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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배낭 메고 내가 간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코리안 쇼를 하라! 길은 끝나지 않았다
[배낭 메고 내가 간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코리안 쇼를 하라! 길은 끝나지 않았다
  • 강래우 기자
  • 승인 2007.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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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버스 밖에서 찍은 버스 안의 풍경.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여행스케치=인도] 사서 고생이란 말은 이런 데 쓰는 것이겠지요. 어려움 없이 살던 대학생 강래우 씨, 멋지고 좋은 여행지도 많건만 굳이 험하디 험한 인도땅을 찾아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의 악전고투가 대견스럽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상 특급 인도 여행 그 마지막 편. 

천지에 믿을 건 내 몸 하나뿐
오후 6시까지 라즈쿠마를 기다렸다. 모든 걸 생각해봤을 때 그가 훔쳐간 것이 확실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 그는 오지 않았다. 가방 가득 나의 물건을 챙겨넣고 이미 고아를 벗어났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했다. 쉽진 않지만, 여기서 이렇게 혼자 마냥 울부짖을 순 없는 일이다. 경찰에 신고하고 대사관에 연락을 해볼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런 보험도 들지 않았을 뿐더러, 막상 결과가 이렇게 되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해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거기다 소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자원봉사를 주최하는 단체를 찾아가서 그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아픈 몸을 맡기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입고, 가방을 열어 도난당한 물건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카메라, 2개의 렌즈, 각종 필터들, 30통가량의 고급 필름, CD플레이어, 내가 애지중지하던 CD들, 전자사전, 그리고 4년 넘도록 써서 반쯤 부서진 내 안경.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미로를 걷는 듯, 아득하기만 한 인도.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가방 속에 있는 건 5일 동안 빨지 않아 악취를 풍기는 옷가지들과 상비약, 콘택트렌즈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비상용으로 카메라 가방과 배낭 바닥에 숨겨둔 250달러가 고스란히 있다는 거였다.

가방째 훔쳐갔다면 아마 난 거기서 여행을 중단했어야 했을 것이다. ‘고맙다. ×새끼야.’
가방이 터무니없게 남아돌았다. 나의 짐 대부분을 도둑맞은 터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대충 남은 짐을 가방에 구겨넣었다. 빈 카메라 가방도 들고 갈까 생각했지만, 더 이상 내겐 쓸모없는 물건이라 그냥 버리기로 했다.

짐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뜨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해변에 비까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믿을 건 내 몸 하나밖에 없다는 걸.

택시를 잡으러 도로변에 나섰다. 고아에선 컴컴할 때 절대 혼자 다니지 말라고 가이드북에 써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디 한 놈만 걸려라, 그래서 같이 죽자’ 이것이 그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자원봉사 현장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생사의 갈림길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터미널로 이동을 했다. 도착한 나는 버스표부터 확인했다. 정말 우습게도, 그리고 바보 같이 쿤다푸어로 가는 버스는 2시간에 한 대씩 있었다. 심지어 기차도 있었고, 버스 종류도 이것저것 다양했다.

라즈쿠마에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매정하게도 그가 예약해준 버스는 가장 작은 로컬 버스, 우리나라 마을버스만도 못한, 진즉에 폐차시켰어야 할 그런 버스였다. 버스에 올랐다. 2명이 앉아도 모자랄 자리에 3명이 구겨 앉고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속상하고, 너무 힘들었다. 한때 사랑했던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날 떠났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았었던 것 같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카메라는 내겐 카메라 이상의 존재였다. 그것은 2년 동안 나의 행복이었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자원봉사 현장의 인도 아이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하루 세 끼 라면과 떡볶이로 배를 채우면서도 필름 값과 현상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던 일, 나의 사진을 보며 행복해 하던 많은 이들의 얼굴, 카메라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부모님께 부탁했을 때의 일, 그리고 그걸 내손에 쥐었을 때의 그 환희. 모든 것이 스치듯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속일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버스가 고아에서 멀어져 카르나떠까로 향할수록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아마 울지 못하는 날 위해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것이리라….
‘그래. 더 세게 내려라. 네 어찌 내 마음만큼 울 수 있으랴. 더 세게 울어라.’

내 말을 알아들은 양 빗줄기는 전보다 훨씬 거세지더니, 급기야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퍼붓기 시작했다. 세상은 온통 빗소리로 시끄러웠다. 버스 천장에서 비가 주르륵 새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도로는 비로 인해 더더욱 출렁거렸다. 와이퍼가 고장이 났는지 버스 운전사는 한 손에 신문지를 들고 연신 앞 유리를 닦아가며 운전을 했다. 당장이라도 전복되거나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은 오한으로 몸서리가 처지고, 머리는 깨질듯이 아프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설사를 참아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대여섯 시간 정도 아픈 걸 참아가며 좁은 자리에서 몸부림치다 보니 나중엔 시간이 정지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가 되었다.

‘주르륵!’ 
잠깐 졸다가 긴장이 풀린 사이 바지춤에서 설사가 물 흐르듯 쏟아졌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갠지스 강에서 죽어가고 있을 너의 모습이 선하구나.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정말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살면서 바지에 똥을 싼 적도 없거니와 그런 일은 내게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한국이었더라면 버스운전사에게 있는 돈을 다 쥐어주고, 근처에서 가장 깨끗한 화장실로 가달라고 말했겠지만, 그 순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할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리곤 가방에서 두 장 남은 휴지를 꺼낸 후 잘 포개서 바지 속에 집어넣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언제쯤 버스가 멈출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졸릴 때마다 허벅지를 손톱으로 쥐어뜯었다. 며칠밤 자지 못해 너무나도 졸리고 아팠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긴장이 풀어지면 또 설사가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복통과 두통 그리고 고열, 수면 부족. 버스가 멈추기까지 두세 시간은 정말 미치도록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

버스가 서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찾아간 공용 화장실은 돼지우리만도 못한, 지붕도 없이 오물만 쌓인 넓은 벌판이었다.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라서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그 벌판에서 볼일을 봤다. 빗줄기가 무척이나 거센 탓에, 바지와 얼굴에 빗물이 튀었지만, 그것이 빗물인지 똥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볼일을 다 보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화장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처럼 물병에 물을 받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손에 적셔서 뒤를 닦았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나의 인도 여신 아이비.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여기서 절대 죽지 않겠다
볼일을 본 뒤 다시 버스에 오르자 물에 빠진 생쥐마냥 비에 홀딱 젖은 외국인이 무척이나 우습게 보였던지 버스에 타고 있던 인도인들이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가방을 뒤적거려 초콜릿 한 봉지를 찾아냈다. 이미 가방 속에서 다 녹아버린 초콜릿을 보니, 이것이 아까 내가 손으로 닦던 똥인지 초콜릿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먹어야 살 것 같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에 쑤셔넣었다.

그때 당시 난 무척이나 심각한 상태여서, 만약 이렇게 먼 타지에서 죽게 되면 유언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일기장을 폈는데, 거기서 인도로 떠나기 이틀 전 친구가 써준 편지를 찾아냈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당시의 악몽을 표현한 사진.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힘든 여정이었지만 맑은 미소의 아이들 덕분에 이젠 인도에 푹 빠지게 되었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갠지스 강에서 죽어가고 있을 너의 모습이 
선하구나. 죽지마. 죽지마. 죽으면 안돼, 응?
죽어갈 때 이 글을 읽어라, 
그럼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매일 밤잠을 설치고, 카메라를 도둑맞고,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바퀴에 발이 끼어 죽을 뻔하고, 폭우 속에서 설사를 한 뒤에, 녹아버린 초콜릿으로 허기를 채우는 내 모습을 그녀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편지를 썼다. 

내 상황이 너무나 우스웠다. 온실 속의 화초마냥 좋은 잠자리, 좋은 음식, 따뜻한 방에서만 지내던 내가, 빗물 적신 손으로 똥구멍을 닦고 마을버스보다도 못한 버스에 구겨앉아서 다 녹아버린 초콜릿을 입에 쑤셔넣으며 유언이나 쓰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너무나 우스웠다. 너무나 우스워서 미친 듯이 웃었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밝은 미소의 아이들. 2007년 6월. 사진 / 강래우 기자

“으하하하하하하하”
버스운전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날 쳐다봤다.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친누나의 눈을 쏙 빼닮은 내 옆의 꼬마 여자아이는 뭐가 좋은지 나와 같이 덩달아 낄낄거렸다. 웃으면서 나는 ‘이렇게 사람이 실성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실컷 미친 듯이 웃고 나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유언을 써보겠다는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폭우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어이. 인디언들아… 날 우습게 보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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