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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반추여행] 회상으로 한 해를 되돌아 보다 보길도 보옥마을
[반추여행] 회상으로 한 해를 되돌아 보다 보길도 보옥마을
  • 전설 기자
  • 승인 2014.11.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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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완도] 한 해의 끝자락 12월은 숨 가빴던 지난 열두 달을 되돌아보기 좋은 달이다. 산 정상에 서서 지금껏 걸어온 길을 내다보듯, 한 해의 끝에 선 당신과 함께 유난히 험준했던 지난 1년을 돌이켜 보고 싶다. 해남 땅 끝에서도 남쪽으로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멀고 먼 보길도. 그 섬에서.

자정에 출발해 서울, 광주, 해남을 거쳐 땅끝선착장에 도착하고 나니 벌써 오전 7시. 쉼없이 달려왔건만 이곳에도 보길도로 가는 배편은 없다. 땅끝선착장(갈두항)에서 약 30분 정도 배를 타고 노화도로 간 뒤, 다시 택시나 버스를 타고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졸음이 몰려온다. 뜨끈한 방에 눕고 싶다, 잠투정을 쏟아내는데 어째 선착장 주변이 소란스럽다. “아가씨 참 운 좋네. 도착하자마자 때맞아 일출을 다 보고. 땅끝선착장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바위를 맨섬이라고 하는데 해가 맨섬 사이에 뜨는 걸 1년에 딱 두 번 볼 수 있어요. 봄에 한 번, 이맘 때 한 번.” 새벽잠을 포기한 대신 땅 끝에서 해가 솟는 장관을 본다. 정말이지 운수좋은 날이다. 뜻밖의 횡재에 기운을 얻어 보길도를 향한 마지막 관문을 넘는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아담한 연못과 정자의 경치가 단정한 세연정.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앞 포구에 안개 걷히고 해 비치누나

30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노화도 산양항에 내려선다. 섬에서 여행자의 발이 되는 택시는 귀한 교통수단. 때문에 차 1대에 4명씩 꽉꽉 채워 합승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같은 방향의 어르신 3분과 꼭 끼어 앉아 세연정으로 향한다. 보길도 구경 하려고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앞 다퉈 고향 자랑을 꺼내 놓는다. 그중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역시 고산 윤선도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이맘때 동백나무 아래에 서면 작은 알밤처럼 생긴 씨앗을 거둘 수 있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거 모르는 것들이 자꾸 보길도가 고산의 유배지다 뭐 카는데 아주 모르고 하는 소리여.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릴 듣고 고산이 아주 마음이 상해가지고는 벼슬도 마다하고 제주도 가서 살라고 배를 띄웠다고. 근데 가다가 풍랑이 불어 보길도에 떨어진거여. 와서 보니까 여가 참 좋은기제. 그래서 터 잡고 살았지 누가 보내가지고 억지로 온 게 아니라고.”
어르신 말씀이 백번 옳다. 고산은 보길도의 풍치에 반해 섬에 십수 년을 머물면서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자연의 찬가를 남겼다. 그리고 절경지에 정자를 여럿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한 경치’를 뽐내는 세연정이다. 세연정 입구에는 고산의 생애와 유적을 한눈에 둘러 볼 있는 전시관이 있다. 전시장 뒷길을 따라 5분을 걸으면 실물의 세연정이 나온다. 자그마한 정자와 연못이 마주본 세연정은 문헌 그대로 단정한 경치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비 맞으며 숲길 산책.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세연정에서 5분 거리에는 시 한 수 곁들여 산책하기 좋은 고산문학체험공원이 있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가 없지만 이만한 정원이 내 집 안마당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이 앞선다. 아주 오래전 머릿속 꽉꽉 막힐 때 마다 세연정을 찾았던 고산이 그랬듯 뒷짐 진 채 못 주변을 거닌다. 아름드리 동백나무와 소나무, 바람이 스칠 때마다 우 우, 울어대는 대나무 숲이 차례로 그늘을 내준다.  버스, 배, 택시를 정신없이 갈아타는 바람에 내가 지금 여행을 하는지, 쫓기는지 헷갈렸던 몸과 마음이 차츰 평온을 되찾는다. 이름 아침 출발한 덕에 해는 아직 중천. 고산이 노래했던가. “앞 포구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따끈한 볕 담뿍 머금은 못이 눈부시다. 경치가 먼 길 찾아온 값 한번 톡톡히 치러주는 구나.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살찐 물고기 몇 마리나 걸렸는고
보길도에는 일주도로가 없다. 때문에 세연정에서 섬 남쪽 끝자락의 보옥마을로 가려면 왔던길을 되짚어 보길면사무소 방향으로 나갔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약 12km를 돌아가야 한다. 지도를 가로질러 보길도까지 왔는데 조금 더 돌아가면 또 어떠리. 느긋하게 마음먹고 정동마을, 정자마을, 선창마을을 차례로 지난다. 해넘이 명소라는 망월봉 끝자락의 망끝전망대를 지나자 알록달록 어여쁘게 어울린 작은 어촌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를 낀 어촌풍경이야 다 엇비슷하지만, 보옥마을에는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집집마다 꼭 한두 개씩 보이는 동글 몽글한 돌덩이다. 생긴 것은 달걀인데 크기는 꼭 공룡알만 하다. 이 돌을 쌓아 탑을 만든 집도 있고, 무슨 수호신 마냥 마당에 고이 모셔둔 집도 있다.

“저기 공룡알 해변 내려가면 지천에 이만한 깻돌이 천지여. 돌이 동그랗고 갸름하니 이쁘장항께 너도 나도 하나씩 주워 와서 집 앞에 놓아두지. 보기 좋으라고.”

마을을 장식한 돌덩이들이 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겠다. 마을 앞쪽에 있는 공룡알 해변에 내려서니 옥빛이나 연한 상아색이 도는 공룡알이 차고 넘친다. 모난 곳 없는 동글동글한 돌덩이로 뒤덮인 해변과 뾰족한 보옥산의 어울림이 아기자기하다. 손에 쥐기 좋은 조그만 공룡알을 하나 주워 바다에 물수제비를 띄운다. 통, 통, 공룡알이 바다 위를 뛰어간다.

경치에 취해 해변을 헤매는데 마을 쪽에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아침 녘 바다에 다녀온 어부들이 갓 잡은 멸치를 삶고 있다. 폴폴 풍기는 고기 익는 냄새에 잊고 있던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서둘러 공룡알 해변 앞쪽에 자리 잡은 보옥민박으로 향한다. 병어 감자조림, 따개비 무침, 상어조림 등 제철 해산물로 맛깔나게 차리는 어부의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살찌고 좋은 물고기가 몇 마리나 걸렸느냐. 갈꽃에 불 붙여 가려서 구워 놓고 술병을 기울여 표주박 술잔에 부어다오.” 고산이 노래했듯 누구든 내게 살찐 물고기와 술잔을 내주길.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너른 바다와 얕고 둥근 산 사이 알록달록 보옥마을.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어화 날 저무니 편히 쉼이 마땅하도다
“뾰족산은 뭐 1시간이면 왔다갔다 해불제” 산을 탈까 말까 망설이다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묻는데 보옥민박의 김옥동 사장이 호언장담을 한다. 이름만 ‘뾰족’이지 해발 200m도 안 돼 1시간이면 정상을 찍고 오는 동산이란다. 밥상머리 앞에서 이말 저말 주워듣고 나니 그렇게 만만할 수가 없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도 할 겸 다녀오기에 좋겠구나 싶다.

보옥민박을 나와 뾰족산민박 담장 뒤쪽으로 난 산길로 오른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갑자기 앞이 시커멓다. 키 큰 동백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섰다. 숲에 들어설수록 여기가 마을 동산의 동백나무 숲인지, 먼 나라의 밀림인지 헛갈린다. 구렁이 수만 마리를 땅에 심어 둔 듯 구불구불한 동백나무는 금방이라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일 것 같고, 이제 막 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한 동백꽃은 걸음걸음 붉은 꽃비를 뿌린다. 이곳이 고산이 감탄하고 사랑했던  선계일까. 섬에 닿은 지 반나절 만에야 보길도의 참 풍경을 만난 듯 하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보옥민박의 어촌 밥상. 단돈 7000원에 바다를 맛보다.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멸치 작업이 한창인 공룡알해변 앞 풍경.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잊고 그저 위로 향하다 보니 어느덧 중턱. 동백나무 숲이 끝나고 가파른 바위지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동아줄을 잡고서야 겨우 오를 정도로 까마득한 벼랑이다. 숨 고르려 고개를 돌리면 콩알만 해진 보옥마을의 풍경과 마을을 마주 본 남해의 푸른 물결이 보인다. 이왕 온 거 정상까지 찍고 갈 욕심에 이 악물고 바위를 오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죽을 둥 살 둥 손과 발을 동원해 네발로 정상에 닿았더니 키 큰 나무에 가로 막혀 앞이 보이질 않는다. 바다가 보일 듯 말듯, 마을이 보일랑 말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금 더 빨리 내려가려 지름길을 택했다가 길을 잃고 만다. 동산이라고 만만하게 봤던 뾰족산을 헤맨지 3시간 만에 만신창이가 돼 마을로 돌아온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노을이 내린 보옥항은 잘 익은 홍시빛. 2014년 12월 사진 / 전설 기자

“처녀 혼자 보냈는데 도둑놈을 묻히고 왔네.” 마을 어귀에서 마주친 박소임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놈’을 찾는다. 알고 봤더니 바짓단에 도둑놈의갈고리가 잔뜩 엉겨 붙어 있다. 박 할머니가 옷을 팡팡 털어주며 “뾰족산은 오르는 길이 한길이여. 간 데로만 되짚어 와야제. 길 잘못 들면 고생혀. 어디든 그라제. 뭐가 잘못됐다 싶으면 왔던 길을 되짚는 게 제일 빠르제.” 하신다. 그 다정한 잔소리에, 노을 지는 보옥항 풍경에 마지막 긴장을 놓는다.

지칠 대로 지친 순간 땅 끝에서 솟아오른 해를 본 것처럼, 황홀한 풍경에 한껏 들떠 있다가 벼랑을 만난 것처럼 웃고 울 일을 반복하며 한해의 끝자락에 섰다. 비록 벼랑을 넘어오는 내내 몸은 고됐으나, 그 고생 덕에 웃을 날이 온다는 것이 이젠 안다. 하루의 끝, 지친 몸과 마음이 잠시 쉴 시간. <어부사시사>의 마지막 시구처럼, 날이 저물었으니 편히 쉼이 마땅하다. 어서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뉘여야겠다.

INFO. 보길도 여행
주소 전남 완도군 보길면 보길동로 19번길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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