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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궁궐기행] 황손과 함께 찾은 창덕궁과 경복궁 “우리에게도 품격있는 황실문화가 있습니다”
[궁궐기행] 황손과 함께 찾은 창덕궁과 경복궁 “우리에게도 품격있는 황실문화가 있습니다”
  • 이수인 기자
  • 승인 2006.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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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상중에 있는 왕후들이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창덕궁 궁궐 안내도 앞에서 학생들이 관람 안내를 받는 사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황손 이석 선생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망중한에 빠져있다. 금천교 옆의 나뭇가지가 후루룩 몸을 떤다. 빛바랜 마른 잎들이 깃발처럼 하늘을 난다. 이렇게 궁궐을 다시 찾으니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빙그레 웃는다.

“푸근하지. 예전 살던 집인데.” 
문화적 충격이라도 받은 듯 잠시 머릿속이 멍해진다. 일반인들에게 궁궐은 수많은 관광명소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여기가 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고종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 할아버지’라는 표현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국사책에서나 접해온 역대 조선의 임금들이 그에게는 모두 ‘할아버지’인 것. 고종황제의 손자이니 당연하다. 

전주에서 갓 도착한 초중학생 백여 명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 선생과 함께 조선왕조 오백년의 영화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조선왕조 궁궐기행에 나섰다. 황실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궁궐기행에서는 창덕궁과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을 둘러봤다. 창덕궁은 하루 관람객들의 인원수를 제한하는 까닭에 정해진 입장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잠시 후 안내원이 나왔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창덕궁을 둘러보며 설명을 듣는 학생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전통 정원의 백미로 손꼽히는 창덕궁 후원의 연못 부용지와 정자.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된 다른 궁궐과는 달리 창덕궁은 옛 건물들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 앞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궁도 비켜가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금의 침전인 희정당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되자 경복궁 내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가 희정당을 다시 지었다. 그러면서 전에 없던 용마루를 세웠다. 여기까지 안내원이 설명하자 이석 선생이 덧붙인다. 

원래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를 세우지 않았다 한다. 왕을 상징하는 용 문양이 왕의 머리 위를 내리 눌러선 안 되는 까닭이다. 이를 모를 리 없던 일본인이 일부러 용마루를 세웠으니 당시 일제가 조선왕실을 어찌 조롱했는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라고.

왕이 국사를 생각하고, 가끔씩 신하들과 소연(小宴)을 베풀었다는 가정당 앞에 이르자 갑자기 자신의 카메라를 건네주며 기념사진을 찍어달란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아해 하자 “어릴 때 저안에서 많이 놀았어. 왕자, 공주들한테 놀이터 같은 곳이었지”한다. 

1979년까지 황실 사람들은 황족의 형태를 유지하며 궁에서 살았다. 이석 선생만 해도 이제 터만 남은 관훈동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이후 풍문여고 뒤의 별궁, 창덕궁, 궁정동의 칠궁 등으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초등학생 시절엔 점심때 상궁들이 교자상을 차려 가져오면 교장실에서 홀로 밥을 먹어야 했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서양식으로 개조된 희정당의 내부. 원래는 왕의 침소였지만 후에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여기가 할아버지가 어릴적에 놀던 곳이란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그런 특별대우가 싫어 상궁들을 피해 다니면, “애기씨 마마, 아니 되옵니다”를 연발하며 따라 다니는 상궁들과 적잖이 싸우기도 했단다. 별궁에서 살았던 중·고교생 시절엔 창덕궁의 후원을 거쳐 학교를 다녔다. 당시 창덕궁은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기붕 전 부통령이 가끔 와서 낚시를 즐겼다 한다.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재현되었다. 호위무사들의 동선 밖으로 구경꾼들이 둘러섰다. 그 속에 교대식을 지켜보던 이석 선생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호통을 친다. 

“여기가 임금이 살던 궁궐이야. 이런 곳에서 이 무슨 짓이야!”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든다. 연인 사이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놀란 남녀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는 눈빛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뜬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경복궁 호례문 앞에선 30분 간격으로 전통 수문장 교대식 행사를 한다. 2006년 11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예법조차 없는 세상은 안돼.” 
그의 단호함에 지난 여름의 황당했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핫팬츠에 등이 훤히 드러난 민소매 차림으로 오죽헌의 율곡 선생 사당을 찾은 젊은 관광객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한때 황실 백화점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한 백화점은 배낭이나 운동화 차림으로는 절대 입장할 수 없다. 황실이라는 이름 앞에선 백화점조차 이렇게 예를 챙기는데 하물며 궁궐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자 선생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여기는 자신에게 편치 않은 곳이란다. 주로 창덕궁쪽에서 살았기에 낯설어 그런가 했더니,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어서 어릴 적부터 막연히 무서운 곳으로 여겨왔단다. 얼굴조차 모르는 ‘할머니’지만 가족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궁궐이 없는 전주에서 자란 어린 학생들에게 서울의 궁궐은 흥미롭다. 그러나 근현대사의 폭풍 속에서 잊혀진 황실의 마지막 후손에게는 어린 시절의 정겨운 추억과 함께 아픈 가족사의 현장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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