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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보여주는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보여주는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 이호신 화백
  • 승인 2021.09.23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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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순례]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 전도' 2019 한지에 수묵채식 137*179.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 전도' 2019 한지에 수묵채식 137*179. 그림 / 이호신 화백

[여행스케치=안동] 안동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은 낙동강을 바라보며 있다. 그 강 너머 화산(花山) 아래 둥지를 튼 곳이 병산서원이다. 강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화산 건너편에는 풍산 류씨(柳氏) 집성촌인 하회마을이 있다. 강의 반대편에 서로 자리한 것이다. 예전엔 하회마을의 뒷산을 끼고 논밭을 가로질러 서원으로 향했다. 지금은 마을에서 서원으로 가는 도로를 이용하지만.

돌아보니 하회마을은 결혼 이듬해(1987년) 여름휴가를 계기로 인연이 닿았고 병산서원으로 이어졌다. 그 후 계간 <가나아트>(1998년 여름호 기획/ 내가 찾고 싶은 문화유적)에 ‘병풍산 아래 물소리 듣는 바람의 집-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에 졸고가 실렸다. 다시 보아도 추억이 생생하다.


수년 전 몇 차에 걸친 안동의 여름답사는 꼭 병산서원을 빼놓지 않았는데 이는 무엇보다 자연과 인공이 흔연히 조화를 이룬 문화유산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의 겨울밤' 2019 한지에 수묵채색 92*60.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의 겨울밤' 2019 한지에 수묵채색 92*60.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의 밤' 2008 한지에 수묵채색 95*59.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의 밤' 2008 한지에 수묵채색 95*59. 그림 / 이호신 화백

만대루에 오르면 느껴지는 풍류
다리품을 팔며 비포장을 걸어 흘린 땀이 서원의 중심인 만대루에 오르는 순간은 인생의 희비와 같은 그 무엇이 바람결에 전해 왔다. 그 만대루에서 바라보면 병풍같이 두른 병산(屛山)이 하늘아래 펼쳐지고 그 밑으로 낙동강 자락이 유유히 흘러간다. 그리고 강바람이 고운 모래벌의 노송에게 다가가 솔바람을 일으켜 누각으로 불어든다. 아니 사실은 이 만대루의 기능이 주변의 바람을 끌어 모으는지도 모르겠다.

병산서원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풍산에 있던 풍악서원(豊岳書院)을 1575년(31세) 이곳 병산으로 옮긴 후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선생이 돌아가시고 1863년(철종 14년)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한국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병산서원은 병산에서 마주 보이는 꽃뫼(花山) 아래 둥지를 틀었다.

먼저 만대루로 향하는 길에 맞이하는 복례문(復禮門)은 ‘서원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예를 갖춘다’는 뜻으로 새겨진다. 2층 누각에 8개 기둥이 병렬한 만대루 밑을 지나 마주하는 입교당(立敎堂) 양쪽에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매화나무와 함께 있다. 그 뒤로 장판각과 서애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尊德祠)와 좌측 담장너머엔 제물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그 옆에 300년 묵은 배롱나무가 선연히 다홍빛을 머금고 있다. 그 밖에는 앞서 복례문 양쪽의 소담한 연못과 깔끔한 뒷간이 이곳에서 볼거리이다. 

이쯤 둘러보았으면 사람들의 발길은 으레 시원한 누마루인 만대루에 어김없이 오르게 된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누구나 품어주는 이 열린 공간에서 문화적 향유와 풍류에 젖고 싶은 것이다. 한편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백사장으로 나가 낙동강에 알몸으로 땅 헤엄을 치며 병산 위로 번지는 구름을 따라가는 여흥을 즐겼다. 

병산서원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작년 여름엔 안동의 선배를 만나기 전날 밤, 관리소에 짐을 풀고 만대루에 올라 앉아 달빛이 이울 때까지 졸면서 근심어린 내 삶의 여정이 바람에 씻기기를 바랬었다. 그 만대루(晩對樓) 바람기둥에 기댄 한 사내의 모습이 이제 그림처럼 떠오른다.

이후 강물처럼 흐른 시간은 일찍이 세계유산이 된 <하회마을>(2008, 이화여대박물관 소장)과 <병산서원의 밤>(2008, 서예가 김양동 소장)을 낳게 했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병산서원’의 인연을 기려 찾아 온 것이다.

달라진 것은 진입로가 모두 포장되었고, 차량도 입구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들어 가는 것이다. 꽃뫼와 병산을 바라보고 강물소리 들으며 걷는 일도 좋은 시간이다. 

나의 여정을 위해 차를 몰아준 이는 이동구 선생(도산서원별유사)이다. 또 그가 소개한 류한욱 선생은 병산서원 별유사(別有司)로 안동하회마을보존회 이사장을 맡은 분이다. 두 사람은 절친, 동갑(72세)으로 세계유산등재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반갑게 인사 나누니 먼저 점심부터 하자고 해 인근 식당에 들린 후 되돌아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반면 목백일홍은 만발하여 다홍빛 꽃밭 서원이다. 예전의 나무를 더 심고 가꾼 결과이리. 이 풍광에 사진작가들이 매료되고 무더위를 무릅쓰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같다.


만대루를 바라보며 입교당 마루에서 류한욱 별유사의 얘기를 듣는데 사진첩이 눈에 띈다. 사계절 병산서원 풍광이 오롯하다. 이 모든 사진은 별유사가 찍은 것이라 하니 ‘사랑하는 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한 외국인 여인이 내게 눈길을 거두지 않다가 반색하니 구면이 아닌가. 며칠 전 진주의 후배와 내 화실(산청 남사예담촌)에 왔던 캐나다인 마그(MARG)이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순례하는 중인데 또 만나다니 기연(奇緣)이라 하겠다. 이렇듯 시공과 국경을 초월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상에 나눌 수 있음은 정녕 행복하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해후를 기약했다.

별유사 류한욱 선생. 그림 / 이호신 화백
별유사 류한욱 선생.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 만대루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 만대루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서원을 돌아보며 서애 선생의 철학을 읽다
풍수형국으로 볼 때 병산서원은 주산이 화산(꽃산)이고 좌, 우청룡의 맥이 흐른다. 마주 보는 병산은 안산(案山)이고 북쪽 원경의 학가산(鶴駕山)이 조산(祖山)이 된다. 그 품에 앉은 서원 앞으로 강이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다. 해서 서원 중에서도 ‘자연과 서원의 앙상블’로 병산서원을 통칭한다.

전경을 살펴보면 배치현상이 특이하다. 강당(입교당) 뒤편의 사당(존덕사)의 제향공간이 전체의 중심축에서 약간 비껴나 있다. 존덕사 묘우 안에는 서애 선생을 주존으로 모셨고, 그의 제자이자 셋째아들인 류진(柳袗, 1582~1635)도 배향하고 있다.

그 중 만대루가 이곳의 중심으로 ‘만대(晩對)’는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해질녘에 마주하기 마땅하고’하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주희도 무이정사(武夷精舍)의 경치를 그린 <무이잡영(武夷雜詠)>의 <만대정(晩對亭)> 시에서 ‘푸르고 가파른 모습 차가운 하늘에 우뚝한데, 지는 해는 푸른 절벽을 비추네’라고 노래하였다.

이 만대루의 이층 일곱 칸 기둥사이로 보이는 병산의 풍광은 자연이 만든 병풍 그림이다. 그것은 안과 밖이 서로 나뉘지 않은 공간속에 감상자와 함께하는 분위기다. 이 아우라는 기대 이상의 감동과 차경(借景)의 감흥을 선사한다. 

서원에서 본 병산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서원에서 본 병산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 전도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병산서원 전도 스케치. 그림 / 이호신 화백

또한 만대루와 함께 조화를 이룬 병산서원의 모든 건축은 자연과 인간의 상생(相生)이다. 그 바탕은 입지의 자연성과 경관의 개방성을 통해 성리학이 추구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닿아있다. 여기에 배향인물인 서애 류성룡의 사상과 삶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그의 많은 저서 중 <징비록(懲毖錄)>이 날이 갈수록 새롭게 읽히고 인구에 회자되는 현상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책은 눈물과 회한으로 쓴 임진왜란 전란사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서애가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것이다.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첫 장에서 저자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사태를 회고한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쓴다고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위정자들이 숙독해야할 필독서이다.

나 또한 서원을 그리면서 부족하나마 인문적 바탕과 이해 없이는 헛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서원유산은 보편적인 한국의 건축양식에 바탕을 두면서, 성리학이 지향하는 이해와 통찰로서 진면모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형의 방위와 경관의 조화를 통한 입체적인 시각이 요구된다. 더하여 현실의 반영까지.

이에 ‘병산서원 전경’을 시도한다. 병산을 근경으로 화면 아래에 병풍처럼 내세우고 강 너머 산과 병산서원으로 구성해 본다. 서원의 입지적 조건을 생각하며. 이른바 보이는 경관이 아니라 수집된 이미지를 화면에 연출하는 것이다.

이러구러 무딘 붓을 떼고 나서 반대로 만대루와 병산의 조망을 떠올렸다. 이미 전에 그린 여름밤 그림이 있기로 이번에는 겨울로 설정했다. 설경의 밤하늘에 뭇별들이 총총한 풍광을…. 그동안 병산서원을 다녀간 계절 중 가장 겨울이 아쉬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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