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태백] 민족의 영산 태백산에 올랐습니다. 소백산과 함백산을 오르면서 여지껏 남겨두었던 구간입니다. 겨울철에 올라야 제격이라는 태백산…. 여름날 태백산은 거대한 움직임으로 산객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산 아래 있을 때는 산이 그립고, 산 위에 있을 때는 산 아래가 생각나지 않는다! 산행에 좀 재미를 붙이면서 느꼈습니다. 산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스스로 개발한 자기 합리화입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가슴에 담고, 거대한 산맥에서 뿜어대는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새벽같이 차를 달렸습니다. 제천, 영월, 석항, 화방재까지. 함백산 아래쪽 화방재에서 태백산을 타고 도래기재 방향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산악회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가는 산행이라 느낌이 좀 이상야릇했습니다. 긴장감과 기대감…. 차창 밖으로 맑고 고운 햇살이 빛나고 있더이다.
옅게 끼어 있는 안개만 걷히면 산행하기엔 나무랄 데 없는 날씨였지요. 화방재 주유소 옆길로 산을 올랐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풀잎 색깔이 짙어집니다. 여름의 한복판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태백산은 육산입니다. 암릉이 많지 않고 흙이 덮여 있다는 뜻이지요. 육산을 타는 재미는 암릉을 탈 때와 다릅니다. 암릉에서 아기자기한 자태와 스릴을 맛본다면 육산에서는 푸근함과 여유를 느끼지요. 육산을 오를 때는 보너스로 흙냄새를 맡을 수 있고, 숲이 만들어준 그늘을 걷는 시간이 많습니다.
길섶에 야생화들이 예쁜 자태를 뽐내고 피어 있습니다. 자주색 병꽃나무꽃, 노랑색 산괴불주머니, 하얀색 미나리냉이, 연보라색 금강제비꽃 등등. 꽃들이 참 곱습니다. 군데군데 철쭉이 활짝 피어서 시선을 붙들기도 하네요. 아직 활짝 피지 않은 꽃망울을 카메라에 담으며 한 여인을 생각합니다. “이 꽃망울이 활짝 필 때까지 행복하세요!” 이메일을 보낼 겁니다.
숲속에는 취나물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참취, 곰취, 떡취…. 취나물 종류만 구별할 줄 알아도 산꾼 다된 거라던 선배 산객의 말을 떠올리며 취나물 몇 잎을 뜯어 향기를 맡아봅니다. 저는 아직도 취나물들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거든요.
여기저기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산 아래 동네 사는 할머니들이겠지요. 할머니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세 계절을 산속에서 살지요. 나물이 있을 때는 나물을 뜯고, 버섯이 있을 때는 버섯을 따고. 깊은 산길에서 할머니들을 만나면 무척 반갑습니다. 잠깐 스치는 걸음이지만 기어코 인사 한마디 건네고 간답니다. “수고하십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고의 세월이 만들어낸 조각품 주목
첫 번째 능선을 만났습니다. 태백산은 산마루를 타고 걷는 재미가 쏠쏠한 산이지요. 시야가 확 터져서 볼거리가 많고, 그런 만큼 산행이 여유롭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함백산 마루금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습니다.
유일사 갈림길을 거쳐 천제단으로 향합니다. 조그만 암릉을 지나자 주목들이 시선을 끕니다. 겨울이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산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주목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지낸다는 주목. 태백산에 가거든 주목(朱木)을 주목(注目)하라! 우스갯소리 같지만 사실입니다. 태백산에서 주목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다면 다시 올라야 합니다.
밑동에서 허리까지 한쪽 몸이 텅 빈 채로 하늘을 향해 싱싱한 가지를 올리고 있는 나무, 표피가 벗겨져 빨간 피가 흐르는 듯한 나무, 속이 텅 빈 채 앙상한 뼈대로 몸을 가누고 있는 나무, 나뭇잎은 물론 가지조차 허옇게 변해버린 나무…. 모두들 기나긴 세월을 비바람과 눈보라를 겪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나무들입니다. 어느 나무는 조각 작품인 듯, 자연 그대로라고 믿기 어려운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주목들은 시선을 빼앗다가 발걸음을 붙잡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다가 탄성을 지르게 합니다. 끈질긴 생명력과 흔들림 없는 기품, 늠름한 자태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누군가 앙상한 갈비뼈만 남은 주목에게 보호장치를 해주었는데, 다른 누군가는 거기다가 흠집을 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흠집에 쓰레기를 쑤셔 박아놓았군요. 산 아래서나 산 위에서나 자연의 혜택을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 자연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재촉합니다.
태백산 주봉인 장군봉(1,567m). 참으로 거대한 고래등같군요. 저 아래 부쇠봉을 거쳐 신선봉쪽으로 쭉 뻗어 있는 산세가 가슴을 쿵쾅거리게 합니다. 신록이 우거진 산등성이를 보노라니 이 산의 몸매가 참 잘 빠졌고, 여기저기 불끈 솟은 근육질 몸매는 매우 섹시해 보입니다. 태백준령, 백두대간! 땅속으로 흐르는 기운이 산등성이 위로 흐르고 있습니다. 쿵쾅거리는 에너지가 불룩불룩 산을 흔들어대는 듯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언제 누가 쌓았는지 모르지만 돌로 쌓아놓은 천제단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천제단. 어쩌면 천제단이 백두대간의 등뼈를 누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건강미 넘치는 태백준령의 야한 꽃들
새해 아침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다는 태백산. 일출을 보며 새해 소망을 빌면 그 소망이 이뤄진다는 전설을 가진 산. 조선 초기 억울한 죽임을 당한 단종 임금이 사후에 이 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산.
태백산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과연 한밝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멀리 남북으로 소백산과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산마루가 꿈틀거리다가 여린 날개짓을 합니다. 거대한 활등인지, 고래등인지…. 굵게 휘다가 평탄하고 미끈하게 뻗은 둔중한 능선은 참으로 건강해 보입니다. 건강미가 넘치고 활발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태백준령에서 다시 부쇠봉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부쇠봉 너머 왼쪽으로 문수봉이 보입니다. 백두대간은 오른쪽으로 곧추 가야 합니다. 오른쪽 계곡에는 군부대 훈련장이 있다네요. 저 멀리 산 중턱에 포탄을 맞은 듯한 상처가 보입니다. 백두대간을 타다보면 포탄을 맞은 상처와 포크레인으로 헤집어낸 상처, 폭약으로 무너뜨린 상처들을 심심찮게 마주합니다. 그때마다 쓰린 입맛을 다시다가, 혀를 차다가, 혹은 한숨을 뱉으며 스쳐 지나칩니다.
철쭉이 숲을 이루고, 자작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빨간 앵초가 야리야리한 자태로 방긋 웃고 있고, 하얀 꽃잎에 노랑색 점을 찍어 놓은 노랑무늬붓꽃이 시골 처녀같은 수줍은 시선을 던집니다.
보라색 얼레지가 야한 포즈로 유혹을 하네요. 얼레지는 유독 태백산에 많은가 봅니다. 예전에 태백산 당골 계곡에서 문수봉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 중간에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거든요. 얼레지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카메라에 몇 송이를 담은 뒤 발길을 돌립니다. 꽃님아, 안녕! 태백준령 깊은 산중에 살아남아야 할 꽃들,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