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경주] 걸음을 멈추고 한해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힘껏 뛴 흔적도, 털썩 주저앉은 자국도 보인다. 심호흡 한번 하고 다시 걷는데, 청마의 고삐를 잡고 가던 마부가 쪽지 한 장을 건넨다. ‘처방전’이란 제목의 종이 안에는 ‘경주 골굴사 템플스테이, 심기일전에 특효’라고 쓰여 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품은 골굴사
잰걸음이 몸에 밴 탓에 천천히 걸으라는 핀잔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골굴사에 오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렇게 골굴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제법 가파른 돌계단을 만난다. 타박타박 돌계단을 올라 마주한 보물 제581호 마애여래좌상은 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사바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 석회암 절벽 꼭대기에 높이 4m, 폭 2.2m 크기로 조각된 이 불상을 뒤로 하고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간다. 이내 굴골사의 석굴 가운데 가장 넓은 굴법당인 관음굴법당을 만난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그 양옆 동굴 벽면에 원불로 봉안된 108관음보살상의 자태가 이색적이다. 여느 법당과는 뭔가 다른 신비함이 묻어있어 시나브로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불가의 전통 수행법 ‘선무도’
일상의 번잡함을 내려놓고 맑디맑아 청량하기 그지없는 골굴사를 한참동안 거닐다보니 어느덧 템플스테이 체험을 준비해야 할 시간에 이른다. 1박 2일간의 템플스테이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늦어도 오후 4시까지는 골굴사에 도착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래야만 템플스테이 숙소이자 종무소인 ‘허심요’에서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울러 여장을 풀고 몸을 누일 숙소를 배정받고 갈아입을 옷을 지급받는다.
“골굴사의 템플스테이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불교금강영관’을 되살린 선무도를 연마합니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과 승병의 호국정신도 선무도에 뿌리를 둡니다.” 보림 법사가 선무도에 관한 설명을 곁들이자 영화 ‘명량’이 뇌리를 스친다. 백병전에서 왜군에 맞서 목탁 대신 창을 들고 용맹스럽게 싸운 승려들 말이다. 그들도 선무도의 고수였을게다.
갑오개혁 당시 승병제도가 사라지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도 한몫 거들면서 선무도는 자취를 감췄다. 이후 1960년대 선무도를 복원하고자 전국의 산사 이곳저곳을 누비며 숨은 고수들을 만난 양익스님 덕분에 선무도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선무도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골굴사의 주지 적운스님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양익스님의 수제자가 된 적운스님은 골굴사를 중창하고 천신만고 끝에 선무도를 전통무예로 일궜다. 골굴사를 ‘선무도의 총본산’으로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내다
저녁공양을 위해 공양간인 ‘마하지관원’에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시신경을 자극한다. 서툰 젓가락질로 저녁공양 중인 파란 눈의 이방인들이 눈에 띄어서다. “마이애미에 있는 사찰인가”라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그들의 그릇을 살피는데, 단 한 톨의 밥알도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 형편없는 영어실력이지만 말 한마디 걸어보고 싶은 욕구가 요동친다. 하지만 ‘묵언’이라고 쓰인 글귀를 보고 조용히 저녁공양에 임한다. 골굴사의 템플스테이는 선무도가 결합했다는 매력 덕택에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발길까지 사로잡고 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16명의 체험객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가꿀 목적으로 골굴사를 찾았다. 이 가운데 한국인은 6명. 나머지 10명은 프랑스, 덴마크, 싱가포르 등에서 온 외국인이다.
저녁공양 후 ‘선무도대학’에 도착한다. 저녁예불을 드리기 위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고, 깊은 명상에 빠진 이들에게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다. 저녁예불을 마치자 본격적인 선무도 수련이 시작된다. “첫날 저녁예불을 마친 뒤에는 동적인 선무도를, 둘째 날 아침공양 후에는 정적인 선무도를 수련하지요.” 몸을 풀기 위한 체조를 마치고 일관 사범의 구령에 맞춰 힘차게 주먹을 내지르고, 하늘 높이 발차기를 한다. 이틀째 수련 중인 프랑스인 보겔(31)은 “선무도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하는 게 재밌습니다. 5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는데 골굴사에 며칠 더 있고 싶어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2년 전부터 골굴사에 기거하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박건량 군(11)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표정 일색이다.
선무도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자리를 옮긴다. 평소 안 하던 발차기를 해서인지 기분 좋은 피로감에 밀려들어 잠을 청한다. 얼마나 잤을까. 귓전을 울리는 목탁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어서 일어나 씻고 출근 준비를 하라며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시곗바늘은 새벽 4시를 가리키는데 이상하리만큼 몸이 가볍고 머리도 맑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기분이에요. 한국에서 좋은 경험을 하게 돼 기쁘답니다.” 둘째 날 첫 일정인 새벽예불을 드리기 위해 숙소를 나서는 싱가포르인 케렌(41)의 발걸음은 가볍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좌선을 하니 청아한 풍경 소리가 고요했던 적막을 살며시 깨운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의 속삭임은 속세에서 가져온 모든 근심을 덜어내라며 마음을 다독인다. 합장을 한 채 느리게 걸으며 명상의 시간을 갖는 ‘행선’에 나서자 쏴아아 바람결에 실려 코끝을 스치는 산사의 겨울바람이 몸과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싱그러운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켜니 심신이 기지개를 켜는데, 이 상쾌함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침공양 후에는 전날 행한 동적인 선무도와 달리 정적인 선무도, 그리고 스님과 체험객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차담’이 기다린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전날 들어왔던 일주문을 나가며 잠시 멈춰 선다. 세상살이로 얼룩진 몸과 마음이 깨끗이 정화된 것 같으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내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사소한 욕심까지도 모조리 끄집어낸다. 다시 자동차 경적소리가 가득한 도시에 나를 던져 넣겠지만 지금 이 차분한 마음이라면 다시 돌아갈 그곳에서 느끼게 될 그 어떤 원망과 미움도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INFO. 골굴사
주소 경북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