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알프스] 여행은 과연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들뜬 마음으로 알프스로 향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 사람들의 단골 여행지 융프라우 대신 쉴트호른(Schilthorn)에 오르게 되었다. 기차가 아닌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곳이라서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더 좋은 곳이다.
쉴트호른 여행도 융프라우 기차 여행의 출발점인 라우터브루넨를 거친다. 울려 퍼지는 샘이란 뜻의 라우터브루넨은 빙하에 의해 만들어진 협곡이다. 도시의 좌우가 가파른 절벽이었다. 그곳에서 기차로 오르기 시작하는 융프라우와 달리, 쉴트호른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20분쯤 이동한 스테첼베르크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협곡의 가운데를 이동하는 길이라서 좌우로 가파른 바위 절벽이 계속 되었다. 해발 867m의 스테첼베르크에서 케이블카로 김멜발트(1,367m)까지 첫 이동을 한 후, 뮈렌(1,650m)과 버그(2,676m)에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정상인 쉴트호른(2,970m)에 오르게 된다.
버스에서 내리자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번에 1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커다란 규모였다. 버스 손님들이 케이블카로 옮겨 타자 바로 출발했다. 그 출발은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만나는 출발이기도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더 넓은 초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도 넓어졌다. 동, 서, 남, 북 어느 쪽을 보아도 감탄사가 필요한 풍경이다. 하지만 절벽을 거슬러 오를 때는 아찔했다. 거대한 절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음질쳤다. 그리고 산 하나를 훌쩍 뛰어 넘었다.
케이블카 갈아타는 곳이나, 케이블카 철 기둥이 세워져 있는 곳마다 스위스 국기들이 서 있었다. “웬 적십자사 깃발들이 이리 많지?” 그러잖아도 고도가 높아지며 자꾸 추워지고 있었는데 일행 중 누군가의 농담에 더 썰렁해졌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날씨만 바뀐 게 아니었다. 푸른 초원에서 시작한 알프스의 빛깔은 점점 초록의 빛깔을 잃어가더니, 정상에 가까워지니 가파른 바위절벽의 검은 색으로 변했다. 아니 하얀색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알프스의 잔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드디어, 해발 2,970m 쉴트호른 정상. 기대했던 것보다 더 특별했다. 가까이의 만년설부터, 먼 곳의 초원까지 엽서 그림 같다. 문득 그 아름다움에서 슬픔의 조각이 느껴진다. 멋진 경치도 가끔은 북받치는 설움이 되기도 하나보다.
특히 날이 흐려 가끔씩 먹구름이 몰려들고 어느 순간 맑아지기도 했는데,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방해가 되기보다는 더 멋진 풍경을 보여주려는 소품 같았다. 구름 틈으로 베르니즈 알프스, 아이거, 뭉흐의 모습이 살짝살짝 보였다. 다만 가장 높은 봉우리 융프라우는 꼭꼭 숨은 채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경치에 푹 빠져 있다가 문득 한기를 느꼈다. 해가 비칠 때면 우리나라 늦가을쯤의 날씨였지만, 갑자기 몰아닥친 구름에 바람까지 불어치면 금세 한겨울이 되었다. 산 정상에 오르며 긴팔 남방을 입었는데, 결국 겨울옷을 꺼내 입었다. 지난 밤 쉴트호른의 경치를 꿈꾸며, 정상의 피츠 글로리아라는 레스토랑에서 차 한잔 마실 생각을 했었다. 007 영화의 세트장으로 세운 그 레스토랑을 촬영이 끝난 뒤 관광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니 차 한잔을 마시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이 생겼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연결된 능선을 조금이라도 걷고 싶었다. 비록 케이블카를 타고 온 정상이지만 정상의 능선을 걷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니던가.
능선은 거친 암석 위에 만들어진 작은 오솔길이었다. 알프스의 다른 봉우리들로 연결되어 있는 그 길 양쪽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그래도 그 거친 길옆으로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구름을 따라 까마귀들도 날아올랐다.
능선을 걷다가 신기한 표지판을 만났다. 하이힐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 하이힐 금지 표지판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하이힐 수준의 신발을 신은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스위스에도 그 높은 산을 힐을 신고 걷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1km쯤 걸었던 능선을 되돌아 와서 피츠 글로리아로 갔다. 회전식 레스토랑이라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자리에 앉았을 때 처음에는 조금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금세 바깥 경치에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 커피 한잔 가격이 우리 돈으로 3,000원쯤 되었다. 회전식 레스토랑은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정상에서 두 시간이 지났다. 이젠 내려갈 시간. 아쉬움을 뒤로하고 케이블카를 탔다. 타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버그를 거쳐 뮈렌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멜발트까지는 산길을 걷기로 했다. 케이블카로는 5분이면 갈 거리지만, 천천히 걷는다면 한 시간이 걸리는 길이다.
해발 1,650m, 뮈렌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배낭여행을 한다면 그곳에서 하룻밤을 꼭 묵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창마다 꽃을 장식한 아름다운 베란다가 인상적이다. 베고니아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동화 같은 마을 풍경에 길과 나무들의 풍경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길을 걸으며 몇 팀의 여행자들을 만났다. 여행자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알프스와 만나고 있었다.
물론 나도 행복했다. 알프스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그 초록의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이 행복한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팔을 활짝 벌리고 한참을 걸었다. 그만큼 즐거웠고, 행복했다. 김멜발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스테첼베르크로 이동한 것으로 쉴트호른 여행은 끝이 났다. 알프스와 만난 한나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상에서의 두 시간과 산길을 걸었던 한 시간은 행복한 여행의 기억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