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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겨울 산행] 곰배령 산장의 고습고 따스한 밤 친구야, 눈 내린 곰배령에 가보지 않을래?
[겨울 산행] 곰배령 산장의 고습고 따스한 밤 친구야, 눈 내린 곰배령에 가보지 않을래?
  • 김은주 객원기자
  • 승인 2007.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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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눈내린 곰배령의 모습.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인제] 올 겨울에야 겨우 겨울 곰배령 모임을 꾸렸다. “눈 내린 곰배령도 참 근사할 거야, 그지?” 꽃이 없는 겨울 곰배령에는 꽃 대신 하얀 눈이, 그리고 별이 가득했더랬다. 

꽃잎을 살짝 뒤로 젖힌 채 피어 보는 이의 마음을 소리 없이 설레게 하는 얼레지, 보랏빛의 날렵한 꽃잎이 바람에 황홀하게 흔들리는 현호색, 볕드는 양지마다 곱게 피어나는 노랑양지꽃, 바람 불 때마다 그 바람 따라 가볍게 날아갈 것만 같은 바람꽃, 눈으로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감한 작은 앵초…. 이 모든 봄꽃의 향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바로 곰배령일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정상의 너른 풀밭에는 어디를 밟고 서야 할지 망설여질 정도로 꽃들이, 키 낮은 풀들이 곱게 피어나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을 만들고 있었다. 곰배령에 처음 다녀온 뒤 내내 그 정상의 꽃이 몹시도 보고팠고, 그리웠고,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함께 갔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봄의 곰배령을 함께 넘었던 친구들 가운데 한 녀석은 남미 언저리를, 또 한 녀석은 필리핀의 한 섬을 헤매고 있고, 짝이 없었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제 짝을 찾아갔다. 그래도 함께 했던 추억은 참으로 힘이 세서 언제고 모이기만 하면 “우리 언제 또 곰배령에 같이 가지?” 하면서 안타까워하곤 했다. 

곰배령에 도착한 것은 오후 무렵이었다. 날씨가 꽤 좋았는데도 강원도에 접어들면서부터 겨울이 아주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산자락에 뿌려진 눈들은 응달이 아닌 곳에서도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고, 인제에 접어든 뒤부터는 본격적인 설산의 풍모를 선사해 주었다. 

진동리에 가까워지면서는 바람조차 달라져서 현리를 거치고 쇠나드리를 지나자마자 도로는 ‘눈길’ 그 자체였다. 조심조심 찾아간 곰배령 아랫마을 진동리의 ‘설피산장’에서는 안주인 신은숙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산장지기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설파산장.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설피산장’이 있는 설피밭은 오래 전에는 화전민들이 살던 곳이라 했다. 그만큼 깊은 산골이었다는 말이다. 지금이야 펜션이다 민박집이다, 눈을 시끄럽게 하는 건물이 많이도 들어선 곳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는 사람만 겨우 찾아오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우리가 머물 곳은, 눈이 많은 깊은 산골에서 눈길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신던 신발 ‘설피’의 이름을 따 ‘설피산장’이라 이름 짓고 남편 이이락씨가 손수 지은 산장이다. 황토와 벽돌, 나무로 정감 있게 빚은 집이다. 집을 ‘빚었다’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었다. 산장 한가운데 환하게 타오르는 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을 때마다 빨갛게 튀어오르는 불꽃들이 말할 수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요새는 먹고살기 힘들어서요. 저 집도 팔려고 내놓았는데 뭐….” 
주인집 1층에 있는 찻집에서 차 한 잔씩을 청해 마시는데, 남편 이이락씨가 어두운 얼굴로 털어놓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산장 입구에 ‘급매물’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달큼하면서 씁쓸한 마가목차는 목으로 술술 잘도 넘어갔지만 정작 그 곳에 살고 있는 부부의 마음은 평화롭지 못한 듯했다. 

무엇이든 변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십 년 만에 삶터를 정리할 결심을 해야 하는 두 사람을 보는 마음이 편치가 않더라. 두 딸 다원이와 우란이를 위해 만들어 둔 눈썰매에 담긴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곰배령이 아닌 곳에도 저렇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을까….

차를 마시고 나왔더니 강아지 ‘우남이’가 사람들이 반가워서 난리법석이다. 며칠 전에 주인 아저씨 따라 곰배령에 올라갔다가 멧돼지랑 한판 붙었는데, 그만 어금니에 엉덩이를 떠받혀 아직도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다 했다. 아직 첫 돌을 지나지 못한 녀석이니 멧돼지가 무서운지 어떤지 알 턱이 없었던 거지.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또다른 산장지기 우남이.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주인집 1층에 있는 찻집.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엉덩이 상처를 핥다가 말고 내 다리에 엉겨붙어 놀아 달라 떼쓰는 것이 영락없이 철없는 막내동생 같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삼겹살 굽다가 우남이 생각이 나 어두운 밤길을 되밟아 내려와 고기 몇 점 던져주고 싶어질 수밖에.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타닥타닥 맛있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불판 위에서 삼겹살도 지글지글 익어 갔다. 산장 스피커의 성능은 참으로 훌륭해서, 긴 밤 내내 콘서트 장에 온 것처럼 음악 또한 신나게 즐길 수 있었다. 신은숙씨가 손수 담근 마가목주까지 곁들여지니 금상첨화였다.

마가목주 덕인가. 마음도 더워지고 몸도 더워져서 바깥바람을 쐬러 오가는 친구들의 발걸음이 잦다. 초저녁에 설핏 구경한 밤하늘에 기대보다 별이 적다고 툴툴대던 한 녀석이 별구경 하러 나오라고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죄다 옷을 껴입고 나가 목을 꺾어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 미치게 고운 별이, 별무리가, 찬란한 하늘의 눈물이 아롱지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의 하늘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태초의 아름다움이 그곳에는 있었다. 

깊은 밤을 소요하게 하는 한 무리의 인간 동물들 때문에 진동리의 개라는 개는 모조리 어둠을 짖어 대고 있었지만, 뭐 어떠랴, 그 소리 또한 기껍고 고맙게 느껴지는 터였다. 길 바로 아래 계곡에서는 얼음 아래를 흐르는 맵찬 겨울 물소리가 또한 쨍하게 들려오고 있었으니, 우리는 달빛 아래 환하게 빛나는 눈길 위에서 마음껏 행복했다.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난로에 넣을 장작을 패는 도끼.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초저녁부터 시작된 긴 술자리를 접는 것은 사뭇 섭섭한 일이기도 했으나, 이른 아침부터 곰배령에 오르려면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자리를 치우고도 한참이나 아쉬움을 접지 못한 우리들은 난로 주위에 동그랗게 몰려 앉아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즐겁고 간질간질한 시간을 이어 갔다. 

겨울 5일장에 가면 언제고 만날 수 있었던 화톳불빛이 저렇게 따뜻했고, 어린 날 할머니가 불쏘시개로 한 번씩 뒤집어 주시던 화롯불이 또 그렇게 고습고 따스했더랬다. 곰배령의 겨울밤은 그렇게 고소하게 저물어 갔다. 

곰배령은 입산통제 지역이라 가기 전에 꼭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쨍한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날씨 소식은 별로 밝지가 못했다. 강원도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고, 영동 지역에서는 이미 폭설 때문에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다.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도 없는 그곳에도 전화기는 멀쩡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어서 온갖 소식이 다 들려왔다.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곰배령 가는길. 2007년 1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아쉬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출근을 포기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운전해서 돌아가야 할 길이 먼데 예서 길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짧은 아침 산책으로 마음을 달래고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고 눈 속에 그대로 얼어 있는 배추밭을 지나고, 눈 쌓인 계곡도 건너고, 눈길을 즈려 밟으면서 곰배령 산길 입구까지 걸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들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정갈하게 아름다웠다. 사람이 가 닿지 못하는 먼 산들이 먹장구름을 이고 장엄하고 비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눈 속에 갇힌다 해도,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이런 곳에서라면 한 세월 세상 잊고 편안하겠구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제멋대로 마음을 떠돌았다. 

짧은 눈싸움에도 온몸은 흠뻑 젖었지만 몸도 마음도 말할 수 없이 가벼웠다. 우리들은 아마 또 오랫동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또 언제 곰배령 가지?” 하고 말이다. 돌아온 서울에도 눈은 내렸다. 하지만 그 눈은 곰배령의 눈과는 많이, 아주 많이 달랐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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