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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특집 한옥여행] 2200년의 역사, 440년 이어온 대동구림계… 과거로의 시간 여행, 전남 영암 구림마을
[특집 한옥여행] 2200년의 역사, 440년 이어온 대동구림계… 과거로의 시간 여행, 전남 영암 구림마을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8.06.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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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전남 영암 구림마을.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영암]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꼭 꿈같다. 그 나지막한 한옥 담장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누비고 다녔다. 마을 앞 500년 가까이 된 정자에 앉아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과 한가로이 놀았다.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종택 마당에 한참 동안 서서 오랜 영화(榮華)를 상상해보았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한 듯 2008년 서울과는 전혀 다른 세상, 영암 구림마을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얼핏 보면 다른 마을과 그리 다르지 않은 수수한 정경이다. 동네 입구에 작은 슈퍼가 있고, 아기자기한 시골 초등학교가 있고, 나무 그늘 아래 털썩 앉아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도 여전하다. 

그러나 이 작은 정취만 잠시 즐기고 그냥 자동차를 몰아 휑하니 가버리면 아마 평생 구림마을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 것이다. 구림마을의 진가를 보려면 차를 세우고 안쪽의 마을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마치 결승 테이프를 끊은 뒤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듯, 뭔가 심상치 않은 내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림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낮은 토담. 흡사 마을 전체가 이 소박한 토담으로 띠 잇기를 한 듯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 안쪽에는 오래된 한옥의 기와가 작은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현삼식 유사의 집 앞에 죽림정이 있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이곳은 ‘구림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실제 행정구역상으론 영암군 군서면이다. 영암 사람들에겐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월출산이 품에 안은 듯 아늑하게 둘러처져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의 알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역사가 오래된 곳인지라 마을엔 설화까지 내려온다. 이 마을의 최씨 집안의 처자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오이가 하나 떠내려왔다. 이상하게 여겨 자꾸 밀쳐냈건만 오이는 처자 쪽으로 계속 올라왔고 결국 오이를 건져 먹었는데 이후 아이를 잉태하여 낳게 되었다. 처녀가 아이를 낳자 집안에선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몰래 숲에 버리고 말았다. 

한참 뒤 모성애는 어쩔 수 없었는지 어미가 아이를 버린 곳에 다시 찾아갔더니 아이를 비둘기들이 보호하며 키우고 있더란다. 이에 아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데려다가 키웠는데 후에 풍수지리의 시조인 신라 명승 도선국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비둘기가 아이를 키운 숲 마을이라 하여 구림(鳩林)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어 내려오게 되었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담 위로 피어난 꽃이 보인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일본의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백제의 왕인박사가 태어난 곳도 바로 이 구림마을이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지금은 연못 크기로 작아진 상대포(上臺浦)와 상대정(上臺亭)이 희미하게 역사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삼한시대부터 2200년을 내려온다는 오랜 역사는 마을 곳곳에 자랑스런 전통과 유적이 빼곡히 남아 있다. 왕인박사 유적지며,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 1200년 전 도기를 구웠던 토기요지 등이 있고, 총 700호 가까이 오랜 한옥과 서원, 정자들이 들어차 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2006년 이곳을 잘 가꾼 자연, 문화유산으로 선정한 바 있다. 

구림마을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가 ‘구림대동계’이다. ‘계’하면 보통 목돈을 만들기 위해 매달 푼푼히 돈을 모으는 것만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곳의 ‘계’는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미풍양속을 선양하고 이상향 건설을 위해 향약 정신을 구현한 모임이다. 1565년(명종 20년)에 처음 결성돼 현재까지 약 440여 년을 이어오고 있으니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실로 엄청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죽정서원을 안내해주신 박준재 어르신. 죽정서원은 1681년 건립되어, 구림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올해 대동계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선발된 현삼식 유사(儒士)에 의하면 계원이 되려면 우선 구림마을 전경 8km 안에서 태어나야 하고, 도덕적 흠결이 없어야 한단다.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다. 계에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단자(單子, 가입원서)를 제출하면 모임에서 흑백의 바둑알로 가부를 결정하는 비밀투표를 행하는데 이때 백색알이 2/3를 넘지 않으면 부결되고 만다. 

가입이 된 뒤에라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행실이 바르지 않으면 내부적으로 제재가 가해졌다. 때문에 대동계원이라고 하면 확실한 신분에 똑바른 인품을 인정받았고, 지금도 ‘혼사 때 구림대동계원이면 내력을 물을 것도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
 
유가의 전통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내려오는데다 향약의 계율이 남아 있는 곳이니 여행자라 해도 행동이 조심스럽다.  

이튿날 아침, 나는 대동계원이자 올해의 왕인박사로 뽑힌 박준재 어르신을 만났다. 처음 한눈에 학자의 풍모가 풍긴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나 평생 교육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단다. 어르신의 안내로 1681년 건립된 죽정서원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죽정서원에 대한 설명은 뒷전이고 기자인 나보다 어르신의 질문이 더 많다.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상대포. 2008년 6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본은 어디인고?”
“고향은 어디인가?” 등등.

간단한 물음임에도 오랜만에 받아보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혹 실수나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그러다 아뿔싸, 결국 걸리고 말았다. 

계속되는 탐문 끝에 과년한 나이를 한참 넘겼음에도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해야 했는데, 아직까지 ‘큰아기’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박준재 어르신에겐 꽤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나중엔 어르신 내외가 함께 근검절약하느라 잘 드시지도 않던 고기에 전복구이까지 사주시며, 마음을 돌려 먹으라며 내내 걱정이시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외형적으로 한옥과 옛 모습을 애써 재현해놓은 전시성 관광지와는 많이 다르다. 오히려 지금까지 선비 특유의 겸손함으로 조용히 숨어 있는 느낌이 더 짙다. 최근 영암군에서는 이곳을 한옥관광단지로 개발하기 위해 총 100억원의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구림마을의 진가는 어쩌면 외형적인 한옥의 감상과 체험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면면히 내려오는 정신적 줄기를 함께 더듬어보는 것, 이것이 함께 병행되어야 구림마을을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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