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겨울 산행] 산중 평원이 일품인 합천 황매산 온 가족이 다같이 떠난 겨울산행
[겨울 산행] 산중 평원이 일품인 합천 황매산 온 가족이 다같이 떠난 겨울산행
  • 이수인 기자
  • 승인 2007.01.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온 가족이 함께 나선 겨울 황매산 산행.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여행스케치=합천] 시아버님의 생신이 연휴와 겹치면서 도시 살던 삼남매가 시골 고향집에 모였다. 큰아들네인 우리 부부가 먼저, 둘째인 시누이가 뒤를 따랐고 생신 전날에는 막내인 도련님이 여자친구와 동행했다. 명절 아닌 때에 온 식구가 다 모이긴 처음이다. 20살 이후 온 가족이 함께 길을 떠나보기도 처음이란다. 

거창 읍내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동안 산길을 달려야 하는 산골. 부모님 두 분이서 농사를 지으신다. 장성한 자식들은 서울과 대구에서 각자 도심살이를 하고 있다. 그나마 대구에 사는 딸과 막내아들은 시골 고향집을 자주 찾는 편이지만, 거리가 멀고 바쁜 탓에 장남이면서도 명절이나 휴가때 잠시 쉬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름에야 잠시 머물러도 농사일 돕기 바쁘지만, 농한기의 시골은 참 적막하고 한가롭게 흘러간다. 뜨끈한 구들방에서 찜질이라도 한듯 땀 흘리며 자고 난 아침이다. 온가족들이 모였으니 간단히 채비하여 길을 떠나보자고 의견이 모였다. 

합천호 푸른 물속에 산자락을 살포시 담그고, 하봉, 중봉, 상봉 등 세 개의 꽃봉우리로 정상을 이루어 수중매로 불리는 황매산은, 봄에는 철쭉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이 함께하며, 가을에는 억새가 산을 감싸고, 겨울에는 새하얀 눈과 혹한 바람으로 매서운 겨울 산의 맛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황매산의 백미라면 단연 황매평원이다. 북서쪽 능선 정상을 휘돌며 수 만평에 걸쳐 펼쳐진 산상평원은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이다. 최근 드라마 <주몽>에서 주인공이 해모수에게 무술을 전수받고, 부자간의 애절한 정을 나누는 장면들이 촬영된 곳도 이곳 황매평원이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어머니와 딸, 그리고 미래의 며느리. 미소가 예쁘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돌아래에서 물이 올라온다는 돌팍샘.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해발 1,108m의 황매산에 쉽게 오르는 방법은 차량으로 가회면 둔내리의 이 평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영화주제공원 공원 옆으로 난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뒤 300m정도의 해발고도를 올라 정상에 이르는 것이다. 

산을 자주 찾는 어른들과는 달리 가벼운 평상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산행들머리를 잡으시는 아버님의 뒤를 마치 열을 맞추듯 따라 오른다.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도 물러가고 날이 포근하여 산행하기 좋겠다 했더니, 그간 꽁꽁 얼었던 땅이 녹아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신발밑창에 들러붙는 진흙더미로 금세 발이 무거워진다. 한번씩 돌부리에 발을 툭툭 치며 걷는다. 

오월이면 드넓은 평원이 모두 붉은 철쭉꽃밭이 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철쭉가지들이 산행로 안쪽까지 길게 뻗어 있어 길을 지나는 것이 아닌 헤치며 올라가야 할 지경이었다. 

“개꽃 참 많제? 생긴 거는 요래 진달래처럼 생겼어도 먹을 수가 없어 개꽃이야.” 조심조심 따라 오는 자식들을 돌아보며 아버님이 한마디 던지신다. 

등산로를 따라 한 5분간 올랐을까. 빽빽하던 철쭉가지들이 옆으로 화악 물러서면서 연못같은 샘 하나가 나온다. 돌아래에서 물이 솟아오른다고 해서 ‘돌팍샘’이라 이름 붙여진 곳으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 한다. 샘에 도착한 가족들은 달고 시원한 물을 한 바가지씩 들이킨다. 어머님은 벌써부터 힘들어하는 막내아들의 여자친구 성희씨가 걱정되는지 괜찮냐며 물 한바가지를 건네준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영차영차, 아이구 숨차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황매산이 처음인 영란씨가 엄마와 함께 구경가는 중이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철쭉밭을 모두 헤쳐 오르자 갑자기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산중에 이런 너른 벌판을 보기가 처음인지 다들 와~ 탄성을 터뜨린다. 모산재에다 기암괴석 삼라만상을 지은 선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하기 좋도록 터를 닦아 놓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이곳은 드라마와 영화의 장쾌한 한 장면을 위한 촬영지가 되고, 산 맛을 찾아오는 산객들의 지친 다리를 쉬어가는 평탄한 길이 되고, 따뜻한 봄날이면 도시락 싸서 온가족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시누이의 바람이 되고 있다.

평원 위에 얹어놓은 듯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커플끼리 앉아 보라 주문하자, 눈치빠른 어머님이 “니는 아빠옆에 앉아라” 하신다. 짝이 없어 울상이던 아가씨가 냉큼 아버지 팔장을 끼며 헤헤거린다.

봉우리로 향하는 계단을 조금 오르자 험난한 코스가 이어진다.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가파른 바위산이다. 조금씩 숨이 차오른다. 중간쯤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어머님은 남자들의 배낭속에 바리바리 챙겨온 먹을거리를 꺼내신다. 헥헥거리며 땀을 닦는 가족들이 먹는 거라곤 음료수가 고작이건만 손 큰 시골 어머님은 귤이며 사과에다 묵직한 배까지 이것저것 참 많이도 챙기셨다. 

다시 산행이 시작되고 하봉의 정상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굴색이 노래진 성희씨를 데리고 도련님과 어머님은 먼저 내려가기로 하고 아직 체력이 남은 몇몇은 중봉까지는 올라보자고 결정했다.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저기가 지리산? 상봉쪽을 바라보는 아버지.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봄을 기다리는 황매산의 겨울산세. 2007년 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조금 위태위태해 보이는 바위산을 아버님이 앞장서며 안전한 길로 안내한다. 그러면 장남인 영섭씨가 뒤에 오는 여자들을 잡아 끌어주어 힘들지 않게 중봉까지 올랐다. 

중봉의 정상에 선 아버님은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능선을 가리키며 지리산이라고 일러준다. 학생시절 몇 번 지리산을 올라봤다는 영섭씨는 지리산이라는 말만 나오면 괜스레 흥분하여 이것저것 알은체를 한다. 소싯적에 올랐다는 지리산 얘기를 귀가 물리도록 들어온 탓에 그만하지 싶은 나와는 달리 여동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착한 동생이다. 

산 아래 펼쳐지는 드넓은 평원도 멋있지만 기암괴산 모산재가 장관이다. 그 너머엔 천년 고찰터인 영암사지가 숨은 듯 앉아 있을 것이다. 지난 여름 그 앞에서 마셨던 동동주가 참 맛깔나고 시원했는데…. 아버님과 잘 아신다는 그 할머니는 지금도 저기에서 파전을 구우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근처에 토종 닭백숙을 하던 집도 여럿이던데 오늘은 우리가족이 몸보신 하는 날이려나. 하산길이 아직 먼데 벌써부터 배가 고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