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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조상의 덕으로 이어져온 공간의 수려함, 논산 돈암서원 
조상의 덕으로 이어져온 공간의 수려함, 논산 돈암서원 
  • 이호신 화백
  • 승인 2021.05.2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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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신 화백의 세계유산순례 - 한국의 서원]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 전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138X198.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 전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138X198. 그림 / 이호신 화백

[여행스케치=논산] 논산은 이 땅의 사내로 태어나 1977년에 군 입대 훈련소로 첫발을 딛었었다. 그 후 문화유산 답사로 여러 번 지나쳤으나 돈암서원(遯巖書院)과의 만남은 처음이다. 오는 인연으로 대전에 사는 김영훈 선생의 차편을 신세지며 가는 길. 졸저의 독자이자 문화유산전도사인 그와의 선약이 있어서이다.

먼저 논산시청에 들러 관계 자료를 얻고 연산면의 서원에 이르자 돈암서원문화공원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세계유산이 된 터라 타 서원처럼 정비사업이 한창이다. 입구의 전시장과 한옥마을의 개장을 앞두고 있다. 서원을 향해 걸어가니 홍살문(紅箭門)과 하마비(下馬碑)가 길손을 맞이한다. 산사의 일주문과는 다르지만 마음새김과 의미는 통한다는 생각이다.

'돈암서원 응도당에서' 2020 한지에 수묵채색 47X69.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 응도당에서' 2020 한지에 수묵채색 47X69. 그림 / 이호신 화백

사계 김장생의 정신이 흐르는 곳
언덕의 솔숲과 대숲을 지나자 가을에는 메밀밭으로 변한다는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그곳에 산앙루(山仰樓)가 우뚝하니 산을 우러러 보는 누각이다. 이곳 서원의 위치를 가늠하는 곳으로 멀리 계룡산과 연산, 그리고 대둔산이 원경이다. 그 앞들에 연산천이 흐르나 서원과는 거리가 멀다. ‘돈암(遯巖)’의 명칭은 이곳으로 서원이 옮겨 오기 전 임리(숲말)에 돼지바위로 부르는 큰 바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입지환경(立地環境)으로 서원을 품은 배산(背山)은 고정산이다.

이곳 서원은 1634년(인조12) 창건된 연산면 하임리 숲말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서 옮겨왔다. 사정인 즉 홍수를 피해서라고 기록이 전한다. 장소는 옮겼으되 설립정신과 추앙, 그리고 경학공간의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왔고 그 시공 속에 오늘의 서원을 맞이한다.

김장생 14대 종손 김선원 씨. 그림 / 이호신 화백
김장생 14대 종손 김선원 씨. 그림 / 이호신 화백
김장생과 양천 허씨(7대조모) 묘. 그림 / 이호신 화백
김장생과 양천 허씨(7대조모) 묘.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의 주역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설립했고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1871)으로 전국 650여 개 서원에서 47개 서원만 남은 중 명맥을 유지해 온 서원이다. 

서원의 외삼문(外三門)인 입덕문(入德門) 담장엔 황강김선생정회당사적비명(黃岡金先生靜會堂事蹟碑銘), 헌성사림(獻誠士林)비들이 눈에 띈다. 예전 산앙루와 입덕문 사이에 놓인 것을 옮긴 것이다. 입덕문 현판은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한다. 잘 살펴보면 기둥받침돌이 바깥은 사각이요, 안쪽은 팔각이다.

홍살문, 경회당, 입덕문, 산앙루. 그림 / 이호신 화백
홍살문, 경회당, 입덕문, 산앙루.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 배치도.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 배치도. 그림 / 이호신 화백
응도당과 공포 조각(천계). 그림 / 이호신 화백
응도당과 공포 조각(천계). 그림 / 이호신 화백

입덕문을 지나면 양축에 웅대한 응도당(凝道堂) 건물과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경회당(慶會堂)이다. 그 중 이곳의 대표 건축은 단연 응도당이다. 1880년에 예전 건축물들이 옮겨 올 때도 응도당은 미루었다. 1971년에야 이전해 온 건물로 그 규모나 건축양식 그리고 쓰임이 으뜸이다.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건축으로 보물 제1569호로 보호 받고 있다. 

응도당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그 아래로 눈썹지붕을 단 형식이 이채롭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넓은 마루와 방이 규모와 용도인데 실제 마루에 앉아보면 시야와 공간의 느낌이 특별하다. 툭 트인 앞마루의 서원 장면도 좋지만, 담장너머의 들과 하늘이 그림처럼 들어오는 후면 시야는 마치 어둠속의 스크린처럼 환하다. 앉아보는 순간 텅 빈 충만의 느낌으로 그윽하다. 이것이 공간미학이요, 한옥의 아름다움인가 싶다.

응도당은 거대한 규모에 비해 둔중하지 않은 것은 눈썹지붕을 단 것이고, 넓은 마루가 시원한 눈 맛을 주기 때문이다. 전면 기단이 약 17.2m, 측면이 약 12m에 이르는 건축은 한국서원 강당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이 스케일에 밀도를 더한 공포(拱包)의 세부 목공도 우수하다. 당시 사대부들이 건축에 담은 의미와 이를 실현해 낸 목수, 장인들의 혼이 서린 건축물이라 하겠다.

'돈암서원의 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2X59.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의 봄'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2X59.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의 밤'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2X59. 그림 / 이호신 화백
'돈암서원의 밤' 2020 한지에 수묵채색 92X59. 그림 / 이호신 화백
정회당과 장판각. 그림 / 이호신 화백
정회당과 장판각. 그림 / 이호신 화백

보름달 뜬 밤의 정회당을 그리다
다시 화첩을 펴고 전면을 바라보니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에 정의재(精義齋)와 거경재(居敬齋)가 자리했다. 양성재 앞에 세워진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는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을 기리는 문하생들이 현종 10년(1669)에 세웠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행서로 쓴 것으로 여전히 필획이 살아있다. 앞면 상부의 전서체 제목만은 김만기(金萬基)가 쓴 것을 1880년 옮겨 온 것이다. 이처럼 서원 중심 공간에 큰 비석을 배치한 곳은 사실 드물다.

양선당, 정의재, 거경재, 전사청. 그림 / 이호신 화백
양선당, 정의재, 거경재, 전사청. 그림 / 이호신 화백

이제 중요한 또 다른 건물은 양성당 축 좌측 담장으로 비스듬히 자리한 정회당(靜會堂)이다. 정회당은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1526~1582)가 연산에 건립한 것을 옮겨온 것이다. 당시의 명망 있는 유림이 모인 곳으로 김장생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정회당의 현판글씨이다. 낙관 대신 의성김예산팔세경서(義城金禮山八歲敬書)라고 새겼는데 의성의 김예산이라는 인물이 여덟 살 나이에 쓴 것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 집은 작은데 긴 마루와 기둥 사이가 마치 회랑 같다. 창문을 열면 사방이 통하는 동선으로 이어지는 방의 구조가 아늑하고 정겹다. 마루 아래 깐 검은 사방 띠돌도 집 구조에 미감을 더한다. 나의 상상은 어느 보름밤 멋들어지게 솟은 이곳 향나무 풍광에 깃든 정회당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은 것이다. 세월의 강물을 베개로 삼아…. 

다음으로 양성당 뒤편의 장판각(藏板閣)과 전사청(典祀廳)이 이곳 강학공간의 마지막 건물이다. 좌측 장판각은 옛 경판을 보관하고 우측 전사청은 제사 준비 등의 건물인데 의외로 크다. 주변의 엄나무와 모과나무가 건조한 담장에 벗이 되고 있다.

끝으로 제향 공간으로 향하는 길. 내삼문(內三門) 담장에 새긴 글씨문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용은 전서로 쓴 12자로 검정과 붉은 벽돌로 새긴 것이다. 이 장면이 돈암서원의 백미요, 다른 서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담장의 수려함이다. 나아가 김장생과 후학들의 예학정신을 잘 보여 준다.

담장글씨(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 그림 / 이호신 화백
담장글씨(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 그림 / 이호신 화백

지부해함(地負海涵) -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 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담장 아래의 수로와 ㄱ자로 만나는 전사청 담장의 물길이 만나 마당의 맨홀로 흐르는 장면을 목도한다. 하여 전사청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해바라기하고픈 마음이 인다. 이 공간의 합일, 여백의 조화를 발견하는 기쁨! 이곳을 꾸민 장인들의 손길과 마음을 읽는 일이요, 시공을 초월해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숭례사와 내삼문, 내삼문 얼굴기와. 그림 / 이호신 화백
숭례사와 내삼문, 내삼문 얼굴기와. 그림 / 이호신 화백

내삼문을 넘자 숭례사(崇禮祠)가 높은 단 위에 엄숙하여 두 손을 여미게 한다. 4단은 위에서부터 조금씩 넓고 1단에는 홈이 가로지르니 빗물을 위한 물홈이다. 단 아래는 손을 씻고 불을 피우는 곳, 생물(生物)을 놓고 예식 때 오르는 밑돌도 살펴진다. 또한 우측 문으로 들어와 같은 곳으로 나오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 사당에는 주향(主享)인 사계 김장생,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분들의 영혼이 누대로 회자되는 기호사림파(幾湖士林派)의 원천인 곳이다.

늦도록 서원을 사생하다가 이튿날에는 김명희 해설사의 도움을 받았다. 나의 청에 해설사가 모셔 온 분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14대 종손인 금촌(昑村) 김선원(金善沅, 75세)씨다. 그의 안내로 서원을 떠나 솔숲이 무성한 고정산 자락의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金長生先生墓所一圓, 연산면 고정리 산7-4)을 찾아가 참배했다.

사계 집안의 여러 산소 중 특히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사계의 7대 조모인 양천(陽川) 허씨(許氏)의 덕화는 집안의 자랑이다. 한 여인의 헌신이 당대는 물론 후대의 인물들을 배출한 계기가 되었으니. 그래서인지 산소 또한 사계 아래쪽에 모셔져 있다.  

이 산소들을 바로 지켜보고 있는 사계종가(沙溪宗家), 대문에는 한글문패(김선원, 정순옥)가 걸려있다. 400년이나 되었다는 염수재(念修齋)에 눈길이 머물다가 종부(정순옥)가 내어 준 대추차를 마시며 세월의 이야기를 듣는다. 종손은 말했다. 다 조상의 은혜로 살아 왔노라고, 그 은덕으로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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