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여주] 10월은 한글날이 있는 달이다. 예전엔 그나마 국경일로 지정되어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었지만, 공휴일에서 제외되고 나서는 10월 9일이 한글날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쓰는 한글. 무심히 잊혀지게 놔둘 수는 없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주말에 간단하게 둘러볼 수 있는 여주 영릉(英陵)을 소개한다.
임금에게 진상한 쌀의 고장 여주에는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인 영릉이 자리하고 있다. 왕릉이라고 해서 예전 수학여행 때 단골 코스였던 다른 왕들의 무덤을 생각하면 조금 곤란하다. 무덤도 무덤이지만 능 주변의 규모가 워낙 넓고 나무나 잔디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나 학교 소풍지로도 안성맞춤인 ‘공원’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린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능 내로 들어가기 위해 매표소를 찾는다. 으레 주차료와 입장료, 거기에 관람료까지 합해서 몇 천원은 하겠지 싶어 지폐를 두둑이 잡는데, 매표원의 한 마디에 화색이 돈다.
“500원입니다.”
정말인가 싶어 다시 확인을 한다. 정말이다. 단돈 500원이다. 이만한 문화재를 관람하는 데 500원이면 정말 ‘착한’ 가격이다. 게다가 주차도 무료다. 돈 내고 보러 가는 데 오히려 돈 번 기분이 든다. 정문을 들어서자 익숙한 물건들이 눈에 띈다.
“아! 이거 만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거잖아!”
얼른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실물과 비교해본다. 하지만 약간 모양이 다르다. 이건 ‘혼상’이다. 혼상은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로써 이곳에 있는 혼상은 세종대왕이 최초로 만든 혼상을 실물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이곳은 세종대왕 시절 만들어진 수많은 과학문화유산이 전시되어 있어 역사 공부하기에 좋다. 만원짜리 지폐에 실린 혼천의를 비롯해 해시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간의 등 15점의 복원유물들이 들어서 있어 교과서에서만 보던 조선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요즘 ‘세종대왕’하면 한글과 만원 지폐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이런 나들이를 계기로 세종대왕이 우리나라의 과학 분야를 개척한 뛰어난 과학자였다는 사실도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야외전시장 맞은편에 서 있는 세종대왕의 동상을 바라본다면 그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다.
세종대왕의 기념관인 세종전으로 들어간다. 세종전은 1977년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관한 전시관으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그림들을 비롯하여 세종대왕이 편찬한 책, 어·축·박·편경·향비파 등의 악기와 당시 제작하고 정비했던 정남일구, 혼천의, 금속활자, 여러 총통류 등의 발명품, 그리고 <훈민정음 언해본>, <용비어천가 > 등의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은 1층으로,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어서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10여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항상 교과서에서만 보고 배우던 것들을 실제로 본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을 듯하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흥밋거리일 것이다.
원래 세종대왕릉은 광주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1469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백 리 이내에 릉을 정한다는 왕실의 법도가 있었다는데, 이를 어기면서까지 이곳 여주로 능을 이장한 데는 풍수지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관리소 직원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모양새라고 한다. 이곳에 묘를 쓴 덕분에 조선 역사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물론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사방을 두르고 있는 산이며 릉 주변에 서 있는 소나무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걸 가늠케 해준다.
훈민문을 지나면 넓은 잔디밭과 함께 연못 하나를 볼 수 있다. 평범한 연못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어른 팔뚝보다 더 굵고 큰 잉어들이 가득이다. 역시 왕의 무덤에 사는 잉어들이라 그런지 크기도 ‘왕’이다.
연못을 지나 홍살문과 정자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세종대왕의 릉을 볼 수 있다. 영릉(英陵)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두르고, 봉분 앞 한층 낮은 단에는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 그리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가 서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이렇게 영릉을 둘러보는 데 1시간 남짓의 시간이 걸린다. 가을엔 단풍이 멋들어지게 들어 한층 더 운치가 있으니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면 그 다음 주말에라도 여유로운 나들이를 하면서 세종대왕의 업적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