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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의 향기] 일본건국 발원지는 “우리 국토의 왼발 대마도”
[역사의 향기] 일본건국 발원지는 “우리 국토의 왼발 대마도”
  • 김삼웅 기자
  • 승인 2006.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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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대마도 전경.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여행스케치=대마도] 일본은 독도를, 중국은 백두산에 이어 이어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강대국의 노골적인 영토야욕에 따끔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상황에서 100년전 일제에 맞서 싸우다 대마도에서 돌아가신 의병장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옛 우리 땅 대마도를 찾았다.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곳을 직무와 관련하여 가게 된다면 그건 행운에 속한다. 지난 여름에 다녀온 대마도 여행이 그랬다. 과거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어긋났던 것을 이번에는 ‘직무상’ 다녀오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대마도는 어떻게 연상되고 있을까. ①잃어버린 영토 ②왜구의 소굴 ③의병대장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지 ④천혜의 낚시터와 경관 좋은 골프장 ⑤밀수 또는 밀무역지 등이 연상될 것이다. 이번 대마도 여행은 ①과 ③에 관련되어 떠난 2박 3일의 짧은 기간이었다.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역사서에 경상도 계림에 속해있는 우리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마도.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올해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가서 왜놈의 물 한잔도 마시지 않겠다고 단식으로 버티다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된다. 면암은 1906년 6월 12일 임병찬 등 의병 지도부와 전남 순창에서 붙잡혀 8월 18일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혹독한 감시를 받다가 1907년 1월 1일 현지에서 순국했다.

면암이 일제에 끌려간 100주년의 8월을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을까. 부산에서 씨플라워호를 타고 대마도 히타키츠항으로 출발했다.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는 147km, 지리적으로도 한국과 훨씬 가깝다.

뱃길은 잔잔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사람들이 몰려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세종실록>,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동국여지승람>,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 발로 삼는다.”<해동지도> 이런저런 사력(史歷)을 생각하는 동안 배는 어느새 1시간 40분 만에 히타카츠 터미널에 도착했다.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대마도 어느 거리.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최익현 선생의 순국 100년을 추모하며.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여행은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다. 비우고 출발하여 채워서 돌아온다. 망부석의 애환이 서려 있는 신라 박제상(朴提上)의 순국비, 백제계와 신라계의 유물전시관 미네민속자료관, 일본왕 계보의 뿌리로 알려진 와타즈미 신사, 러·일전쟁 때 만들어진 인공 운하 만제키와 만제키바시 등을 둘러봤다.

가는 곳마다 빽빽히 들어선 스지나무가 장관이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스지나무 삼림, 섬 전체가 거대한 공원이요 산림욕 숲길이다. 스지나무를 전부 베어 팔면 2만9,000명의 대마도 주민이 30년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원이란다.

관광지가 된 와다쓰미(和多都美) 신사에는 일본의 건국신화가 얽혀있다. 해신과 육신이 이곳에서 혼인하여 일본의 건국왕 진무텐노(神武天皇)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 왕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그런데 이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우리 조상들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대마도 니이 지역의 해변 화궁(和宮 : 와다즈미)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은어가 돌아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공원.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하늘색 물빛과 함께 캠프장이 잇어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미우리 해수욕장. 2006년 10월. 사진 / 김삼웅 기자

산림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대마도는 농토가 적어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관광수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관광수입원의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식량을 보내 먹여 살렸던 대마도가 지금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떨군 외화가 주요 수입원이라니, 착잡한 심경이었다.

마지막 날 면암 선생의 순국비를 방문했다. 수선사(修善寺) 뜰 안에 세워진 기념비는 약 2m 정도의 높이로 정면에는 ‘대한인 최익현 순국지비’라는 글자가 한자로 뚜렷이 새겨져 있다. 100년 전 면암이 순국했을 때 장례를 치른 곳이 이곳이었다. 74세의 고령으로 쓰러져가는 조국을 붙들어 세우려다가 왜적에게 붙잡히고 왜지에서 숨진 선생의 혼령 앞에 경건하게 엎드렸다.

귀로에 돌아본 반쇼우인(万松院)은 유명산(有明山) 기슭에 자리 잡은 천태종 사찰로 역대 대마도 번주(藩主)들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한국의 보물도 몇 점 보존돼 있었다. 조선국왕으로부터 기증받았다는 청동의 제례용 2구족(二具足), 고려불인 관세음보살반가상, 고려의 경문(經文) 등이다. ‘조선국왕의 기증’이란 푯말이 붙어있지만, 사실인지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인지는 알 수 없다.

천혜의 경관과 자원, 바닷물을 끌어들여 조성한 호수 같은 마을들, 한국과 연관된 여러 지명과 유물·유적 등 짧은 일정으로는 다 소화하기 아쉬운 여행이었다. 쓸모없는 땅이라 하여 공도(空島)정책으로 버린 땅, 대마도를 떠나는 발길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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