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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30] 수구문, 시구문, 남소문, 그리고… 광희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30] 수구문, 시구문, 남소문, 그리고… 광희문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5.06.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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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도성을 지으면서 4대문과 4소문을 내었다. 그중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 그러니까 서울의 동남쪽에 난 작은 문이 남소문이다. 남대문의 원래 이름이 숭례문인 것처럼 남소문의 본명은 광희문이다. 수구문과 시구문이란 별명도 있었다. 광희문이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600년 수도 서울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옛 성문들도 많다. 도성의 동서남북에 자리잡은 4대문과 그 사이에 있는 4소문, 남한산성, 북한산성 같은 산성의 문들, 거기다 궁궐의 문들까지 합하면 줄잡아 수십 개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중에는 숭례문과 흥인지문, 광화문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도 있고, 숙정문과 돈의문, 창의문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문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산 중턱쯤 자리잡아서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광희문은 조금 특이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옆 차들도 늘 붐비는 퇴계로 길가에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름이다. ‘남소문’이라고 하면 남쪽에 있는 작은 문이겠거니, 하는 느낌이 오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서소문과 비슷한 느낌이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1976년 이미 큰 길이 나버린 원래 자리에서 15m쯤 떨어진 곳에 복원되었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광희문과 연결된 성벽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모자이크를 이룬다. ​돌마다 견뎌온 세월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한눈에 살펴보는 서울의 옛 문들
광희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늘 헷갈리는 서울의 옛 문들을 정리해 볼까?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처음 서울 도성을 설계하면서 동서남북의 성문에 ‘인의예지’라는 글자를 넣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 서, 남, 북대문은 각각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소지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중 북대문에 해당하는 소지문은 숙청문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숙정문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소문의 이름은 인의예지와는 상관 없이 지어졌다. 동소문은 혜화문, 서소문은 돈의문, 남소문은 광희문, 북소문은 창의문이 되었다. 4대문과 4소문 중에서 일제가 길을 낸다며 강제로 철거해버린 서대문과 서소문은 여전히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의 문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의 산성에는 동서남북의 큰 문들뿐 아니라 곳곳에 작은 암문들을 두어 전투에 대비했다. 성문은 아니지만 궁궐의 정문 중에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창덕궁의 돈의문, 덕수궁의 대한문 등이 그렇다. 하지만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나 경희궁의 흥화문은 다른 궁궐들의 정문에 비해 낯선 이름들이다. 궁궐에는 정문 말고도 수많은 문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는 성문도 궁궐 문도 아닌 옛 문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홍지문이다. 숙종대인 18세기 초반, 한양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지으면서 만든 문이 바로 홍지문이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본명은 광희문. 별명은 남소문과 수구문, 시구문. 네 가지 이름을 가진 광희문은 40년 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광희문의 별명들이 생겨난 까닭
남소문인 광희문의 높이는 6m. 12.5m에 이르는 남대문의 절반에 해당하는 높이다. 키가 절반이니 덩치는 1/4 정도에 불과해 아담한 느낌이다. 근처에 청계천이 흘러서 수구(水口)문이라고도 불렸고, 시신을 실은 장례행렬이 다녀서 시구(屍口)문이라도 불렸다. 조선 시대 한양에는 산소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반드시 시신을 도성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했는데, 이때 이용된 문이 남소문인 광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이었다. 광희문을 빠져나간 시신은 남산이나 용산 일대에 묻혔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시신들이 드나들었으니 광희문에도 영험한 기운이 서려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광희문 돌을 갈아 만든 ‘수구문 돌가루’가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팔리기도 했단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장례행렬은 ‘시구문’으로 불리는 광희문을 통해서 도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양 안에서는 장례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광희문의 추녀마루에도 어김없이 잡상을 두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으로 이어지는 잡상은 사악한 기운을 막는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광희문 뒷편은 서울 성곽길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출발한 성곽길은 동대문을 거쳐 낙산까지 이어진다. 2015년 7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광희문은 숙종 때 다시 지어졌다. 이때 원래 있던 자리도 헷갈릴 만큼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조차 가물가물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일부 석재만 남아 있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지금 복원된 광희문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다른 색깔의 돌들이 짜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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