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10월호
‘서원 건축 배치의 변주’보여주는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서원 건축 배치의 변주’보여주는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 이호신 화백
  • 승인 2021.04.14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호신 화백의 세계유산순례 - 한국의 서원]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필암서원 전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137*198
'필암서원 전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137*198. 그림 / 이호신 화백

[여행스케치= 장성] 靑山自然自然(청산자연자연)

綠水自然自然(녹수자연자연)
山自然水自然(산자연수자연)
山水間我亦自然(산수간아역자연)
已矣自然生來人生(이의자연생래인생)
將自然自然老(장자연자연로)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하리라     
                   
 - 김인후(金麟厚)의 ‘자연가(自然歌)’

 
익히 국어책에서 만난 한시의 주인공을 만나러간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을 모시는 사당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다. 세계유산이 된 필암서원(筆巖書院)이 그 모체이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이 온다는 것은 역설이 아닌 자연의 순리다. 해서 ‘산다는 것은 꽃소식을 듣는 일’로 여긴다. 그 기다림 속에 필암서원 매화소식이 문향(聞香)으로 들려와 길을 떠났다.

'필암서원의 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62*94. 그림 / 이호신 화백
'필암서원의 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62*94. 그림 / 이호신 화백
'필암서원과 삼봉'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4*62. 그림 / 이호신 화백
'필암서원과 삼봉'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4*62. 그림 / 이호신 화백
필암서원과 삼봉. 그림 / 이호신 화백
필암서원과 삼봉. 그림 / 이호신 화백

걸출한 문사인 김인후 선생을 모신 곳
<하서전집(河西全集)>에 나오는 김인후의 시는 1600 수에 이르니 진정한 문사(文士)이다. 인근 광주의 어등산과 황룡강변(장성현 대맥동)에서 자란 자연환경이 성정에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 낙향 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는 담양의 누정(소쇄원, 면앙정 등)에서의 교류가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 그 인연의 강물은 오늘날 후학에 의해 <하서도학(河西道學)과 문학(文學)>(필암서원 산앙회보)으로 출간되고 있다. 

사전에 연락을 하였기로 서원에서 만난 분은 필암서원 도유사(都有司) 김성수(金盛洙, 76세) 선생이시다. 하서의 13대 본손(本孫)이라고 한다. 그를 따라 서원을 둘러보니 봄 볕 속에 매화 천국이다. 경내에만 44주가 식재(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되었다니 국내 서원 중 최다가 아닐까 싶다. 품종과 수형이 아름답기로 고매(古梅)의 품격이 은근하다. 한동안 매향(梅香)에 취하다가 화첩사생으로 전경을 살피기 위해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23)에 건립(장성부 읍서면 외기산 오산 남쪽)되었으나 정유재란(1597) 때 불탔다. 그 후 자리를 옮겨 지은 곳이 지금의 필암리다. 1672년(현종13) 때의 일이다. ‘필암(筆巖)’이란 하서 태생지(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 있는 ‘붓바위(筆巖)’에서 비롯되었다니 문사 출현의 뜻이 담긴 것이다. 현 필암서원의 위치는 연화산 자락을 등에 지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문필천(필암천)과 월선봉(삼봉)을 바라보고 있다. 산자락이 아닌 평지에 건립된 것이다.

확연루와 필암천, 삼봉(좌)과 필암서원 전경(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확연루와 필암천, 삼봉(좌)과 필암서원 전경(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장판각과 한장사(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확연루 정면과 후면(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홍살문 좌우로 오랜 은행나무가 지켜보는 서원의 첫 얼굴은 확연루(廓然樓)다. ‘크고 넓고 무한한 영역’을 뜻하는 바, 누각에 올라보면 넓은 시야와 만물이 일체화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는 뜻을 담았다. 화재로 인해 1752년에 다시 짓고 편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을 다시 걸었다. 예전(1672)에 우암이 쓴 찬문을 보면 필암서원 재건립의 당위성이 느껴진다,

높은 바람 준한 절개는 천지를 지탱하고 
위대한 글 강건한 글씨는 옛 전적을 보익(輔翼)하네
삼강오륜 힘입으니 백세의 향기로세 
제사 올리는 곳이 비좁고 경사져서 
터를 잡아 고쳐 짓고 길일(吉日) 가려 혼령 모시니
휴우(休佑)를 물리시고 길이 자생(秶牲) 누리소서

확연루를 통과하면 긴 건물인 청절당(淸節堂)과 마주한다. 그런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입구쪽(확연루 방향)으로 마루가 트이지 않고 사당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이 특이한 건축구조가 소위 ‘서원건축 배치의 변주’로 필암서원을 일컫는다. 

청절당 마루 앞으로 사당인 우동사(祐東祠)와 인종(仁宗, 1544~1545)이 하사한 묵죽도(墨竹圖)를 보관한 경장각(敬藏閣)이 자리했다. 이것은 평지서원인 입지조건에서 사당의 권위를 더하는 방편이다. 여기에 인조의 스승이었던 하서와의 관계도 조명된다. 즉 임금과 사당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확연루와 청절당의 공간에는 양쪽으로 매화가 도열, 찬연하고 확연루 좌우로 식재된 백송이 담장을 넘고 있다. 그리고 뜰에 두 그루 은행나무가 조경을 더한다. ‘청절당’편액은 송준길의 글씨이고, 함께 걸린 ‘필암서원’편액은 윤봉구가 썼다. 

'필암서원 진덕재에서'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4*62
'필암서원 진덕재에서'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4*62
장판각과 한장사(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장판각과 한장사(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휴식공간으로 적합한 뒤뜰을 지닌 고직사(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휴식공간으로 적합한 뒤뜰을 지닌 고직사(화첩). 그림 / 이호신 화백

꽃과 나무들이 자아내는 별천지 
서재인 숭의재(崇義齋)와 동재인 진덕재(進德齋)는 강학공간이다. 그중 나의 시선은 진덕재 마루와 난간에 꽂혔다. 여백의 미요, 허(虛)의 공간이다. 건축도 아름답거니와 마루난간 사이로 보이는 한 그루 고매(古梅)의 아취에 빠진 것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자연가'. 그림 / 이호신 화백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자연가'. 그림 / 이호신 화백

이 난간에 기대어 매화를 완상한 영혼들이 내 무딘 붓끝을 세우게 한다. 춘정(春情)에 높이 나는 새들도 화면으로 들어와 그림을 돕는다. 순간 하서의 ‘자연가’가 절로 터지고 웅얼거리게 된다. 평소 ‘과학은 발명이고 예술은 발견’이란 지론이 실감나는 경우이다. 

진덕재 뒤란에는 산수유 꽃이 노란 아우성으로 눈부시다. 모과나무들과 소나무, 그리고 잡목 속에 방치된 탑 하나가 눈에 띈다. 예전에는 사당 앞뜰에 있었는데 높이가 길어 옮겨진 모양이다. 탑신 사방에 연꽃문양이 다양하게 조각된 탑으로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것 같다. 

필암서원 김성수 도유사. 그림 / 이호신 화백
필암서원 김성수 도유사. 그림 / 이호신 화백

앞서 본 ‘경장각’ 편액은 초서로 정조의 글씨라고 전해 온다. 처마 밑에 용머리 조각이 동. 서, 남으로 조각되어있다. 이것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고 북쪽에만 없는 것은 지존(至尊)의 방향 때문이라고 김성수 도유사가 일러 준다.

장경각 옆에 새워진 계생비(繫牲碑)는 특별하다.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놓고 검사하던 곳이다. 그 뒷면의 묘정비(廟庭碑)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인물에 대한 비석으로 서원비(書院碑)라고도 부른다. 한 비석에 다른 용도가 쓰인 것도 그렇고, 가축 재물에 대한 비석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이제 내삼문(內三門)을 넘어 사당인 우동사(祐洞祠)에 참배한다. 이곳에 주벽(主壁)인 하서 김인후 선생과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梁子徵, 1523~1594)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알려진바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서 태어난 이가 하서 김인후 선생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양자징은 담양 소쇄원을 창건한 양산보의 아들이니 당시 가사문학의 교류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고도 남겠다. 

사당 옆에 제물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반대편 협문을 나서면 장판각(藏板閣)과 큰 일꾼이 머물렀다는 한장사(汗丈舍)가 있다. 두 건물 앞뒤로 매향이 그윽하니 천지를 물들인다. 별천지다. 잠시 길손도 붓을 놓고 환희에 젖는다.

마지막 사생으로 관리동인 고직사(庫直舍)에 이르자 세 동의 건물이다. 장독 뒤의 뜰이 무척 넓다. 수려한 꽃나무가 즐비하여 휴식공간이 되기에 충분하다. 오랜 나무의자도 눈에 뛴다. 이곳을 잘 정비하여 서원의 아취를 더하면 좋겠다. 방치된 탑도 이곳으로 옮기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미친다. 

사생을 마치고 도유사의 소개로 도랑 건너의 필암서원 유물전시관과 평생교육센터를 둘러보았다. 여러 유물과 유적을 배관하며 메모한 <필암서원에 부쳐>- 권필(權韠, 1569~1612)의 시 앞부분을 옮긴다. 
  
포은선생 가신 뒤로 선생(김인후)이 나셨기에 
우리나라 천 년 만에 도(道)가 다시 밝았도다.

한편 자료집으로 받은 ‘중용 14장 ‘군자의 처신’’(<하서도학과 문학> 2019.12)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알맞은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에 맞게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에 알맞게 행하며, 이적에 처해서는 이적에 알맞게 행하며, 환란에 처해서는 환란에 알맞게 행한다.

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하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지 아니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남에게서 내 삶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아니한다. 

이처럼 천명(天命)과 중화(中和)의 실현을 꿈꾸었던 하서 선생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한가? 호남유학자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되고, 송시열과 정조로부터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다 갖춘 이는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아가 정조는 ‘동방의 주자(朱子)’로까지 칭송한 인물이다. 이처럼 그의 사상을 숭배하는 곳. 그 정신의 귀의처를 만나는 건축 공간. 필암서원을 화폭에 담는 일이 뜻 깊다고 여긴다. 아니, 작가의 소임으로 받아들인다.  

※ 바로 잡습니다
2021년 4월호 ‘이호신 화백의 세계유산순례 - 함양 남계서원’편의 여는 시 중 한시 전반부의 순서를 ‘堂堂天嶺鄭公鄕 (당당천령정공향) 百世風傳永慕芳 (백세풍전영모방)’으로 바로 잡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