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용인] 경기도 용인 구봉산 자락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일부러 찾아온 관람객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곳이다. ‘정숙해야 한다’는 박물관 관람의 기본을 깨고 부모님과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하는 둥지박물관. 이곳에선 아빠와 엄마가 최고의 선생님이다.
마음껏 보고 즐겁게 놀다 가세요
“쉿! 조용히 해야지~.” “여기서 뛰면 안 돼.” “자꾸 그렇게 장난치면 혼난다.” 나무람과 타이름이 반복되는 아이들과의 나들이. 모처럼의 외출이 즐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둥지박물관에서라면 그런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아무리 그래도 박물관인데 이렇게 떠들어도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조금만 머물다보면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들이 마음 편히 놀다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이내 공감하게 된다.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도로와 인접해 있는 것과 달리 둥지박물관은 산속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다. 1998년 처음 개관할 당시부터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자 일부러 이런 곳에 입지를 정했다고 한다. 무엇이든지 빨리 보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의 문화 인식과는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좋은 곳은 일부러라도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박물관을 조성하였다. 지금의 둥지박물관은 미술관으로 시작해 생활사전시관, 만화전시관 등으로 확장된 모양새다.
현재 미술서예관은 특별전에 한해 개방을 하고 생활사와 만화전시관은 상시 문을 열고 있다. 이 중에서 생활사박물관은 소장품도 방대할뿐더러 흥미를 끄는 물건이 가득한 추억박물관이다. 채창운 관장이 30여 년간 수집한 것들로 우리 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이 모여 있다고 보면 된다. 문이 달린 텔레비전, 손으로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기계식 전화기, 한때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냉장고와 쌀통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들이 한자리에 모여 옛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기계식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통화음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고 불과 몇 개월 전에 산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도 구식이 되어가는 요즘과 비교하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하마터면 고물상이나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뻔했던 물건들이 한 사람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부모들이 더욱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가도 막상 보면 부모들이 더 즐거워한다”는 것이 황진철 부관장의 설명. 아마도 본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물건들이라 그런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자연스럽게 옛 추억을 얘기하게 된다고.
둥지박물관은 자유롭게 돌아보며 관람할 수 있다는 점도 특이하지만 ‘부모의 큐레이터화’라는 독특한 관람법을 소개하고 있다. 안내원이 딱딱하게 박물관 안내를 하는 것보다 부모들이 직접 써보았던 물건이니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설명을 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에서다. 결과는 대성공. “무엇에 썼던 물건이었을까?” 하는 부모들의 질문에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면 박장대소가 터지고 뒤이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박물관 체험’이다. 일례로 아이들에게 쌀통을 가리키며 무슨 물건처럼 보이는지 물어보면 열이면 열 냉장고라 대답하고, 또 토큰을 보고는 다들 엽전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기계식 전화기도 둥지박물관 내 생활사박물관의 명물이다. 열심히 다이얼을 돌려가며 아빠에게 전화를 한다는 나연이 남매는 이상하게 자꾸 걸리지 않는다며 계속 엄마를 불러댄다. “엄마, 엄마 어렸을 땐 이런 전화기 썼어요?” “그러엄~, 그런데 이것도 부잣집에나 있었지. 지금처럼 다 휴대폰 갖고 다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지.”
오늘날 디지털 전화기에 댈 것도 아니지만 30~40년 전만 해도 개설 비용이 수백 만원을 호가하던 것 중 하나였던 기계식 다이얼 전화. 현재의 통신주파수와는 맞지 않아 전화국에 따로 부탁해 어렵사리 개통을 했다고 한다.
“잊고 지내던 물건들을 찾은 것 같아요. 아이들은 빨리 가자고 보채는데 자리를 뜰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썼던 물건들을 다시 보니 정말 정겹습니다. 나중에 우리 신랑이랑 다시 오기로 했어요.” “아이들에게 부모가 무슨 물건들을 사용하며 살았는지 보여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로웠던 게 우리에겐 좋았지만 아쉽더군요.” 박물관을 찾았던 사람들이 남긴 관람후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 잊고 지냈던 옛 추억에 다들 은근히 감동 받은 눈치다.
희귀본이 가득한 만화역사관
만화박물관에도 진귀한 소장품들이 많다. 대부분 더 이상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본들로 만화가이자 수집가인 하고명 관장이 40년간 힘들여 모은 것들이다. 요즘이야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어디서나 손쉽게 만화를 접할 수 있지만 배고프고 힘들던 1950~60년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만화,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만화사의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용환의 <수호전>을 시작으로 김성환의 <고바우영감>, 김산호의 <유리천사>,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 이르기까지 어린 시절 만화가게에 쭈그려 앉아 보던 옛 기억 속의 만화를 보고 사람들은 즐거운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한편 특별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미술서예관은 ‘내가 보기에 좋으면 명품’이라는 황호석 관장의 지론이 반영된 곳. 그림을 잘 모르면 어떤가. 보고 느낌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며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알게 해주는 곳이다.
학원이다 과외활동이다 해 아이들과의 대화가 턱없이 부족한 요즘. 일부러 대화 시간을 가져볼 것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엄마 아빠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생생한 이야기가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훈훈한 연결고리가 되어줄 것이다.
