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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 에스프리] 다시 가보고 싶은 곳 1순위 쿠바 열정의 쿠바에서 속삭인 나만의 밀어
[지구촌 에스프리] 다시 가보고 싶은 곳 1순위 쿠바 열정의 쿠바에서 속삭인 나만의 밀어
  • 정길화 기자
  • 승인 2006.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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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열정의 나라 쿠바.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여행스케치=쿠바] 나의 잔상 속에 남은 쿠바의 풍경은 풍요로움이나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다. 여행객에게 편안함이나 일탈을 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20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쿠바를 생각한다. 쿠바는 추억과 동경의 장소다. 채워지지 않은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원시적인 매혹이 있는 땅이다. 

황혼의 말레콘. 파도는 방파제를 가차 없이 때리고, 솟아오르는 물보라는 도로의 열기를 적신다. 연인들은 끝도 없는 제방에 나란히 앉아 밀어를 속삭인다. 아바나 구항(舊港)의 건물들은 퇴락하였지만,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서 보던 장엄하고 격조 있는 양식이다. 

사탕수수 산업으로 20세기 초에 ‘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린 아바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는 은성(殷盛)했던 시절을 상흔처럼 심란하게 보여준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시선은 사뭇 어지러워진다. 집집마다 널어놓은 빨래가 도시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말레콘에 나온 젊은이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빨래를 널어놓고 좋아하는 사람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낡은 차가 거리에 가득하고 -한국 중고차도 심심찮게 보인다- 사람들은 궁핍해 보인다. 곳곳에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혹은 ‘항상 승리할 때까지’ 등등의 글씨가 난무한다. 비로소 사회주의 국가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는 곳이 많다. 조심해야 한다.

‘머무르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머무르고 싶은 것이 사람인데, 여행은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일’이라고 헤세가 말했다고 한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인데 확인 차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해도 출전을 찾을 수가 없다. 모르겠다. 헤세 아니면 괴테가 말했을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2004년 12월 나는 쿠바에 갔었다. 80여년 전 쿠바로 이민을 갔던 일군의 한인 후손들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100년 전 피폐해진 구한말의 조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껜(선인장의 일종) 농장으로 노동이민을 갔던 ‘개척자’들의 후예였다. 

멕시코에서 무척 고생을 했던 그들은 쿠바의 사탕수수 경기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쿠바로 재이민을 왔으나 운명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한인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사탕수수 국제시가가 폭락했었다. 배운 도둑질이라고는 그것뿐이라 어쩔 수 없이 사양길에 있던 주변의 에네껜 농장으로 갔다. 참으로 복도 운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바라데로 해안 어느 식당 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내가 맡은 일은 그 후손들의 삶을 추적,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다. 말이 이민이지 그들은 사실상 유민(流民)이었다. 식민 치하의 조국은 그들을 잊었고 한인들은 기약 없는 생존의 길에 나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결국 비장감으로 여울져 굽이친다. 

오래 전부터 공을 들였지만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 취재비자 받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관광비자로 일단 입국을 한 후, 이틀이 지나고서야 비자 문제가 해결됐다. 

곧장 한인들이 처음 상륙한 마나티 항에 가려고 아바나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 12시간을 차로 이동했다. 짧은 일정에 강행군을 하니 쿠바의 풍광과 카리브해의 낭만이 안중에 없다. 

헐리우드 배우들을 비롯하여 유명 인사들이 묵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나시오날 호텔도,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식당 라 테라사도,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썼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도 모두 그림의 떡이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라스 투나스 근처에 있는 옛 사탕수수 공장.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황혼의 말레콘 방파제.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세계적인 휴양지 바라데로 해변은 그나마 근처에 한인들이 살고 있어 냄새만 맡아 보았다. 체 게바라를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코스인 산타클라라나 시엔푸에고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거기에는 취재를 할 만한 한인 후손들이 없었고 무엇보다 일정이 허용하지 않았다. 

마나티, 라스 투나스, 까마궤이, 마탄사스…. 내가 다녔던 곳은 쿠바의 열정과 낭만을 체감하기 위한 여행 코스하고는 대부분 관련이 없다. 에네껜 밭과 사탕수수 공장을 전전했던 한인들의 궤적은 시쳇말로 썰렁하다.

잘 보고 찜해 두었다가 다음에 오리라, 애써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쿠바쯤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인들의 자취만 더듬어서는 프로그램이 되지 않는다. 쿠바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기본적인 그림이 있어야 하고 영상 구성을 위한 편집용 그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겨우 가본 곳이 말레콘과 아바나 도심 오비스포 거리였다.

이곳을 다녀온 뒤 나에게 쿠바는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제1위로 꼽히게 되었다. 언제인지 다시 기회가 오리라. 그때는 헤밍웨이 카페도 가보고 그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토 칵테일도 연거푸 마셔 보리라.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아바나 번화가 오비스포 거리의 사람들.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쿠바음악의 영광. 쿠바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니 모레. 2006년 10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말레콘*에서 아바나 여인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해야지. 체 게바라의 체취를 따라 산타클라라에 가서 짝퉁이 아닌 진품 체 게바라 티셔츠를 사 입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비냘레스 계곡은 꼭 가보아야지. 마치 쥬라기 공원의 촬영장소인 것만 같은, 원시의 아름다움과 전인미답의 순결을 보여주는 곳이다. 사진으로만 보았는데 숨이 막힐 정도였다.

사람이 가보고 싶은 곳을 다 가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마음 속에 그리고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그 풍경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쿠바는 내게 그런 곳이다. 채 끝내지 못한, 이루어지지 못한 동경의 표상이다.

어제 쿠바의 비틀즈인 <로스 반 반> 밴드의 내한 공연을 다녀왔다. 남국의 열정이 무대 가득히 어우러졌다. <로스 반 반> 최초의 여성 가수라는 예니의 가창력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나의 쿠바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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