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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한편의 시로 남은 옛 남광주역
한편의 시로 남은 옛 남광주역
  • 권다현 여행작가
  • 승인 2021.08.12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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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기차여행] 옛 남광주역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푸른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푸른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스케치=광주] 기차역을 배경으로 쓴 가장 유명한 시를 꼽으라면 단연 곽재구의 <사평역에서>가 아닐까. 막차를 기다리는 어느 시골 후미진 간이역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시는 가난하지만 따스했던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시인이 직접 사평역의 실제 모델로 꼽았던 남광주역은 이제 폐역이 되었지만, 낡은 승강장과 기찻길이 또 한편의 아름다운 시가 되어 시민들 곁에 남았다. 

<사평역에서>의 실제 모델인 남광주역은 남광주시장을 끼고 있어 광주는 물론 보성과 벌교, 여수 등 남도의 발이 되어주었던 기차역이다. 그러나 교통체증과 소음을 이유로 경전선이 시외로 옮겨가면서 결국 폐역의 운명을 맞았다. 다행히 환경운동가와 시민들이 적극 나서 우리나라 최초로 폐선부지를 공원화한 ‘푸른길’이 탄생했고, 철거됐던 남광주역 자리엔 탐방안내센터가 지어졌다. 푸른길에 설치된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 ‘푸른길의 문화쉼터’를 시작으로 광주폴리 작품들을 둘러보는 여행도 추천할만하다.    

옛 남광주역 승강장을 지키는 추억의 기차.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옛 남광주역 승강장을 지키는 추억의 기차.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광주도시철도 남광주역에 설치된 전시공간.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광주도시철도 남광주역에 설치된 전시공간.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기차도서관 내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기차도서관 내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북카페로 활용 중인 추억의 기차.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북카페로 활용 중인 추억의 기차.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평역에서>의 실제 모델이었던 남광주역
곽재구 시인의 등단작이기도 한 <사평역에서>는 어느 겨울밤, 막차를 기다리며 대합실 톱밥 난로 곁에 쪼그리고 앉은 평범한 우리네 이웃들을 그린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로 묘사된 고단한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구절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도시철도 남광주역 전시공간을 살펴보는 시민.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도시철도 남광주역 전시공간을 살펴보는 시민.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평역에서> 이후 시인은 척박한 도시의 삶, 그 중에서도 광주를 배경으로 한 시들을 쏟아냈다.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기차역인 사평역을 가리켜 “남도의 어느 간이역이라도 좋을 것”이라고 했지만, “굳이 모델을 찾자면 남광주역”이라고 밝혔다. 

경전선 완행열차가 지나던 남광주역은 바로 앞에 남광주시장이 자리했다. 때문에 근처 보성이나 벌교, 여수 등에서 아낙들이 새벽열차로 산나물과 푸성귀, 각종 해산물 등을 가지고 와 시장에서 판 뒤 저녁열차로 돌아가는 요긴한 기차역이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시 속에서 ‘그믐처럼’ 졸거나 ‘감기에 쿨럭’이는 이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시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가꾼 푸른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시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가꾼 푸른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국밥거리로 유명한 남광주시장.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국밥거리로 유명한 남광주시장.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폐역, 도심 속 공원으로 다시 태어나다
1930년 신광주역으로 처음 영업을 개시했던 남광주역은 1938년 이름을 바꾸었다. 남광주시장을 끼고 있어 광주시내 주요역으로 성장했으나, 2000년 경전선이 시외로 옮겨가면서 결국 폐역의 운명을 맞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기찻길로 인해 교통체증과 소음이 심각해 민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8km에 이르는 옛 기찻길과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두고 뜨거운 논의가 이어졌다. 환경운동가와 시민들이 적극 나선 결과 우리나라 최초로 폐선부지를 공원화한 ‘푸른길’이 탄생했다.  

푸른길은 시작점인 광주역에서 출발해 산수동 굴다리옛터까지 1구간, 여기에서 남광주역까지 2구간, 백운광장까지 3구간, 종점인 동성고등학교까지 4구간으로 나뉜다. 이들 구간을 따라 걷다보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던 옛 담양선의 흔적을 비롯해 완행열차가 달리던 옛 남광철교, 간이역 모양의 화장실 등 기차와 관련된 풍성한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오랜 세월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었으나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던 낡은 기찻길이 숲과 마을, 도시를 품은 세상에 하나뿐인 공원으로 변신한 셈이다.  

걷는 재미가 쏠쏠한 푸른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걷는 재미가 쏠쏠한 푸른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녹슨 기찻길을 떠올리게 하는 내후성강판으로 재작된 '푸른길의 문화쉼터'.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녹슨 기찻길을 떠올리게 하는 내후성강판으로 재작된 '푸른길의 문화쉼터'.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이 푸른길의 중심에 남광주역이 자리한다. 안타깝게 철거되었던 옛 남광주역 자리에 푸른길공원 탐방안내센터가 지어진 것. 이곳에서는 해설사로부터 푸른길의 역사와 의미, 기찻길이 지나는 마을마다 간직한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 미리 예약하면 푸른길을 함께 걸으며 동반해설도 가능하다. 승강장 한편에는 추억의 기차도 세워져 있다. 

지난 2008년 코레일로부터 기증받은 2량의 기차를 북카페로 운영하고 있어 지나는 이들 누구나 걸음을 쉬어갈 수 있다. 근처 광주도시철도 1, 2호선이 지나는 남광주역에는 옛 남광주역의 풍경을 담은 작은 전시관도 마련돼 있다. 푸른 지붕을 얹은 담박한 매력의 옛 남광주역을 빛바랜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어 반가운 공간이다.        

옛 남광주역 표지석.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옛 남광주역 표지석.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INFO 푸른길공원 탐방안내센터(옛 남광주역)
주소 광주 동구 제봉로 7
문의 062-514-2444

광주영상복합문화관 옥상에 설치된 '뷰폴리'.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광주영상복합문화관 옥상에 설치된 '뷰폴리'.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 '푸른길의 문화쉼터'.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 '푸른길의 문화쉼터'.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서석초등학교 앞에 자리한 광주폴리 '아이 러브 스트리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서석초등학교 앞에 자리한 광주폴리 '아이 러브 스트리트'.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푸른길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광주폴리
푸른길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건축물도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공원이 시작되는 지점에 세워진 ‘푸른길 파빌리온’은 지역건축사와 전남대 건축학과생들이 힘을 합하여 쓰레기만 잔뜩 쌓여있던 버려진 공간에 시민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다. 그 특별한 의미 덕분에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과거 광주교도소 재소자들이 부속농장을 오갔던 농장다리엔 세계적인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 ‘푸른길의 문화쉼터’가 설치됐다. 

농장으로 일하러 가는 것은 모범수들만 할 수 있었는데, 복역수들은 동네 아이들에게 고구마 등 군것질거리를 던져주기도 하고 주민들과 몰래 담배를 거래하기도 했다. 녹슨 기찻길을 떠올리게 하는 내후성강판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주변 마을로 이동하는 계단이자 쉼터 기능을 겸한다. 또 다리 아래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해 농장다리에서 바라본 기찻길 등 다양한 주변 풍경을 담은 사진을 걸어두었다. 한쪽 벽에는 책장도 비치돼 누구나 책 한권 읽으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뷰폴리'에서 바라본 광주시내 전경.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뷰폴리'에서 바라본 광주시내 전경.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푸른길의 문화쉼터’는 지난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일환으로 기획된 도시공공시설물 ‘광주폴리’의 하나다. 폴리(Folly)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장식적 역할을 하는 건축물을 뜻하는데, 스위스의 건축가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가 프랑스 파리의 라빌레뜨공원에 35개의 건축구조물을 설치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폴리가 새롭게 규정되었다. 광주폴리는 여기에 기능적인 역할까지 아우르며 도시재생에 기여할 수 있는 건축물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설치된 광주폴리 작품은 모두 32개로, ‘푸른길의 문화쉼터’를 시작으로 이들을 돌아보는 여행도 추천할만하다. 특히 광주영상복합문화관 옥상에 설치된 ‘뷰폴리’와 서석초등학교 앞에 자리한 ‘아이 러브 스트리트’는 여행자들이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도심 풍경을 의미 있는 예술경험으로 만들어준다.

INFO 광주폴리
홈페이지 www.gwangjufoll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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