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영광] 말로만 듣던 영광 굴비의 고장 법성포를 찾았다. 영광 굴비는 언제나 품귀이고 법성포는 항상 대목이라더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그 옛날 조기가 하도 많아 그물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던 칠산 바다. ‘물 반 조기 반’이던 호시절은 지났지만 그 넉넉한 품은 여전하다. 칠산 바다를 따라 오감(五感)이 제대로 호사를 누리고 돌아왔다.
1st day 하늬바람과 천일염의 만남
포구의 정취를 찾고 싶어 떠난 영광 법성포. 번지는 제대로 짚은 듯하나 포구 앞에 인공섬을 만드는 대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하다. 그래도 굴비의 고장이라는 명성은 어디 가지 않았나 보다. 법성포 사람들 중 95%는 굴비와 관련된 일을 할 정도로 이곳에서 굴비는 중요한 생계수단이자 법성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없다. 외지인이 보기에는 꽤나 분주한 모습인데 과거와 비교하면 요즘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옛날 영산포와 함께 서해안을 대표하던 포구였던 법성은 칠산 바다의 조기떼가 줄어들면서 이제는 연근해에 나가 조기를 잡아와야 하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법성포가 굴비로 명성을 떨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 일대에서만 생산되는 1년 이상 간수를 뺀 천일염만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하늬바람(서쪽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이용해 자연건조시킨다는 점이다.
안동 간고등어 간잽이의 노련한 손놀림에 견줄만한 간잽이의 기술을 영광에서도 볼 수 있다. 집집마다 염도의 기준이 다르고 말리는 방법도 다르지만 하늬바람에 꾸덕꾸덕 말리다보면 결국은 맛 좋기로 유명한 영광 굴비가 되는 것이다. 워낙 귀하고 비싼 굴비가 오가는 곳이라 그런지 호객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단골이 많이 확보된 데다 하루 이틀 장사한 게 아니라는 뜻. 황굴비인지, 부서(조기의 사촌쯤 되는 생선으로 모양이 비슷하다)인지 팔 때 확실하게 설명을 하는 것 또한 불문율이다.
“영광에 오면 전부 다 굴비만 파는 줄 아는디, 요즘은 냉동시설이 잘 되어 있어 먹기 직전에 손질을 하지라. 지금 널어 말리고 있는 저 녀석들은 조기처럼 생기긴 했어도 부서라고 중국산이제. 가격도 영광 굴비에 비하면 1/3~1/4밖에 안 되지라.”
지금의 법성포 규모가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상점과 식당들이 모인 거리를 돌다보니 정신이 쏙 빠진다. 그나마 공영주차장이 넓어 차를 세워두고 돌아볼 수 있어 좋다.
포구가 싱겁게 끝나버리나 싶었는데 법성포의 번잡한 분위기와는 상반된 곳이 윗동네에 자리한다. 포구 끝자락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법성진 숲쟁이와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가 있다. 그중 법성진 숲쟁이는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에도 선정된 바 있는 곳. 조선 중종 때 법성진성을 축조할 당시 인공조림한 곳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나무 크기로 보아서는 그 이후의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느티나무가 주를 이루는데 서쪽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기 위해 집단적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높이가 23m에 이를 정도로 키가 커 한낮에도 햇빛을 다 막을 정도다. 지금은 정자와 평상이 마련되어 있어 동네 주민들의 쉼터 역할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법성포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고. 영광 굴비의 또 다른 주역이다. 자그마한 돌다리인 부용교에서 법성포를 내려다보는 재미도 놓치지 마시길.
백제 불교 도래지와도 지척이다. 백제 불교 도래지는 법성포라는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인도 간다라의 고승 마라난타 존자가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옛 백제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비류왕(서기 384년) 때 이곳에서 처음으로 불법을 전파하였다. 당시 지명은 아무포(阿無浦)였으나 마라난타의 설법 후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의 법성포(法城浦)로 지명을 바꾼 것. 또 마라난타 존자가 부근의 불갑산에 건립한 불교사원이 불갑사로, 영광 법성포가 한국불교사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칠산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길
“광주서 왔써라? 굴비 사러?” “아, 아니요…, 그냥….” “뭐 요즘 택배로들 다 시켜먹던디…, 저거가 아가씨 찬가? 그럼 칠산 바다도 보고 왔겄네?” “아뇨, 아직….” “아따, 그 좋은 카메라는 뭣 땀시 들고 댕기나, 거기 차 가지고 한 바퀴 싸게 돌아보소. 길을 을메나 잘 맹그러 놨는디. 다들 여그 오면 굴비 타령만 실컷 허다 가는디 칠산 거그도 가봐야제.”
숲쟁이를 서성이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쏜살같이 말씀을 건네고 가신다. 말동무 좀 해드리려 했는데 웬걸, 그냥 가버리신다. 그래도 ‘먹고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잠깐 쉴 데가 있으면 참 좋으련만…’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중요(?)한 정보를 던져주시니 고맙다. 백수해안도로엘 가보라는 것이다. 사실 숲쟁이 할아버지가 아니었더라도 영광에서의 첫날 일정에 백수해안도로에 가볼 참이었는데, 잘됐다. 사실 외지인에게는 생소한 곳이지만 칠산 앞바다나 백수해안도로는 호남의 명 드라이브코스 중 하나다. 동해안 7번 국도와는 또 다른 맛이다.
지난해 10월 한국도로교통협회가 전국의 모든 도로를 대상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공모한 적이 있는데 그중 백수해안도로가 아홉 번째로 선정이 되었다. 법성포 초입에서 시작되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금세 나올 줄 알았는데 좁다란 산길과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지나야 한다. 이 길이 맞나 싶어 물어보기를 여러 차례, 다들 그저 곧장 가면 된단다.
염산·백수 방면으로 핸들을 틀자 칠산 바다가 활짝 펼쳐진다. 총길이 16.5㎞의 해안도로. 거북바위, 모자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솟아 있는가 하면 일산도부터 칠산도가 만들어낸 풍광 도 빠지지 않아 중간중간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칠산정이 돔배섬을 비롯한 해안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가장 좋다.
한편 법성포에 왔으니 다른 산해진미는 제쳐두고 굴비는 꼭 맛보아야 할 음식. 어디로 갈까 망설여질 정도로 일대에 굴비정식을 하는 식당이 무척이나 많다. 어딜 가나 본전은 뽑는다는 게 전라도 음식점이라는 말처럼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법성포 일대에 큰 규모의 식당이 많지만 손님이 많아 정신이 없다는 것이 단점.
한가롭게 식사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포구 끝자락의 다랑가지를 추천한다. 굴비뿐만 아니라 꽃게장이나 병어 등 특이한 음식을 두루 맛볼 수 있다. 굴비작업장과 간장게장 사업을 해오던 주인이 차린 식당이라 재료부터 맛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게 없다. 수십 가지 반찬 대신 맛깔난 음식만 낸다는데도 20가지는 된다. 게살과 알로 담근 꽃게얼젓 같은 귀한 반찬은 다랑가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2nd day 영광 하면 삼백, 그중 천일염이 으뜸
이튿날은 조금 일찍 일어나 포구에 나간다. 매일 포구에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노점상들이 좌판을 열기 때문. 전날 사람들에게 배 들어오는 시간을 물어보니 7시 경이란다.
8시쯤 나가니 상인들은 생선 손질에 여념이 없다. 좌판에서도 역시 조기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꽃게나 병어, 서대가 그 뒤를 잇는다.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살아서 펄떡이는 생물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로 제법 붐빈다. 또 매일 오전 10시에는 수협공판장에서 그날 잡아온 생선의 경매가 열리므로 외지인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다.
법성포 일대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 정도면 식사와 쇼핑까지 논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영광 굴비 맛의 또 다른 비결을 간직한 천일염전. 영광·광주로 가는 길에서 염산면으로 빠지면 되는데 이 일대에 워낙 염전이 많은데다 딱히 안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염전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디 염전 가냐고 되물으니, 그냥 구경 왔다고 하면 된다.
영광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로 전국 소비량의 12%가량을 이곳 염산면과 백수읍 일대에서 생산하고 있다. 한낮에, 그것도 해가 쨍한 날에 가야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름 한철에 가장 바빠야 하는데, 올해는 비가 자주 와 재미를 보지 못했단다. 그래도 포대에 담을 소금이 창고마다 그득하게 쌓여 있는 걸 보니 영광 하면 삼백(三白 : 소금, 쌀, 눈)라는 표현이 괜한 소리는 아닌가보다. 날이 꾸물꾸물해서인지 아직 본격적인 작업은 시작되기 전인 듯하다. 이제 날이 추워지면 염전도 휴식기에 들어간다. 김장철을 앞두고 지금 작업이 한창이지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쯤은 가능하다.
점심은 백합죽이다. 염산면과 인접한 백수읍으로 가면 30여 년 전통의 백합죽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역시 전라도인지라 죽 한 그릇이라고 얕볼 수 없다. 반찬 가짓수도 가짓수지만 백합 양이 장난이 아니다. 통통하게 살이 찬 쫄깃한 백합이 넉넉하게 들어 있어 죽을 먹고 난 후의 서운함은 전혀 없다. 허름하지만 점심시간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이니 예약은 기본이다.
식당에서 나와 불갑 방면으로 가면 불갑사에 닿을 수 있다. 백제시대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존자가 세운 절로, 오늘날에는 가을철 꽃무릇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절정을 이루는 꽃무릇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1시간 30분~3시간 코스의 불갑산 등산을 위해서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주차장에서부터 본전에 이르는 길은 깍쟁이 같다 싶을 정도로 정돈이 잘 되어 있다. 그래도 절 입구의 숲길은 걷기 참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