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서울] 지난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58년부터 1961년까지 거주하던 신당동 가옥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곳은 박정희와 김종필, 박종규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문화주택’이란 이름으로 지어진 박정희 가옥은 쿠데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을 마치고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오전 10시 30분. 박정희 가옥의 내부 가이드 투어를 기다리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마당 벤치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 할머니에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섞인 관람객들은 자원봉사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가옥 내부 투어를 시작했다. 최근에 새 단장을 마친 박정희 가옥의 마당은 누구나 둘러볼 수 있지만, 가옥 내부는 사전 예약을 한 사람들만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관람할 수 있다.
아담한 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서니 소파가 놓인 응접실이 손님들을 맞는다. 응접실을 중심으로 안방과 자녀방, 부엌과 화장실, 서재 등이 빙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부엌 뒤로는 작은 식모방과 장독대까지 놓아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일제가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은 ‘문화주택’이다. 넒은 마당을 중심으로 마루와 안방, 건넌방과 사랑, 부엌 등이 여유 있게 배치된 한옥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 마루 대신 응접실, 입식부엌과 실내 화장실까지 갖췄으니 문화주택이라 부를 만했겠다. 당시 신당동과 장충동 일대에는 이런 문화주택들이 단지를 이룰 정도로 많았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단다. 덕분에 박정희 가옥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 되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여기서 5.16 군사정변이 모의되었기 때문이다.
3수 끝에 성공한 쿠데타
1961년 5월 15일 밤 10시. 육군 소장 박정희는 신당동 집을 나서며 아내 육영수에게 “내일 아침 뉴스를 잘 들어보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때 육영수는 다음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을까? 며칠 전부터 김종필과 박종규, 차지철 등 쿠데타의 주역들이 드나들며 5.16 군사정변의 실행 계획을 다듬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녀도 눈치챘을지 모른다. 15일에는 쿠데타 군들이 신당동 박정희 가옥에서 출동 대기 중이었고, 그 전날에 서재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은 혁명 공약을 마지막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서울 입성에 성공한 쿠데타 세력은 방송국을 장악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어쩌면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육영수도 이 방송을 들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에게서 민심이 떠난데다 미국과도 마찰을 빚자 쿠데타를 일으킬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 번째 시도는 이승만 정권 말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시도 끝에 박정희는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박정희와 군인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서재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옷장 옆에는 별을 두 개 단 군복이 걸려있고, 작은 책상 위의 낡은 라디오에서는 당시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지금 박정희 가옥에 전시된 물건들 중에 ‘진품’은 없다고 한다. 대신 사진과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최대한 당시의 모습과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 박근혜와 근령, 지만 남매가 썼던 방에는 당시 이들이 배웠던 초등학교 교과서를 전시해 두었다. 아내의 공간이었던 안방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경대, 수동 재봉틀 등이 눈에 띈다. 실재로 육영수는 근처의 중앙시장에서 천을 끊어다가 손수 아이들의 옷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공관을 거쳐 청와대로 들어간 후에도 육영수는 신당동 집에 각별한 애정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아마 남편이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신당동 박정희 가옥은 근대문화유산이 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