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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퇴계 이황 선생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퇴계 이황 선생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 이호신 화백
  • 승인 2021.08.13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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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순례]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 2008 한지에 수묵채색 70*140.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2008 한지에 수묵채색 70*140. 그림 / 이호신 화백

[여행스케치= 안동] 높은 곳에 머무는 것은 내 할 일 아니네      (高蹈非吾事 고답비오사)
고향마을에 거처하면서                          (居然在鄕里 거연재향리) 
착한 사람이 많아지길 소원하네                (所願善人多 소원선인다) 
이것이 천지가 제자리를 잡는 것이기에       (是乃天地紀 시내천지기) 

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을 생각할 때 선생이 지으신 이 시를 먼저 떠올린다. 사연인즉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 행사(2019.4.9.~4.21)에 동참한 까닭이다. 김병일 단장(도산서원 원장,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이 이끄는 행사기간에 일부 참가, 그림을 그리며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뒷모습’을 따라 걷는 일은 선생의 사상과 삶을 통찰하는 시간이요, 배움과 깨달음, 그리고 성찰의 계기를 주었으니.

'도산서원 전도' 2019 한지에 수묵채색 178*271.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전도' 2019 한지에 수묵채색 178*271.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별유사 이동구 선생. 그림 / 이호신 화백
별유사 이동구 선생. 그림 / 이호신 화백

서원의 모태, 도산서당과 계상서당
그 뒷모습의 주인인 퇴계가 만년에 머물던 곳, 도산서원을 다시 찾은 날은 석 달 후인 한여름(7.31, 음6.29)이다. 사형(師兄)인 권기윤 교수(안동대 미술학과)와 안병걸 교수(안동대 동양철학과)의 차편으로 밤늦게 서원입구에 도착하자 이동구 선생(도산서원별유사)이 길손을 맞아준다. 서원에서 하룻밤 묵기를 미리 청하였으니 특별한 경우이다. 서원까지 길을 따라 걷는데 별들이 총총하다. 시절인연에 감읍, 심경이 아득하니 ‘퇴계’라는 별을 헤아리며 우러러본다.

서원에 이르자 동재인 박약재(博約齋)에 불빛이 환하다. 한 달에 두 번 사당에 알묘(謁廟)하는 날이 내일이라며 갓과 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참가자들이 글을 읽고 있다. 생면부지인 나에게도 권하니 의복을 갖추고 따른다. 멀리서 온 이를 벗으로 예우해 주는 것이다. 

이튿날 삭일(朔日), 새벽 5시에 일어나 삭망제(朔望祭)에 동참하니 사당인 상덕사(尙德祠)로 향한다. 길목에서 상읍례(相揖禮, 두 손 모아 상대방에게 인사하는 예절)하고 사당 마당에서 절한 다음 안으로 들어가 분향(焚香)하고 알묘했다. 이런 행운이 또 있으랴. 도산서원을 그리려 온 내가 마치 신고식을 치루는 느낌이다. 하지만 동이 튼 후 이내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땅바닥에 엎드려 화첩을 펼치는데 땀이 뚝뚝 떨어진다. 진짜 신고식이 시작된 셈이다.  

도산서당 2019 한지에 수묵 93*60.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당 2019 한지에 수묵 93*60.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스케치와 상덕사 분향.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스케치와 상덕사 분향. 그림 / 이호신 화백

먼저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간다. 퇴계가 57살 되던 해(1557) 도산(陶山)에 와서 3년 만에 완공한 집으로 현재 도산서원의 모태요, 중심인 곳이다. 스스로 지은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倂記)에서 당시의 상황과 입지적 조건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성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 1546년 퇴계가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곳 가까운 데에 퇴계종택(退溪宗宅)이 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는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도산으로 왕래하였고, 이곳에서 별세한다.

여기에서 퇴계는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또한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도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도산서원 건축 이미지.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건축 이미지. 그림 / 이호신 화백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뜰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퇴계 선생을 떠올리며 화폭에 담은 그림들
퇴계는 도산서당을 소박한 삼간의 작은 초옥으로 짓고 친필로 당호를 썼다, 서쪽 벽에는 서가를 만들어 서책을 두었다. 온돌방 동쪽의 암서헌(巖栖軒)이라 부르는 마루방 후면에는 판문을 달았으나 전면과 동측면은 창호를 달지 않았다. 동쪽 개울과 남쪽의 트인 공간으로 낙천(洛川)의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볼 수 있기 위하여. 또 암서헌 동쪽으로는 반 칸 폭의 덧지붕을 내달고 바닥에는 좁고 긴 널판을 살평상 바닥처럼 틈을 넓게 하여 깔았다.

마당에는 방당(方塘)의 연못과 몽천(蒙泉)의 옹달샘을 배치해 멋스러움을 더했다. 동쪽 언덕에는 소나무ㆍ매화ㆍ대나무ㆍ국화 등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를 심어 벗으로 삼으니 절우사(節友社)라 이른다. 출입문은 싸리문으로 만들어 유정문(幽貞門)으로 부르게 하고.

한편 당시에 지은 건물이 농운정사(隴雲精舍), 역락서재(亦樂書齋)이다. 제자들의 숙식 장소이다. 이후 여러 사정을 거치고 후학들의 노력으로 도산서원이 창건(1574, 선조 7년), 이듬해(1575)에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다음해(1576) 상덕사를 준공하여 퇴계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는 제자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위패도 함께 있다. 현 건물로는 소개한 것 외에 전교당(典敎堂), 전사청(典祀廳), 박약재(博約齋), 동광명실(東光明室), 서광명실(西光明室), 장판각(藏板閣), 상고직사(上庫直舍), 내삼문(內三門), 진도문(眞道門) 그리고 전시장인 옥진각(玉裖閣) 등이 있다.

도산서원 왕버들. 그림 / 이호신 화백
도산서원 왕버들. 그림 / 이호신 화백
상덕사길 상읍례. 그림 / 이호신 화백
상덕사길 상읍례. 그림 / 이호신 화백

그야말로 땡볕 속에서 진종일 모든 건물을 사생하고 저녁 무렵에야 앞마당에 내려왔다. 거대한 왕버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우물(洌井), 역락서재 앞의 금송(金松)도 화첩에 들어온다. 그리고 안동호에 떠 있는 시사단(試士壇: 1792년 정조 임금이 이곳에서 과거시험을 시행했던 곳). 그곳을 바라보는 양쪽의 전망대인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에 발길이 닿는다. 행락객들은 솔바람 속에 무더위를 씻으며 호수의 풍광을 즐기고 있다. 

이 모든 광경을 담은 ‘도산서원 전도’를 꿈꾸자니 심정은 아득하기만 하다. 문득 3점의 그림이 떠오른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도산서원도>(간송미술관 소장)와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도산서원도’는 작은 부채에다 그렸으나 진경의 운치가 무릇하다. 

한편 천 원 권 지폐 그림으로 알려진 ‘계상정거도’(보물 제585호)는 이곳에 오기 전 퇴계가 머물렀던 한서암 계천위의 계상서당 주변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집과 인물의 주인은 퇴계이나 도산서원 형세와는 거리가 있어보이므로. 이에 비해 표암 강세황(1713~1791)이 그린 <도산서원도>(1751년작, 보물 제52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실경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은 옛 경관이 아니다. 1976년 준공된 안동댐으로 인하여 진입로가 수몰되고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다. 길목의 돌 축대도 새로 쌓고 강변에 있던 시사단은 10m 높게 기단을 쌓아올린 것이다. 이 변화에 오늘을 사는 화가는 다만 현실을 그려야한다고 여긴다.

나와 안동의 인연은 권기윤 교수로부터 일찍이 비롯되었고, 2002년에 <도산서원>(70x140cm)을 그린바 있다. 낙동강 여정 속에서 원경으로 바라본 졸작이다. 그리고 17년 만에 다시 화첩을 들고 찾아왔으니 밥값을 떠올리게 한다. 이후 화실로 돌아와 고민 속에 밑그림을 그리는데 이게 왠일인가? 연락도 없이 내가 사는 산청 남사예담촌에 도산서원에서 만난 분들이 화실을 찾아왔으니 이동구, 이태원 별유사와 권갑현 선생(동양대학교 명예교수)이다. 결과적으로 이분들의 자문을 받게 되어서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이러구러 졸작 <도산서원 전도>에 낙관하고 난 후 또 한 생각을 떠올리니 <도산 서당>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이 그림의 소재는 일찍이 내가 좋아하는 퇴계의 매화 시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고 싶어서이다.

누구보다 인간애가 깊었던 퇴계는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우리말 시조를 지었으니 <도산십이곡>이다. 한편 유난히 매화사랑과 칭송이 깊었던 퇴계의 사상은 자연과 인간의 상생, 그리고 존중의 삶을 보여 주었다. 이 선비가 눈 내린 겨울달빛 아래서 매화를 완상하는 모습! 어느덧 마음이 차오르자 망설임 없이 당시를 상상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퇴계의 시를 한글로 풀어 썼다. 

 홀로 기댄 산창에 밤기운 찬대
 매화가지 끝에는 둥근 달 뜨네
 이제 다시 미풍이 불어오지 않아도
 맑은 향기 스스로 온 뜰에 가득해라

 나막신 신 끌며 거니니 달이 따라 오네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날 줄 모르니
 향기는 옷에 배고 그림자는 몸을 덮네

 늦게 피는 매화의 참 뜻을 깨닫느니
 추운 때를 겁내는 내 몸을 아나보군 
 어여뻐라, 이 밤에 내 병이 낫는다면
 밤새도록 달빛아래 바라보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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