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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향기 흐르는 여행] 가을 메밀 따스한 봉평에 가자 메밀꽃 필 무렵에 듣는 장돌뱅이 소리
[향기 흐르는 여행] 가을 메밀 따스한 봉평에 가자 메밀꽃 필 무렵에 듣는 장돌뱅이 소리
  • 김은주 객원기자
  • 승인 2006.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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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봉평에 그득 핀 메밀꽃.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여행스케치=봉평] 해는 지고, 빈 밭에 가득 내려앉은 참새들은 사람이 다가가도 날아갈 생각을 않는다. 콩알을 주워 먹는지, 감자를 쪼아 먹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낯선 땅에 도착한 여행자에게 그 풍경은 참 따뜻하고 평화롭다. 어두워지기 전에 숨이 턱에 닿아 툇마루에 뛰어오르며 “엄마, 밥!” 하고 외치던 어린 시절 그 마음처럼, 그렇게 고습고 따스한 풍경이다. 아마, 그 곳이 봉평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봉평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메밀로 만든 음식으로 유명한 봉평은 혀끝에서부터 기억되는 곳이다. 담백하면서도 까칠한 메밀국수를 먹을 생각에 무겁게 내려앉는 저녁 햇살 속을 부지런히 걸어 봉평 시내로 접어들었다. 

“이것도 한번 드셔 보셔요.”
새로 들어선 음식점을 뒤로 하고 제일 오래 되어 보이는 식당을 일부러 찾아 들어선 것이 성공한 모양이다. 삼일식당의 주인은 바지런하고 다정다감해서 손님을 아주 기분 좋게 해 주는 젊은 아낙이었다.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왔다. 순메밀막국수와 메밀전병만 청했는데도, 옆자리 손님들이 시킨 감자송편과 옹심이칼국수까지 한 그릇씩 덜어 우리 자리로 내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맛이라도 보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살가운 말을 건네면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쫄깃쫄깃하고 찰진 맛을 즐길 수 있는 반면 메밀로 만든 음식은 처음엔 거뭇거뭇한 색깔부터 즐기고, 다음으로는 힘들이지 않아도 툭툭 잘 끊어지는 그 투박한 질감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술술 넘어가는 부드럽고 칼칼한 뒷맛을 즐기게 된다.
서울 사람들 입맛에 맞춰서 밀가루를 많이 섞어서 만드는 메밀국수만 먹다가 순메밀막국수를 제대로 맛보게 되니 국물 한 방울까지 남기지 못하고 다 먹어 버렸다. 내가 봉평에 왔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메밀전병 맛이 제대로다.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메밀의 본고장에서 맛보는 순메밀막국수.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하늘 한가운데에 커다란 가로등이 걸렸다. 보름이 멀지 않아서 달빛이 환하다. 메밀밭이 달빛을 받아 소금꽃처럼 환하게 빛나는 순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발에 힘이 붙는다.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의 호를 따서 ‘가산공원’이라 이름을 지은 공원을 지나 그 유명한 물레방앗간 앞에 섰다.

물레방앗간 가는 길은 얼핏 보기에도 몇 해 전과 굉장히 달라졌다. 시간을 이길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하지만, 이효석 생가까지 걸어 들어가던 길에서 더 이상 호젓함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메밀꽃을 보러 오는 이들이 늘어난 만큼, 비어 있던 길가에는 갓 지은 커다란 메밀음식점이 가득 들어섰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메밀꽃 붉은 대궁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힘을 지녔다. 물레방앗간에서 맺어진 허생원과 동이 어머니의 숨겨진 이야기도 그러하거니와, 달빛 속에서 더 환하게 빛나는 메밀꽃 자체가 지닌 은은한 매력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레방앗간 빗돌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말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학교 다닐 때에는 그저 동이와 허생원이 부자지간이라는 암시가 나타나는 곳은 어디인가, 허생원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따위의 시험 문제를 푸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낙엽을 태우면서> 같은 산문에서 느껴지는 이효석의 친일 흔적 때문에 괜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그 탓에 정작 <메밀꽃 필 무렵>에 담긴 아름다운 정경이나 분위기에는 마음을 쏟지 못하다가 메밀꽃이 흐드러진 가을에 봉평을 찾은 뒤에야 이 작품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더랬다.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물레방앗간과 메밀꽃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햇살 아래 부끄럽게 몸을 뒤채는 새하얀 메밀꽃.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이곳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가 있다. 자식이 없는 작은아버지 댁에 양자로 들어갔으나 노새를 끌어 돈을 버는 양아버지를 부끄러워하던 소년이 양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이순원의 글도 탁월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이 놀라운 작품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전화에 드러나는 강원도 사투리는 곁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실감이 난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들에서 그만 먹먹해져서 한참씩 책장을 덮었다가 다시 힘들게 읽어야 했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감동까지 있어서 이효석의 작품보다 봉평에 더 멋지게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물레방앗간 옆의 메밀꽃밭에 한참을 머물렀다. 옥수수 잎새는 달빛에 푸르게 젖고, 메밀꽃 붉은 대궁은 차갑게 빛나고, 한밤에도 잠들지 않고 붕붕대며 꿀을 따는 벌들의 날갯짓소리가 귀에 쟁쟁한 밤이다.

지금 피어 있는 꽃들은 가을 메밀이다. 감자나 무를 뽑아 낸 뒤에 씨를 뿌리면 9월에 꽃이 절정을 이루고, 10월이면 수확이 가능하다. 빨간 메밀 대궁 사이로 꼬리를 까불까불하는 벌들이 좋아라 날아다닌다. 메밀꽃에는 암술이 길고 수술이 짧은 장주화와 암술이 짧고 수술이 긴 단주화가 있는데, 벌들은 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꽃을 수정시켜 씨앗을 맺게 한다.
 
비탈밭에 메밀 갈아 / 메밀 간 지 열흘만에 / 앞집 뒷집 동무들아 / 메밀 구경 하러 가세
잎은 동동 떡잎이요 / 열매 동동 까만 열매 / 꽃은 동동 배꽃이요 / 대는 동동 붉은 대요
점머슴아 낫 갈아라 / 큰머슴아 지게 져라…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환한 달빛 아래 곱고 여리게 반짝이는 메밀꽃.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이효석 생가 옆 음식점에서 옥수수를 말리고 있다. 2006년 8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민요로도 불릴 만큼 흔했던 강원도의 메밀 농사는 지금은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덕분에 봉평에서는 수매가를 높여 잡으면서까지 메밀 농사를 권고하고 있다. 메밀꽃을 보러 봉평을 찾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겠지만, 농사짓는 사람에게 손해 보면서도 억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봉평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메밀밭이었는데 이제는 이효석 생가 가까운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다음 날에는 물레방앗간에서 이효석 생가까지 걸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이효석 생가는 지금은 비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적막하고 황폐하다. 제대로 보존하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생가 마당의 커다란 나무 옆에서 메밀국수 사 먹던 때가 훨씬 좋았다고 내 몸은 말한다. 

생가 옆에 새로 들어선 음식점은 크고 깨끗했지만, 예전의 정갈한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들 사이에는 다만 한 치의 거리만이 존재할 뿐이라는데 말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메밀꽃,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메밀꽃은 여전히 수줍게 아름답고, 코스모스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마음에 깊이 담기는 여운을 지닌 채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달빛 아래 보던 메밀꽃과 햇빛 아래 보는 메밀꽃은 사뭇 다르다. 달빛에 반짝이던 곱고 여린 꽃잎은 환한 햇살 아래서 부끄럽게 몸을 뒤챈다. 간간히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밤새 쉬지 않은 벌들에게 수줍게 몸을 내어주고 있다. 메밀꽃 씨앗이 삼각형인 건 아마도 모나게 익어 가는 세월을 잊지 말라는 얘기가 아닐런지.

음식점 처마에 걸어 둔 옥수수 알갱이를 훔쳐 먹던 다람쥐 한 마리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쪼르르 도망가 버리는 오후, 어디선가 허생원이 끄는 나귀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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