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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동행 취재] 서울시관광협회 여행상품 개발 팸투어,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동행 취재] 서울시관광협회 여행상품 개발 팸투어,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 민다엽 기자
  • 승인 2023.08.14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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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여행사 대표 및 여행상품개발자 초청 팸투어의 현장을 취지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서울지역 여행사 대표 및 여행상품개발자 초청 팸투어의 현장을 취지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여행스케치=공주, 부여, 익산] 서울지역 여행사 대표와 여행상품 개발자들이 백제의 옛 수도였던 공주부여익산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방문했다. 이들의 모임 현장을 취재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우리나라 중서부에 위치한 백제의 옛 수도였던 3개 도시(공주부여익산)에는 5~7세기 한국-일본-중국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전성기를 이뤘던 백제 후기의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웅진(공주)과 이에 버금가는 별도(別都)’였던 익산,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을 품은 사비(부여)까지, 이 세 지역에 걸쳐 남아있는 백제의 고고학 유적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란 명칭으로 하나로 묶여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지난 2015년 세계인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와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북 익산시에 걸쳐 8곳의 고고학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공주에는 공산성과 무령왕릉(송산리 고분군), 익산에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그리고 부여에는 관북리 유적(부소산성)과 왕릉원, 정림사지, 나성 등이 등재되었다.

(좌)서울시협 국내여행업위원회 김명섭 위원장과 (우)전라북도관광협회 홍광식 전무이사의 기념 촬영. 사진 / 민다엽 기자
(좌)서울시협 국내여행업위원회 김명섭 위원장과 (우)전라북도관광협회 홍광식 전무이사의 기념 촬영. 사진 / 민다엽 기자
웅진백제의 왕도였던 공주의 공산성. 사진 / 민다엽 기자
웅진백제의 왕도였던 공주의 공산성. 사진 / 민다엽 기자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을 그대로 본 뜬 공간. 사진 / 민다엽 기자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을 그대로 본 뜬 공간. 사진 / 민다엽 기자

백제 문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웅진(공주)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 나당 연합군(신라당나라의 연합)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고대 국가로, 당시 고구려, 신라와 함께 한반도에 형성된 초기 삼국 중 하나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빠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일찍이 근초고왕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격파, 빠르게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큰 이점을 가졌던 백제는 종교예술건축 등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중국-백제-일본을 잇는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고 국가 형성이나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시)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웅진이었을까? 무령왕릉과 왕릉원 이후, 최대의 발굴지로 평가받는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들을 살펴보면, 당시 웅진에는 한성 중앙세력에 버금가는 상당한 수준의 귀족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강력한지지 세력을 기반으로 천도에 따른 기존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새로운 도읍의 왕권도 강화할 목적이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로 알려져 있다.

2015년 공산성을 비롯해, 공주ㆍ부여ㆍ익산에 걸쳐 총 8곳의 백제역사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 / 민다엽 기자
2015년 공산성을 비롯해, 공주ㆍ부여ㆍ익산에 걸쳐 총 8곳의 백제역사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 / 민다엽 기자
공산성 성곽을 따라 가볍게 산책할 수 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공산성 성곽을 따라 가볍게 산책할 수 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입구. 사진 / 민다엽 기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입구. 사진 / 민다엽 기자

무령왕은 금강이 굽어 흐르는 야산에 흙으로 성을 쌓고 왕성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538),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던 무령왕이 집권하면서 다시금 후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꽃피우기도 했다. 원래는 토성이었던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돌로 성곽을 다시 쌓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금강을 낀 공주시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더불어 공주 무령왕릉왕릉원 전시관에 방문하면 무령왕릉을 비롯해, 다양한 귀족들의 고분 내부의 모습과 함께 출토된 유물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익산에는 백제 최대 규모의 왕궁터와 사찰이 있다
흔히 백제 문화권을 대표하는 도시로 공주와 부여를 꼽으며, 익산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익산에 남아있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에서 나온 유적·유물들을 살펴보면, 당시 익산은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에 버금가는 중요한 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유물이나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그 진실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지나 유물들에 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익산에 대한 가치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백제 불교 예술의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 사진 / 민다엽 기자
백제 불교 예술의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 사진 / 민다엽 기자
미륵사지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 사진 / 민다엽 기자
미륵사지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 사진 / 민다엽 기자
미륵사지를 비롯해 익산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 중이다. 사진 / 민다엽 기자
미륵사지를 비롯해 익산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 중이다. 사진 / 민다엽 기자

실제로, 익산 왕궁리 유적지에 남아있는 왕궁터의 규모는 929,791로 백제시대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또한 최근 발굴조사에서 전각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와 정원 시설 등 궁성 관련 유구와 1만 여점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면서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힘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백제가 당대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를 이곳에 세웠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찰 중앙에는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미륵사지 석탑이 남아있다. 특히, 지난 20091층 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舍利)와 기록을 통해 건립연대가 639년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현재는 더욱 확실한 고증으로 복원하기 위해 절반 정도 무너져 내린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

1965년에 해체된 미륵사지 오층석탑 제1층에서 발견된 도금은제 금강경판. 사진 / 민다엽 기자
1965년에 해체된 미륵사지 오층석탑 제1층에서 발견된 도금은제 금강경판. 사진 / 민다엽 기자
미륵사진 복원도. 사진 / 민다엽 기자
미륵사진 복원도. 사진 / 민다엽 기자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사진은 복원중인 미륵사지 석탑. 사진 / 민다엽 기자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사진은 복원중인 미륵사지 석탑. 사진 / 민다엽 기자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부여)
538년 백제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사비는 금강을 통해 해상교통의 중요한 요지였으며, 웅진에 비해 비교적 넓은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탓이다.

성왕은 사비 천도를 통해 지배 질서 확립과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나성을 축조하고, 왕궁을 보호할 군사시설과 일반인이 거주할 구역을 구획하는 등 계획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중 사비 시가지 북쪽에 있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에서 왕궁의 주요 시설과 정교하게 조성된 토성이 발견되면서 관북리 유적이 왕궁터임이 밝혀졌다. 관북리 유적지는 현재까지도 발굴 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뒤편에 있는 부소산성은 평소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전투 시에는 방어성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의자왕과 삼천 궁녀 이야기가 전해지는 낙화암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사비의 마지막 왕궁터 부여 관북리 유적. 사진 / 민다엽 기자
사비의 마지막 왕궁터 부여 관북리 유적. 사진 / 민다엽 기자
황포돛배를 타고 부소산성과 낙화암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황포돛배를 타고 부소산성과 낙화암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부여 부소산성의 뒷편에 흐르는 백마강에서 본 낙화암. 사진 / 민다엽 기자
부여 부소산성의 뒷편에 흐르는 백마강에서 본 낙화암. 사진 / 민다엽 기자

최근에는 삼천 궁녀를 거느리며 사치를 일삼아 결국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의자왕의 설화는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의자왕의 방탕함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과감한 영토 확장과 신중하고 사려 깊은 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또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 명의 궁녀는 나라와 남편을 잃은 사비 여성들의 마지막 정절이었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낙화암을 지나쳐 부소산성을 내려오면 이들의 넋을 기리는 자그마한 사찰인 고란사가 있다. 바로 옆 백마강 황포돛배를 타면 부소산성과 낙화암의 모습을 여유롭게 살펴볼 수 있다. 황포돛배는 관북리 유적·부소산성 입구 쪽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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