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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간이역 기행] 이름 때문에 더 잊혀지지 않는 장항선 보령 청소역 세월이 아쉬울 땐 청소역으로
[간이역 기행] 이름 때문에 더 잊혀지지 않는 장항선 보령 청소역 세월이 아쉬울 땐 청소역으로
  • 박지영 기자
  • 승인 2007.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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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녹슨 선로와 새 선로가 나란히 달린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여행스케치=보령] 푸를 청, 바 소. 산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물도 푸른빛이 돈다 하여 청소(靑所)란 이름이 붙었다. 역명이 독특하고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라는 이유로 그곳에 가면 사연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1980년대에 시간이 멈춰 있는 청소역. 그 역사 속으로. 청소역에 도착하니 마치 이름처럼 역내에서 아주머니가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다. 

“청소한다고 빗자루 역은 어디 있냐고 놀러 온 사람들이 가끔 농을 건네지요.” 청소역 차장 임용광 씨다. 열차운용원 이준원 씨와 함께 청소역을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고개가 높아서 고개재 자를 써서 파리재라고 했슈. 장날이 되면 장 서는 사람들이 파리장 보러 간다고들 했자뉴~.” 말투가 구수한 차장님의 설명에 청소역의 추억이 술술 되살아난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청소역은 서울에서 출발한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하루 네 번 서지만 대합실은 늘 한산한 편.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역사 곳곳 손때 묻은 세월의 흔적이…
역사는 작고 아담하다. 대합실보다 역무실이 더 크다면 가늠이 될까? 1929년 12월 1일 진죽역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개시했고 1988년에 청소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천역과 주포역 사이에 있는 청소역은 1962년도에 한 번 신축했을 뿐 손을 타지 않아 지난 80년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붕에 목조 슬라브를 얹은 형태로 전형적인 일본건축양식이다.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주포역이 철거되어 이제 장항선에는 청소역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역사에는 6명의 직원이 2교대로 근무한다.     

역무실 한쪽에는 검은색 대형 금고가 놓여 있다. 간단히 짐작되진 않을 만큼 ‘세월’이 느껴진다. “이거 진~짜 오래된 거유.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역사가 처음 지어질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까 80년도 더 된 거유. 왜냐믄유, 이거 옮길 때 보니까 ‘대한제국’이라고 칼로 판 흔적이 있고 이 철도 마크 있던 자리에 일본을 상징하는 마크가 있었슈. 이 안에는 뭐가 들었는지 맞춰볼래유?” 안을 젖히니 10cm는 족히 됨직한 두께가 금고 안을 한 번 더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는 역사마다 이런 금고가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대천역에서 금고의 열쇠를 잃어버려 서류를 꺼내려고 전기톱으로 잘랐더니 모래로 속이 꽉 채워져 있더란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청소슈퍼에서 왼쪽으로 가면 그야말로 옛 시절이 펼쳐진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당시에도 일본놈들이 치밀했슈. 불이 나더라도 중요한 서류는 불에 타지 말라고 그런규. 이게 얼마나 무거운지 장정 넷이 들어도 꼼짝도 안 해유.” 자세한 정보를 듣고 싶어 철도박물관에 문의하니 금고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은행이 발달되지 않아 수금된 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단다. 대한제국이란 글자는 금고 뒷부분에 있어 보진 못했지만 누군가 식민지시대에 칼로 파놓은 그 흔적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오래된 청소역에서는 옛것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겉으로 봐서는 페인트를 칠해 잘 모르지만 벽돌을 쌓고 흙을 발라 벽을 살짝 두드리면 흙이 떨어진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남자였다면 머리를 깎아보고 싶었을 광국 이용원.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멈춤. 정지가 아닌 기다림
“청소역은 속도를 거슬러 퇴보하고 있능겨. 세월을 비켜나가는 곳이유.”  
역 밖으로 나가보았다. 차츰차츰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풍경들은 마치 70~80년대 시대극이 나오는 드라마 세트장 같다. 역전식당, 청소슈퍼, 청소정유소(정류소가 아니고), 청소정육점, 고향다방, 광국이용원(이발소), 청소 소 돼지 인공수정소, 진다방… 청소면의 마을 간판에도 고스란히  세월이 느껴진다. 특히나 오래된 듯 보이는 진다방은 진하고 달달한 다방커피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줄 것 같았지만 혼자 다방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 포기했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40년은 족히 됐다는 집표함.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마을하고 가깝다 보니까 제사 지내면 떡 갖다 주고 시골인심이 아직 남아 있죠. 요즘 그런 역도 드물어요.” 열차운용원 이준원 씨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청소역 뒤편 거리는 10분이면 다 둘러본다. 200m가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현재 장항선은 복선전철화 및 이설공사 중이다. 기존에 천안, 안양, 도고, 광천 등 큰 도시에 원죽, 삼산 등 작은 도시까지 다니다 보니 철길의 모양이 자연스레 휘었는데 이설공사를 해서 굽혔던 철길을 펴고 있다. 신장항선이 완공되면 기존 역사는 신역사로 이전하고 노선은 신장항선으로 이용된다. 또 간이역 등은 폐지되고 청소역에는 기차가 정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청소역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영구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임용광 차장과 이준원 열차운용원.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우리나라에 이런 역이?
청소역을 비롯해 우리나라엔 독특한 이름의 철도역이 많다. 경북선 백원역, 호남선 천원역, 전라선 오류역 개운역, 중앙선 이하역 서지역 국수역, 충북선 오근장역, 경의선 수색역 동안역, 영동선 고사리역 하고사리역 마차리역, 정선선 별어곡역, 동해남부선 안락역 입실역 사방역 효자역, 경전선 반성역 양보역, 광주선 극락강역 등이다.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청소역 뒤편에 자랑스럽게 붙어있는 근대문화유산 등록 표지판. 2007년 10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이중에는 열차가 서지 않는 무인역도 있고 으리으리한 새 역사도 있지만 그래도 간이역이 정겹다. 간혹 출장지에서 간이역을 여행하는 ‘철도사랑동호회’ 회원들을 마주칠 때면 찾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젠 쏠쏠한 그 재미를 알 것 같다.    

청소역을 찬찬히 둘러본 뒤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린다. 역사를 빠져나가는 문이 마치 과거를 뒤로하고 현재로 빠져나가는 통로 같다. 마음이 아쉬워 뒤를 돌아보았다. 역사 사이로 보이는 청소교회 건물 외벽에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쉬어 가는 정거장. 과거를 청소하지 않고 기다리는 역. 청소역은 그렇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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