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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7월호
[옛 지도 따라 옛길 걷기 ③] 조선 시대의 옛길 영남대로 역사 속에 묻힌 길, 다시 걸으며 살려야 하는 길
[옛 지도 따라 옛길 걷기 ③] 조선 시대의 옛길 영남대로 역사 속에 묻힌 길, 다시 걸으며 살려야 하는 길
  • 신정일 문화사학자ㆍ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 승인 2020.11.11 09: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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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문경새재.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아름다운 문경새재.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여행스케치=충주] 조선 시대 옛사람들이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대구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고 충주, 용인을 지나 달이내 고개를 넘어 서울로 가는 열나흘 길 영남대로가 있었고, 영천과 안동을 지나 죽령을 넘어 서울로 가던 열닷새 길을 영남좌로(嶺南左路)로 불렀다.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서 가던 길은 열엿새 길은 영남우로(嶺南右路)였다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은 죽령(竹嶺)과 추풍령(秋風嶺)은 넘지를 않았다.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이었고 추풍령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들이 넘었던 고개는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聞慶)의 새재(鳥嶺)였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큰길이었다.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큰길이었다.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영남대로의 고갯길 새재 넘어 수안보 온천

나라 안에 이름난 고개인 문경새재를 넘으면 소조령을 지나 안부역(安富驛)에 이른다. 조선 후기에 엮은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 ‘역원’조를 보면 이곳이 관리들에게 말을 빌려주고 관리하던 역원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안부역이 있었던 안보리에서 수안보로 가는 옛길을 따라가는 도중에 제주도 유배를 갔던 곳에서 만난 홍윤애와 영화 같은 사랑을 했던 충청감사 조정철의 묘가 있고, 다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수안보에 이른다.
수안보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가보았을 온천이다. 이 수안보 온천은 누가 최초로 발견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충청도 충주 안부역(安富驛) 큰길 가에 온천이 있는데, 샘물이 미지근하고 별로 뜨겁지 않다”
조선 전기의 문장가인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린 기록을 보면 그 이전부터 온천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는 수안보 온천에 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약 200여 년 전의 일이다. 현재의 온천지대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을 때, 피부병을 앓고 있던 한 거지가 이 근처의 볏짚 속에 살면서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온천수를 발견했다고 한다. 거지가 그 온수를 항상 먹고 씻고 하더니 드디어 병이 완쾌가 되었고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시설이 없이 우물을 파서 목욕을 하다가 1885년에 비로소 소규모의 남녀 목욕장이 판자로 만들어졌고, 1931년에야 근대식 목욕탕이 들어섰다. 1963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종래의 120m의 광천(鑛泉)을 195m로 더 파서 섭씨 42도의 온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 온천은 단순 유황 온천으로 모든 피부와 위장질환에 좋다고 한다.


수안보는 서울과 대구의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영남대로를 걷는 나그네들이 조령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남은 여정을 위한 활력을 얻었던 곳이다. 영남대로 상에서 가장 중요한 휴식처라 할 수 있는 이곳 수안보에 사람들이 쉬어가던 온정원이 있었다.
하지만 나라 안에서 제일 이름났던 온천지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던 수안보도 그 명성을 잃은 지 오래다.

살미면에서 볼 수 있는 사과탑.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살미면에서 볼 수 있는 사과탑.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옛 글이 극찬한 수회리의 아름다운 풍경
길은 수안보면 수회리에 이른다. 냇물이 마을을 돌아서 흐르기 때문에 ‘무두리’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 지도에는 이곳이 ‘수회장’으로 적혀 있고, 5일마다 장이 섰다고 한다.
수안보에서 수회리로 가는 국도 위편으로 고즈넉한 영남대로 옛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끼 얹은 돌들이 가지런히 길을 표시하고 그 안에 박석이 깔린 길이 옛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길가의 나무숲이 울창한 가운데, 길의 중간쯤에서 연풍 현감을 지낸 서유돈의 선정비가 남아 그 당시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이 비는 길이가 73~132cm에 너비 99~142cm 정도 되는 화강암을 평평하게 깎아내어 글자를 새겼다.
서유돈은 3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풍현감을 지내고 39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비는 1798년 그가 사망한 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돈 선정비가 위치한 수회리는 1476년(성종 7) 이후 연풍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충주목과의 현계(縣界)에 해당되는 곳이다. 서유돈 선정비를 현청(縣廳)이 있던 연풍향교 앞에 건립하지 않고 충주목과의 경계에 건립했는지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이곳에 건립했을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연풍 현감을 지냈던 서유돈 선정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연풍 현감을 지냈던 서유돈 선정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서유돈의 비 옆에 마당처럼 넓은 바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서유돈의 비 옆에 마당처럼 넓은 바위.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서유돈의 비 옆에 펼쳐진 마당바위에서 조선시대의 문장가인 이행은 <자연대설(自然臺說>이라는 한편의 아름다운 글을 지었다. <용재집>에 실린 이 글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연풍에서 동북쪽으로 수회리(水回里)라는 마을이 있으니, 좌우로 오직 큰 산이다. 좌측 봉우리는 산기슭이 완만히 뻗어서 우측으로 돌아서는 깎아지른 벼랑이 되어 물 쪽 시냇물 속으로 빠져들고 시냇물은 콸콸 흘러서 벼랑을 따라서 휘감아 도니 이 마을의 이름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 벼랑도 모두 삼면이 바위이고 높이는 100여 척이며, 위는 평평하고 넓어서 백여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으며,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 그 그늘이 짙다.

동행한 산수(山水)의 벗 홍자청(洪子淸)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자연대(自然臺)라고 명명하였다. 지청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글자를 새긴 다음 먹으로 채우겠으니 그 설(說)을 지어 주십시오”하기에 내가, “산이 우뚝함도 자연이요, 물이 흘러감도 자연이요, 벼랑이 산수의 형세를 점거하여 독차지하고 있음도 자연이요, 오늘 우리가 이곳을 만난 것도 자연이요, 내가 그 자연스러움을 따라서 자연이라 한 것 또한 자연이라 할 것이다. 이에 ‘자연대‘로 삼노라”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이 길을 지나던 조선 전기의 문신 이언적(李彦迪, 1491∼1553)도 <수회촌(水回村)>이라는 글 한 편을 남겼다.

수회촌 바위 위에 몇 그루의 소나무가
맑은 그늘 드리우고 나그네를 기다리네.
나 저곳에 올라가서 신선이 된 것처럼
거만하게 그 아래로 세상길을 보고파라
안타깝게 뜻 있어도 실현할 수 없으니.

마음은 하늘 날고 몸은 땅에 있구나.
말발굽을 울리면서 험한 산길 가노라니
흐르는 개울 소리 귀를 맑게 하는구나.
길 양쪽엔 천 길 넘는 절벽이 우뚝한데
붉게 물든 나무에서 간간이 매미 우네.

영남대로 옛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영남대로 옛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달천을 만나 북으로 서울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마당바위를 지난 여정은 삼거리를 지나 살미면 소재지인 설운1리에 접어든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사이로 하늘이 무척이나 푸르다. 이 마을 아래쪽의 하설운 마을 서남쪽에는 점촌 또는 점말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 사기점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승이 있었다는 장승배기 터와 선운리에서 신매리 매남 마을로 넘어 가는 ‘매내미재’를 지나 세성리에 접어든다. ‘새 술막’또는 ‘신주막’이라 부르는 이 마을은 큰 길이 생기면서 새로 주막이 들어서게 되어 지어진 이름이며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이곳에 마방이 있었다고도 한다.

살미면에서 달천을 만난다.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살미면에서 달천을 만난다. 사진 / 신정일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그리고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일대에서 달천(達川)을 만난다. ‘물맛이 달아서 달천’이라고도 부르고 ‘수달이 많아서 달천’이라고도 부른다는 달천은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비로봉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충주시 칠금동과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사이를 흐르다가 탄금대 부근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한강 지류다.
달천강, 박대강, 청천강, 괴강 등의 많은 이칭이 있는 달천을 따라가다가 충주에 이르고 음성을 따라 서울로 이어지는 길이 영남대로다. 그런데 그 길이 잊혀 가다가 명승 길로 지정되고, 다시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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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연 2020-11-17 14:21:50
여행스케치 11월호에 실린
영월 김삿갓면에 잠든 시인 김병연을 만나다.
를 보고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