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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 에스프리] 멕시코 치첸 잇사의 마야 유적  화려했던 문명의 비극적 종말
[지구촌 에스프리] 멕시코 치첸 잇사의 마야 유적  화려했던 문명의 비극적 종말
  • 정길화 기자
  • 승인 2007.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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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엘 카스티요. 4m 높이로 천문학적으로 완벽한 구조로 평가된다.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여행스케치=멕시코] 지구촌 곳곳의 유적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착잡하다. 중국의 만리장성이건 로마의 콜로세움이건 별반 다르지 않다. 제왕의 위엄도, 관작(官爵)의 교활도, 신민의 비굴도 긴 역사의 뒤안길에서는 그저 허허롭다. 애시당초 만들어진 동기와 목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저 풍물의 하나가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는 지구 곳곳의 유적지 순례에 나서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영국의 스톤 헨지로, 크메르의 앙코르 와트로….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범인(凡人)들은 그곳에서 우주의 섭리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조상을 잘 만난 덕택에 그 풍경을 상품으로 내놓아 엄청난 관광소득을 올리는 후손들을 부러워할 뿐이다. 이처럼 유적의 교훈은 대체로 위선적이다. 

한편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을 침략했을 때는 양상이 또 다르다. 강한 문명이 약한 문명을 이기고 짓밟는다. 약자는 유린되고 빼앗긴다. 침략자는 문서를 태우고 강탈한다. 그리고 정벌한 자가 역사를 새로 쓰고 강자의 문명을 정당화한다. 이때 상상력은 승자에 편승한다. 현실의 발언권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류사는 이를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확인한 연속이었다. 

나로 하여금 이런 역사적 성찰에 눈뜨게 하는 유적지 중의 하나가 바로 멕시코 마야 문명이다. 일찍이 드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너무나 빠르게 참담한 파멸에 이른 문명. 그래서 그 비극적인 종말 때문에 더 유명해진 마야문명. 한때는 절정을 구가했으되 세월이 지나 이제는 가뭇없는 문명이 어디 마야뿐이겠는가마는 알 수 없는 동병상련과 처연함을 준다. 퇴락한 마야 문명의 유적지를 보면 문득 고고학자나 인류학자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뭐랄까 문명사적 고뇌를 안겨주는 것이다.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전사의 사원 돌기둥.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내가 접한 마야 문명 유적지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 치첸 잇사(Chichen Itza)다. 이곳은 멕시코의 신흥 휴양지로 유명한 칸쿤에서 가깝다. 10~13세기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번영한 톨테크 시대는 신마야의 흥성기로 구분되는데, 바로 톨테크 시대의 수도가 치첸 잇사라고 한다. 

지난 2004년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 특집 <에네껜> 제작을 위해 멕시코로 출장을 갔을 때, 취재대상인 한인 후손이 마침 치첸 잇사 유적지의 관리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라몬 리 레혼. 한인 3세다. 그이 덕택에 치첸 잇사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이 유적지에서 마야문명의 은성(殷盛)했던 흔적을 보고 있노라면 영고성쇠에 대한 감회가 밀려온다. 

치첸 잇사를 마주하면 처음에는 그들의 뛰어난 문명 수준에 놀란다. 피라미드와 신전, 천문대 등을 축조한 비상한 건축술, 옥수수와 에네껜을 기반으로 한 농업생산성, 춘하추동의 절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천문학과 역법 등은 당시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고도의 문명이었다. 주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의 위용, 우리의 첨성대를 연상시키는 천문대 ‘카라콜’, 그리고 소설 해리 포터의 빗자루 운동놀이에 영감을 준 것 같은 168m에 달하는 볼 코트 등. 그러나 곧 이어지는 생각은 이 같은 문명을 지닌 마야인들이 왜 지금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렇게 돌무더기 유적지로 남아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하늘에서 본 유카탄 반도.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치첸 잇사 입구에서 연주하는 마라아치들.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마야 문명은 역사적 전말에 대해 충분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침략 당시 하급 군인들로 이루어진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야어나 상형문자로 쓰인 서책들을 대부분 불태워 없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마야 문명 연구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그래서 마야는 더욱 오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야는 건축술이나 천문학적인 지식 수준에 비해 지각과 교양의 수준은 높지 않았는지(사실 이런 평가도 당시 마야 사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일 수 있다), 산 사람의 심장을 태양신의 제단에 바치는 문화가 있었다. 또 오랜 기간 노예를 서로 뺏기 위한 부족 간의 전쟁이 계속되는 계급사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내부의 분열이 심했지만 결정적으로 병장기(兵仗器)는 청동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로는 철기와 기마병으로 무장한 스페인 침략자들에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야 문명의 종언을 말하려면 연초에 개봉된 멜 깁슨 감독의 영화 <아포칼립토>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포칼립토’는 그리스말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한다. 새로운 시작이라니…. 멜 깁슨 감독은 스페인 군대가 침략하기 전에 이미 마야 문명은 자멸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듯하다. 오히려 스페인의 침략으로 마야 세계는 내부 모순을 끝내고 새로운 문명으로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영화의 들머리는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 내부로부터 붕괴된다’라는 미국 사학자 윌 듀랜트의 말로 시작한다.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엘 카스티요에 올라 내려다본 '전사의 사원.' 2007년 6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아포칼립토>의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에 대한 할리우드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마야 문명과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시각이 매우 부당하다는 점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야, 잉카 문명을 파괴하고 엄청난 인명을 학살한 것은 외면하고 문명 내부에서 벌어진 쟁탈전만을 야만적으로 그려낸 것은 서구인의 오만과 우월주의의 극치다. 

어쨌든 <아포칼립토> 때문에라도 치첸 잇사의 마야 유적은 다시금 문명과 역사, 야만과 폭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한다. 유혈의 인신공양과 거듭된 부족 간의 전쟁은 스페인 정복자에 대한 마야 문명 전체의 저항력을 손상시켰음이 분명하다.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문명은 역사 앞에서 발언권이 없다. 

스페인 정복자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아무리 크고 정당하든 그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없다. 치첸 잇사의 유적지는 결국 패배자의 교훈을 들려준다. 

오늘도 치첸 잇사에 관광객은 몰려들지만 어쩐지 원주민들의 안색은 편치 않아 보인다. 잘난 조상 덕택에 편히 사는 후손들의 표정은 분명 아니다. 길게 늘어선 서구인들의 얼굴에서는 이국적인 호기심 이상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또 다른 ‘아포칼립토’는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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