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이야기 따라 걷는 여행] 2200년 역사, 뭇사람들의 향기가 나는 영암 구림마을
[이야기 따라 걷는 여행] 2200년 역사, 뭇사람들의 향기가 나는 영암 구림마을
  • 박상대 기자
  • 승인 2021.09.24 10:5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200여 년의 역사가 있는 구림마을.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영암] 구림마을은 흔한 전통마을이 아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왕인박사‧도선국사‧이순신 장군‧한석봉 등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는 마을이다. 22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무수히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빛나는 문화를 간직한 마을에 다녀왔다.


구림마을을 수 차례 다녀왔지만 다 둘러본 적이 없다. 공간적 범위가 너무나 큰 탓이다. 월출산 서북쪽에 동구림‧서구림‧도갑‧동계‧서호정 등 12마을이 하나의 이름으로 어우러져 있다. 어느 마을에서나 월출산이 지근거리에 보이며, 지금도 600여 세대 1천1백여 명이 살고 있다.

백제시대 일본에 학문(천자문)과 생활도구(젓가락과 숟가락, 도기 등)를 전파하고 일본 왕의 스승이 된 ‘왕인박사’와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후 6대에 걸쳐 국사(國事)를 가르친 고려의 스승(太師) 최지몽, 고려 태조의 탄생을 예언한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구림에는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고 있는데 함양 박씨, 해주 최씨, 낭주 최씨, 창녕 조씨 등 4대 가문이 주류를 이루고, 종가와 사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우리 어렸을 때는 대동계원도 주로 4대 씨족이 가입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개방돼 있어요. 세상이 변하니까.”

최재갑 전 노인회장은 구림마을 사람들의 자긍심을 말할 때 대동계를 먼저 이야기한다. 1565년에 시작한 마을대동계는 공동체의 모범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3월과 10월에 대동계사에서 대동계원들이 모여 회의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신입 대동계원을 가입시킬 때는 전체 계원들이 흑백 바둑돌을 가지고 찬반투표를 하는데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않으면 회원이 될 수 없다.  

낭주 최씨 시조인 최지몽을 배향하는 사당. 최지몽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60여 년간 여섯 왕의 곁에서 국사를 도운 후 사망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선국사가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던 대숲의 바위. 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고 있어서 죽지 않았다. 강한 기운이 흐른다 하여 아기를 원하는 아녀자들이 바윗돌을 긁어간 작은 구멍이 많이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계곡에서 오이 먹고 잉태한 도선국사의 탄생설화
전갑홍 문화관광해설사가 앞장서서 마을을 안내했다. 통일신라 때인 827년 어느 날, 영암 월출산 아래 성천(聖川)에서 최씨 집안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오이 하나가 떠내려왔다. 처녀는 그 오이를 물에 씻어 배어먹었다. 처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에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배가 불러왔고, 아기를 낳았다.

처녀의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은 딸이 아기를 낳은 것이 부끄럽고 망측한 일이라고 여겨 갓난아기를 마을 대나무숲에 버렸다. 며칠 후 딸은 아기가 죽었으면 묻어줄 생각으로 대숲에 들어갔는데 산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녀의 부모는 기이한 일이라 여겨 아기를 집에 데려다 키웠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마을을 비둘기를 뜻하는 '구(鳩)'와 숲을 뜻하는 '림(林)'을 써서 구림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전갑홍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 박상대 기자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탄 상대포구. 지금은 예쁜 호수로 옛 영화를 지키고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구림마을에 당시 울창했던 대숲은 없다. 후세 사람들이 대나무를 베어내고 집을 짓거나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다만 아직도 대숲 가운데 갓난아기를 버렸던 바위, 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고 있던 바위는 낭주 최씨 사당 옆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국사암(國師岩)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네다섯 평이 됨직한 바위에는 정구공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수십 개 있다. 이 구멍들은 후세에 아기를 임신하지 못한 여인들이 기가 세다고 소문난 바윗돌을 긁어다 먹은 흔적이라고 한다.

총명하던 아이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라다 15세 되던 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 승려가 풍수지리를 주창한 도선국사다. 도선은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을 설파했는데 고려와 조선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 같은 믿음을 주고 있다.

팔도를 주유하던 도선은 어느 날 개성을 지나다가 한 남자를 만나 집터를 잡아주면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떠났다. 훗날 그 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났다. 왕건의 집권을 위해 조작한 탄생설화라는 주장이 있지만, 도선의 사상은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까지 백성들에게 거대한 사상과 이념이 되었다. 
 

구림마을은 20개 작은 마을이 하나로 모아져 '구림마을'이라 불린다. 마을의 역사가 2200년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조선의 명필 한석봉 어머니가 떡장사한 마을

조선이 배출한 명필 한석봉은 송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유학했다. 일곱 살 때 스승 신희남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 영암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신희남은 한석봉과 제자들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스승에게 아들을 계속 가르쳐달라고 했고, 스승은 고향 영암이 한양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어서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석봉에게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여러 스승에게 배우게 하기 싫습니다. 영암까지 천리길이라 어린 아이를 혼자 데려가기 곤란하다면 제가 같이 가서 뒷바라지를 하겠나이다” 하고, 신희남의 뒤를 따라 영암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신희남이 영암 덕진면에 기거할 때 석봉을 그 문하에 두고, 자신은 30리나 떨어진 아천포구에서 떡장사를 시작했다. 

아천포구는 간척사업이 있기 전, 군서면 상대포구와 함께 외국을 오가는 상인들이 배를 이용할 정도로 큰 포구였고, 농어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커다란 장이 섰다. 간척 사업 이후 아천장은 독천장으로 이전하게 된다. 지금 그 장터는 사라지고 작은 하천과 작은 마을만 남아 있다.

석봉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부를 다 마치기 전에는 10년이 걸려도 집에 오지 말고 학문에 정진하라”고 다짐하며 내보냈다. 그리고 7, 8년쯤 되었을 때 석봉은 공부를 다 마쳤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어머니는 반갑게 맞이하는 대신 아들에게 저 유명한 떡 썰기와 글씨 쓰기 시합을 제안한다.

한석봉은 17년 동안 영암에서 공부하고,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영암을 떠났다. “구림마을에는 함양 박씨 6형제의 효심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세운 육유당(六友堂) 현판이 한석봉 글씨랍니다. 영암 덕진면의 영보정과 해남 미황사 대웅전의 현판도 한석봉이 남긴 글씨라고 알려지고 있어요.” 
 

1596년 이순신 장군이 구림마을에 와서 조팽년과 최숙남을 만나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기록의 현장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집집마다 담장 안에 심어놓은 꽃나무나 과일나무가 정겹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이순신 장군과 약무호남 시무국가
구림에는 상대포구와 아천포구가 있었다. 상대포구는 지금 예쁜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왜구들이 몰래 접근해서 농작물을 약탈해가기도 했고, 해군이 잠시 머무르다 가기도 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 들러서 며칠간 머물다 가곤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을 잘 대접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매번 환대를 받고, 군량미와 군수품을 지원해준 구림 주민들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그 편지의 원본은 현충사에 있고, 영암 구림마을 연주 현씨 종가인 죽림정에 사본이 8편 전시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 전쟁 중, 한산도 앞에 진을 치면서 현덕승 사헌부 지평에게 보낸 편지 속에 유명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始無國家 : 만약 호남이 없다면 조선은 존재할 수 없다)란 글을 써서 보냈다. 장군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지만 영암 일대 해안가에 사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말이다.

회사정은 조선 중기에 박규정, 임호 등 문인들이 세웠고, 이황, 이이 등 전국의 선비들이 다녀간 유서 깊은 정자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월출산에서 구림마을을 관통하여 바다로 흘러가는 구림천. 민물새우를 잡고 있는 주민들. 사진 / 박상대 기자
구림마을에는 8대째 대물림해서 내려온 특산품 어란이 있다. 낚시로 잡아올린 1m짜리 숭어의 알로 만든다. (전통명장의 영암어란 010-3631-9003) 사진 / 박상대 기자

죽림정 앞으로 월출산에서 발원하여 구림마을을 휘돌아가는 구림천이 흐른다. 구림천은 상대포구 앞을 거쳐 영암호로 흘러가는데 1급수가 흐른다. 하천에서 마을여인들이 민물새우를 잡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최재갑 전 노인회장은 구림천을 살리고, 마을 골목길을 지키는 것이 조상들의 정신을 받드는 일이라고 한다.

구림마을에는 여행객을 위해 한옥체험마을을 운영하고, 녹색농촌체험마을도 운영하고 있다. 회사정을 비롯한 여러 정자가 옛사람들의 향기를 풍기고, 담장과 골목, 작은 하천에도 수백 년 전 사람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예주 2021-10-03 23:51:19
영암 구림마을은 정말 역사가 살아있는 마을이지요
제1회 왕인문화축제를 저가 영암에 근무할 때 시작했지요
벚꽃 흐드러지게 핀 구림마을...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