와 같이 ’없다‘라는 의미를 지닌 ’청학‘이 산다는 청학동이라고 이름 지은 김일손의 자취가 서린 불일평전은 제법 넓다. 평전을 지나자 삼불재로 가는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가파른 길을 지나자 불알암이다.

사람은 없고, 절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불알암에서 조금 더 나아가자 들리는 폭포 소리, 불일폭포가 지척이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 폭포 부근에서 수행하다가 입적하신 뒤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려서 그 뒤 이곳을 불일폭포라고 하고 불일암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불일폭포는 가열하게 떨어진다.

우렁찬 소리로 떨어지는 불일폭포.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옛사람이 그린 불일폭포.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움도 없이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 시인이 절규하듯 쏟아냈던 <폭포>의 몇 소절이 떠오르는 불일폭포, 60여 m가 넘는 낙차를 우렁찬 소리를 내며 두려움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에서 다시금 지리산을 생각한다.

“깨달은 사람은 들어올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들어오지 못한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올라가고, 알맞게 들어온 사람은 흉하고, 늦게 온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 

지리산에 사는 여느 도인의 말과 같이 알아도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리산은 우리 역사 속에서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한국적인 산이다. 그 너르고 깊은 산 중에 숨은 보석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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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 2020-10-21 19:57:20
여행스케치 11월호 p.28~29 쪽 사진은 쌍계사가 아닌데 기사내용과 상관없이 사용한 것인지 잘못 사용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여나 쌍계사 측에서 보면 서운할 일이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문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