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특집 ③ 봄소식을 찾아] 통영·욕지도 바닷바람에 실려온 봄 이야기  푸른 바다에서 봄을 보다    
[특집 ③ 봄소식을 찾아] 통영·욕지도 바닷바람에 실려온 봄 이야기  푸른 바다에서 봄을 보다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8.03.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햇살이 부서지는 통영 바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통영] 봄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매화의 가녀린 분홍이나, 싱그러운 연초록이나, 개나리의 노랑이 흔하다. 그러나 통영의 봄은 단연 ‘투명에 가까운 파랑’이다. 겨우내 검푸른색으로 무겁게 침잠했던 바다는 살랑거리는 봄 햇살에 빗장을 풀고 슬며시 속을 보여준다. 기쁨의 표시인지 깊숙이 감추고 있던 금빛 비늘까지 잔물결 위에 쏟아놓았다. 

투명에 가까운 블루, 통영의 봄 
통영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중앙활어시장이 있는 동호동이다. 바다를 한눈에 보자면 달아공원이 제격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조금 더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바다내음을 맡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통영 지도를 들고 항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길 가던 한 아주머니가 흘금흘금 쳐다본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더니 급기야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혼자 놀러 왔어예?” 하고 말을 붙인다.
“네, 통영에 처음 왔는데 어디 경치가 좋아요?”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양지바른 곳에서 벚꽃이 조용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에 펼쳐진 통영 지도를 반갑게 집어든다. “저 아래께 보이는 미륵산 안있습니꺼. 고마 그기가 진짜 좋아예. 쪼 아래 케이블카 공사한다카대. 쪼매 있으믄 더 좋아질 낀데. 함 가보이소.” 

날이 따뜻해서 저 바다 건너편의 미륵산은 온통 해무에 둘러싸였다. 그 안개 너머로 수묵화로 그려낸 듯 부드러운 곡선의 미륵도가 있다.

미륵도는 통영대교, 충무교 두 개의 다리와, 통영의 명물인 해저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섬이다. 미륵도 아래쪽에 요트가 줄지어 있는 이국적인 풍광의 충무마리나 리조트가 있다. 도로변에 동백꽃이 줄지어 피어 있는 곳. 섬 외곽을 따라 일주도로(산양일주도로, 23km가량)가 잘 나 있어 드라이브도 그만이지만, 이왕이면 충무관광호텔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수륙-일운해안도로를 도보나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마을 전체가 예쁘게 색칠되어 있는 통영 동피랑마을.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통영의 대표적 봄 먹을거리 도다리쑥국.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이곳에선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 느긋하게 바다를 만끽할 수 있다. 지척에 푸른 바닷길이, 한쪽에는 동백꽃이 핀 한적한 길을 따라 즐기는 호사는 가히 백만 불짜리다. 미륵도 뒤쪽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석양 풍경이 기가 막히다는 달아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봄이면 통영사람들이 충무김밥 싸들고 찾는다는 미륵산도 빼놓을 수 없다.

절기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항구엔 파란 바다, 파란 하늘엔 흰 갈매기가 끼룩끼룩 춤을 추고 있다. 한참을 이놈들과 눈씨름을 해가며 이리저리 바다를 파노라마로 구경하다 고개를 돌리니 언덕 위 빽빽한 집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중앙시장에선 마을이 지척이다. 바다 바로 코앞에 가파른 언덕을 따라 민가들이 담을 잇대고 들어서 있다. 옥상 위 빨래들이 팔랑거리는데, 둥근 햇살이 그 위로 잘게 부서진다. 이 동네는 적산가옥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다,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작은 골목길들이 있어 이채로운 분위기를 준다. 특히 언덕 맨 위쪽엔 마을 전체가 예술적으로 칠이 되어 있는 동피랑마을이 있다. 사진 찍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둘러볼 만하다. 언덕길 위에서 마을 지붕 너머로 파란 바다를 감상하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서정적이다. 

동피랑마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항구 끝 양지바른 길에 봄 햇살을 즐기며 장기를 두는 노인과 곁에서 훈수를 두는 구경꾼 열댓 명이 둥그렇게 모여 있다. 또 저 아래쪽엔 출어를 위해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몸놀림이 바쁘다. 뉘 집 대문 안쪽에는 빨래줄에 걸어놓은 아귀가 한창 좋은 햇살에 꾸덕꾸덕 태평스레 말라가고 있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동피랑마을 위에서 본 통영 항구 모습.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통영의 봄은 입에서 완성된다
통영이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 중엔 풍광이 아름답다는 것도 있지만, 사시사철 먹을거리가 풍부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통영의 대표적인 어시장 서호시장과 중앙시장엔 굵직한 멸치가 제철을 맞아 한창 출하되고 있다. 아구, 민어, 숭어, 문어, 조기 외에도 이름도 다 모르는 생선이 가득하다. 

이중 봄의 참맛은 도다리다. “봄 도다리라 안캅니꺼. 아직 살이 덜 올랐는데, 쪼매 있다 살이 더 통통하게 오르면 회가 끝내줍니더.” 잠시 일손을 쉬고 따뜻한 햇살에 아래 담배를 피우는 한 어부의 이야기도 함께 팔팔 뛴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눈부신 햇빛에 잘도 말라가는 생선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서울 사람들에겐 아직 도다리의 진가가 그리 높지 않다. 생김새가 광어와 비슷해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바다와 근접하게 살아온 이곳 통영사람들은 광어보다 도다리의 맛을 더 윗길로 치는 모양이다. 여기에 겨우내 엄한 추위를 이기고 막 얼굴을 내민 쑥을 넣어 도다리쑥국을 만드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통영의 봄맛이다. 봄 쑥은 다른 나물보다 훨씬 향도 강하고 항암효과가 뛰어나 나른하고 지치기 쉬운 봄철에 기운을 북돋우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한다.  

도다리쑥국의 국물은 시원하고 맑은 맛을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깔끔하다. 무엇보다 향긋한 쑥 향기가 혀에서 코끝으로 휘돌아 감긴다. 여기에 칼칼한 맛의 고추가 듬뿍 들어가 ‘시원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눈처럼 흰 도다릿살은 깔끔하면서도 의외로 살이 깊다. 

갈치처럼 감칠맛이 나지만 그보다 살이 실해 씹는 맛도 제법이다. 정량동 안쪽의 한산섬식당이 도다리쑥국 맛으론 통영에서 제일간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욕지도 해안길을 따라 하루 3회 운행하는 마을버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원하는 것을 안다는 섬, 욕지도(欲知島)
통영에서 제법 내실 있게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토영마실’의 박창호 대표는 통영 항구도 좋지만 제대로 된 봄을 만끽하려면 욕지도를 꼭 가봐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주었다. 통영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하는 말이니 아마 틀림은 없을 게다. 

욕지도는 통영에서 32km 떨어져 있으며 정기여객선을 타고 약 1시간가량 가야 하는 섬이다. 우리나라의 3500여 개의 섬 중에 44번째 크기이니, 그리 적지 않은 규모다. 낚시꾼들은 욕지도를 모르면 제대로 쳐주지도 않을 정도로 돔, 볼락이며 학꽁치 등 어족이 풍성하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여행철이 시작되지 않은 터이기도 하지만 여행지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 욕지도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동안 느긋하게 한려해상공원의 수려한 경치를 눈에 담는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초봄에 올라오는 쑥.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욕지도에 도착하니 바로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이 마을버스를 타고 욕지도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는 말을 들은 터라 냉큼 버스에 올라탔다(마을버스는 뱃시간에만 맞춰 운행을 한다. 그러나 버스 운행 횟수가 적고, 마을에 택시가 없어서 자동차나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동네 사람들인지라 승객들은 버스 앞문에서 “안녕하십니꺼” 하는 인사를 하고, 일단 올라탄 뒤에는 각자 안부를 묻기에 바쁘다. 쑥을 캐온 할머니에게는 “우데서 이래 많이 땄어예?” 하고 물어보고, “고마, 식사는 하셨습니꺼?” 하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버스 안은 다방처럼 소란스럽다. 요즘 마을 관심사가 뭔지 살짝 귀동냥이나 할까 했더니, 억양도 그렇고 사투리도 그렇고 도통 알아듣기가 힘들다. 문장 끝의 어미만 간간이 들릴 뿐이다. 나중에 들었더니 이곳 사람들은 ‘아’ 발음이 잘 안 되어 ‘팥’은 ‘폿’이고, ‘파’는 ‘패’고, ‘팔’은 ‘폴’, ‘달달이(매달)’은 ‘들들이’이라 한단다. 애초에 그런 까닭을 모르는 나는 영어듣기시험이라도 치르는 기세로 열심히 귀를 세우고 있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푸른 바닷가에 소박하게 자리잡은 욕지도 모습.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그나저나 버스를 타고 도는 길이 정말 환상이다. 환상적인 기암절벽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있는데 그 옆을 꾸불꾸불한 외길로 소박한 마을버스가 돈다. 여기를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면 얼마나 억울했을 일인가. 여행서 중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게 있는데, 이곳이야말로 죽기 전에 꼭 한번 와볼만 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바다를 따라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비탈엔 돌담으로 경계를 만든 밭이 오밀조밀 펼쳐져 있고, 양지바른 곳에 보리가 푸른 싹을 올리고 있다. 드문드문 쑥을 캐는 아낙네의 모습도 눈에 띈다. 이곳에서 캐낸 쑥은 모아져 통영 등지에 팔리는데 어제 내가 도다리쑥국으로 먹었던 쑥도 혹시 이곳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버스 안으로 봄 햇살이 가득 찼다. 떠날 때 입고 온 외투를 처음으로 벗었다. 버스 창문을 살짝 열어 욕지도의 봄을 가득 들이마신다. 봄이 무엇을 원하는지(欲) 섬은 진작부터 알고(知) 있는 모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