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서울] 지하철을 타는 서울 시민에게 익숙한 이름 동묘. 하지만 이것의 본명이 동관왕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관왕이라 함은 관우의 별칭인데, 어라? 어째서 관우의 묘가 중국 탁현이 아니라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걸까?
한동안 매일 지하철 1호선을 탄 적이 있다. 짧지 않은 출퇴근길에 지하철만 한 것이 없다. 의정부에서 지하철을 타고 깜박 졸다 보면 늘 동묘쯤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동묘는 왜 동묘인 걸까? ‘동쪽의 무덤’이란 뜻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누구의 무덤일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단박에 답이 나왔다. ‘동관왕묘’, 그러니까 ‘동쪽에 있는 관우의 무덤’이란다.
관우가 활약한 중원에서 수만 리 떨어진 서울의 동쪽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자료를 조금 더 뒤지니 거기에 대한 해답도 나왔다. 보통 죽은 이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의 이름은 ‘~사’로 끝나지만(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가 대표적이다), 관우의 사당은 특별히 묘로 부른단다. 마치 공자의 사당을 문묘로 부르는 것처럼, 관우의 사당은 무묘라 한다는 것이다. 죽어서 공자와 동급이 되다니! 그뿐만 아니라 관우의 경우에는 왕이나 황제 같은 직함이 더해졌다. 그래서 서울 동쪽에 있는 관우의 사당이 동관왕묘가 된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관우가 왜군을 무찌르다
이곳에 관왕묘가 생긴 사연은 이러하다. 때는 바야흐로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조선 땅에서 왜군과 싸울 무렵. 이여송의 군대는 왜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밤까지 이어졌는데, 전세가 불리할 때 하늘에서 관우가 이끄는 신병(神兵)들이 내려와 왜군을 물리쳤단다. 이런 경험을 한 명나라 군사들은 관우의 사당, 즉 관왕묘를 지을 것을 조선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문제는 명나라가 관왕묘 건립을 요청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울에만도 동서남북 4곳에 관왕묘를 세웠고, 지방 곳곳에도 관왕묘 건립을 추진했다. 물론 그 비용과 인력은 고스란히 조선 조정, 정확히는 전쟁으로 고통받은 조선의 백성들이 떠맡았다.
복을 비는 곳에서 시민의 휴식터로
서울의 동관왕묘는 이렇게 지어진 서울의 동서남북 관왕묘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동관왕묘는 제법 커다란 규모를 자랑한다. 덕수궁 돌담길의 축소판 같은 동묘의 돌담길을 걷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정문인 외삼문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솟을대문에 좌우로 쪽문까지 갖췄다. 동관왕묘를 짓는 데 백성과 군인까지 동원해서 꼬박 3년이 걸렸다 한다. 동묘를 짓기 시작한 것이 임진왜란 직후,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난 후라는 걸 생각하면 3년이라는 시간이 꽤나 뼈아프다.
외삼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온다. 담이 없이 덜렁 문만 있는 내삼문 좌우로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눈길을 끈다. 내삼문 뒤로는 긴 수염 휘날리는 관우상을 모신 정전이 보인다. 동묘의 정전은 팔작지붕에 잡상을 세운 것이 언뜻 전형적인 조선 건물로 보이지만, 좌우 외벽을 벽돌로 마무리하고 바깥에 기둥을 세운 것은 중국식이다. 정전 안에는 온통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관우상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관우는 무신이자 재물의 신이기도 하다. 아니, 조조가 하사한 금은보화에 손 하나 대지 않던 대쪽 무사 관우가 재물의 신이라니. 여기에는 그럴듯한 설명이 있다. 평생 믿음을 지켰던 관우는 신뢰의 화신이고, 이러한 신뢰야말로 장사로 돈을 버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암만 봐도 이건 관우도 좋고 돈도 좋은 중국인들의 억지 춘향인 듯 느껴진다.
명나라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지은 관왕묘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선 사람들에게도 관우는 중요한 신이 되었다. 몇 달 전, 이곳에서 조선 최대의 운룡도가 발견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조선의 임금도 자주 찾았다는 관왕묘, 조선의 왕은 관왕묘에서 무엇을 빌었을까? 국가의 안위와 왕실의 안녕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동묘는 명나라 군사나 조선 국왕이 아니라 시민의 휴식 공간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고즈넉한 곳이 있다니.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잠시 내려 쉬어가는 것도 좋다. 혹 누가 아는가? 재물의 신 관왕이 돈벼락이라도 내려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