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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망국의 문턱에서 생을 마감한 지식인의 지조
망국의 문턱에서 생을 마감한 지식인의 지조
  • 노규엽 기자
  • 승인 2017.02.07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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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을 만나다
매천 황현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비통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이다. 사진은 그의 생가 앞에 그려진 벽화. 사진 노규엽 기자.

[여행스케치=광양, 구례] 전국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을 만난다. 불과 100여 년 전, 한일한방수약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가 있다.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자결한 매천 황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했다.

“나에게 죽을 만한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그 어려움을 위해 죽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매천 황현은 경술국치의 비보가 날아든 지 약 1주일이 지나 다량의 독한 아편을 삼켜 자살을 기도했다. 

황현 선생이 자결한 장소인 대월헌 전경. 사진 노규엽 기자

대쪽 같은 선비의 마지막 모습
아들과 동생 황원에게 남긴 글(유서)에는 ‘나라의 녹을 받은 적은 없으나 무너지는 나라를 보며 단 하나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울부짖음(호곡ㆍ號哭)이 적혀 있었다. 독약을 먹었어도 바로 죽지는 않아서 근 하루 동안을 앓았다는 그는, 결국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에게 육성으로 한탄했다.

“죽기가 쉽지 않더군. 내가 약을 삼키려다 입에서 뗀 것이 세 번이었다. 이다지도 어리석었던가.”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던 그가 끝끝내 그 길을 택한 것은, 나라 잃은 설움을 견디지 못한 선비의 정신이 더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천역사공원에 있는 황현 선생의 묘소. 사진 노규엽 기자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묘소와 생가
당시 황현은 구례에 묻혔으나, 현재는 전남 광양의 조용한 시골마을에 묘소가 있다. 그가 절명한 지 100년이 지난 2010년에 그의 고향인 봉강면 석사리에 역사공원을 조성하며 생가와 묘소가 한 동네에 있도록 이장한 것이다. 역사공원에는 황현 일가의 묘소와 함께 그의 일대기를 적어놓은 비석 등이 있어, 잠시 거닐며 그를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황현의 생가는 마을 골목 안, 담 낮은 양옥들 사이에 외따로 초가지붕을 얹고 있어 찾기 쉽다. 그곳에 들러 박경자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니 황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황현 선생은 광양에서 태어나 32년을 살다가 구례 간전면으로 옮겨 16년간 은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구례 광의면에서 8년을 살고 절명하셨죠. 옮긴 곳에서 산 햇수가 절반씩 끊어지는 게 참 공교롭기도 합니다.”

전남 광양 봉강면에 있는 황현 선생의 생가 모습. 사진 노규엽 기자

황현은 광양 태생이나 어릴 적부터 구례에 살고 있는 왕석보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며 학문을 배웠다. 그런 연유로 인맥도 구례에 많았기에 후일 그가 구례로 거처를 옮긴 일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고향을 떠나게 된 계기는 직접 겪은 조선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 불릴 만큼 학문을 쌓았고, 스스로도 공부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던 그는 과거시험에 2번 응시해 모두 급제했지만, 그때마다 지방 출신을 업신여기는 현실과 국정의 혼란을 보고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양의 친구들은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함께 일할 것을 권했으나, 황현은 “귀신의 나라 미친 사람들 속에 끌어들여 나까지 미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느냐?”고 말하며 고향마저 등지고 부패한 세상과 담을 쌓는다.

Info 매천 생가
주소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서석길 14-3

고향을 떠나 구례로 간 황현 선생은 매천샘이라는 샘을 파고 스스로 자를 매천으로 삼는다. 사진 노규엽 기자

구차하지만 살만 했던 구례 생활
구례 간전면 상만마을을 찾아가면 황현이 구례에서 처음 살기 시작했던 기거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가 몸을 뉘였을 가옥이며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우물로 사용했다는 매천샘 자리는 형태를 복원해놓았다.

광양에서 구례로 넘어가는 산골에서 은둔을 택한 그는 ‘구차하지만 살 만한 곳’이라는 뜻으로 ‘구안실’이라 이름 짓고, 매천샘을 파며 스스로 자(字)를 매천으로 삼았다. 그가 지은 천 여 수의 시 중 40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서 지었다고 하니,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만 열중한 그의 심정이 오롯이 남아있는 장소다.

그럼에도 그가 놓지 않았던 세상과의 끈이 있었으니,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역사로 기록함이었다. 입신양명의 뜻은 버렸을지언정 당시의 일들을 기록하는 것을 선비로서의 사명으로 삼았고, “누군들 서릿발 같은 매천의 붓끝에서 온전할 수 있으리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엄격한 잣대로 역사 기술에 매진했다. 이는 후일 <오하기문>, <매천야록> 등의 책으로 엮여, 황현의 눈으로 본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남 구례 월곡마을에는 황현 선생을 기리는 매천사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사진 노규엽 기자

1902년에 이르러 그는 구례 광의면 월곡마을로 이사를 했다. 은둔생활을 끝내고 지인들과 함께 현실적인 활동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인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고, 여전히 부정부패한 정치현실에 분개하며 시를 남긴다.

“한강물도 목이 메고 북악산도 찡그리는데 / 티끌 세상엔 여전히 벼슬아치 우글우글 / 동포들이여 청하노니 역대의 간신전을 살펴보소 / 나라 팔지, 나라 위해 죽은 간신은 없다네”

- <문변 삼수(聞變 三首)> 중 제3수

그는 힘없는 나라의 문제를 교육의 부족함이라 보고, 교육시설인 호양학교 건립에 앞장선다. 외국문물과 학문을 받아들여 백성들이 강건해져야 나라도 강해진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구례 광의면 지천마을에 호양학교가 설립되어 인근 청소년들에게 애국정신과 신식학문을 가르쳤다. 호양학교는 일제 치하에서도 운영되었으나 해가 갈수록 경영난이 심해져 1920년에 결국 폐교되고 만다. 

백성들을 교육시키자는 생각으로 건립되었던 호양학교 복원터. 사진 노규엽 기자

그가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리는 이유
세상에 다시 나와 나라를 바꿔보려는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그 결과가 보이기도 전에 삶을 마감한 황현. 당시 그의 심정은 마지막 시이자 유서이기도 한 <절명시>에 잘 나타나 있다.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 / 槿花世界已沉淪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 秋燈掩卷懷千古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 難作人間識字人

- <절명시> 4수 중 3수(역 : 한국고전번역원 DB)

 

광양읍 우산웰빙테마공원 내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 노규엽 기자

인간 세상의 식자(識字)라 함은 지식인이었던 선비(=황현)를 뜻함이요, 고로 나라를 빼앗긴 설움 앞에 본인이 해야 할 선택을 두고 고민했음이 엿보인다.

그의 실물 사진과 초상화를 보면 몸이 깡마르고 유약해보이면서도 눈매와 자세에서 곧은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생애를 통틀어 보면 세상 일에 섣불리 나서지 않고 본인의 역할에만 집중한 소극적인 모습도 없지 않았으나, 말년에는 소극적이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끝내는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의 선택은 지금 시대의 지식인들이 가져야할 책임감에 경종을 울리는 것만 같다.

한편, 황현이 월곡마을로 옮겨와 마지막까지 살았던 구례의 집터에는 매천사라는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며 그를 기리고 있다.

Info 매천사
주소 전남 구례군 광의면 월곡길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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